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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먹] 모두가 자신의 연구 윤리와 싸우고 있다


누군가의 삶을 학문의 장으로 초대할 때 그를 대상화하지 않고 존엄하게 재현하는 일은 연구자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윤리적 책무다. 그렇기에 내게 IRB 심의는 장애를 연구하며 거쳐야 할 자연스러운 관문으로 여겨졌고, 연구 전반에 개입될 수 있는 비장애 중심 시선을 점검할 기회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문을 통과하며 마주한 현실은 예상과 달랐다. 어느덧 IRB는 연구 윤리를 명분 삼아 연구자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있었다. 연구자가 현장에서 발휘해야 할 맥락적 판단은 절차 앞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IRB 제도가 요구하는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일이 내면의 성찰을 앞지르며 찾아오는 무력감. 반려 이후 내 연구가 마치 윤리적 결함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자괴감. 이 감각의 누적은 연구자의 비판적 시선을 서서히 마모시킨다. 그 과정에서 연구 윤리는 마땅히 품어야 할 성찰적 긴장이 아닌 연구자를 길들이는 관료적인 틀로만 남게 된다.

나의 연구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상업화된 플랫폼 안에서 다른 삶을 구상하는 미디어 실천에 주목했다. 흔히 유튜브는 선정적인 영상과 허위 정보의 온상지로 비판받지만, 장애인들에게 그곳은 플랫폼 자본주의의 질곡에서도 자신의 비가시적인 몸 경험을 확산시키는 공간이었다. 이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몸말을 영상으로 기록하며 비장애 중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그 낯선 세계에 공명하며 각자의 취약함을 나누는 이들과 서로를 돌본다. 해당 연구는 장애인의 일상 기록이 개인의 내밀한 서사에 갇히지 않고 공동의 경험으로 확장되며, 정상성 규범에 균열을 내는 정치적 실천임을 조명하고자 했다.

문제는 이 같은 긍정적 양상을 조명하는 것과는 별개로, 연구자가 견지해야 할 비판적 시각이 IRB 심의 과정에서 ‘윤리적 민감성 부족’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장애인이라면 학력 자본이나 사회경제적 여건, 주변의 지지 등이 뒷받침되었을 개연성이 크며, 이러한 배경은 장애라는 단일 범주 뒤에 가려진 차이를 분석할 중요한 쟁점이 된다. 연구 참여자의 미디어 실천을 낭만화하지 않는 균형 잡힌 분석을 위해서라도 이들 사이의 상이한 위치성(positionality)을 드러내는 질문은 꼭 필요했다. 그러나 IRB는 관련 질문을 ‘심리적 불편감’을 유발하는 부적절한 시도로 규정하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연구 참여자와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심의 위원들의 눈에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에 대한 위해로 비친 것이다.

IRB 승인이 연구 착수의 선결 조건인 상황에서 위원회의 지적에 문제를 제기하며 시간을 지체하기보다는 서둘러 요구 사항을 수용해 절차를 매듭짓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진정한 난관은 그 이후였다. 심의 과정에서 주문받은 연구 참여자에 대한 ‘각별한 주의’는 인터뷰 현장의 소통 방식과 단어 하나하나를 위축시켰다. 비판적인 질문이 참여자에게 대면하기 싫은 경험과 감정을 이야기하도록 압박하거나, 연구 성취를 위해 진술을 유도하는 방편으로 변질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앞섰기 때문이다. 연구 윤리, 정확하게는 IRB 준칙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참여자의 일상을 입체적으로 읽어내기 위해 가닿아야 할 질문들은 머뭇거림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흩어졌다.

참여자들이 플랫폼에 게시한 영상을 장시간 시청하며 이들의 학력이나 가족 관계에 관한 단서들을 우회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지만, 논문에 담지는 못했다. 이들의 미디어 실천이 유튜브 특유의 문법으로 가공되는 양상이나 시청공동체와의 갈등, 연구자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는 참여자의 태도까지도 나는 분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절차주의에 기초한 IRB 심의가 연구 현장의 복잡성을 통제하면서 연구자로서 오랜 시간 체득해 온 감각마저 스스로 검열하게 된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는 IRB 심의에 대한 신경증적인 걱정이 들어찼고, 결국 참여자들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비판적으로 구성해 낼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IRB 제도 자체의 효용을 전면 부정하거나 그 필요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IRB 심의는 연구 윤리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하는 데 기여했고, 연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위해를 사전에 점검하는 공적 장치로서도 분명한 순기능을 지닌다. 그러나 IRB 심의 통과 여부는 연구 윤리의 완결이 될 수 없다. 연구자의 진실성을 재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도 없다. 질적 연구는 연구 절차를 표준화하여 연구자의 영향을 제거하는 기술적 공정이 아니라, 연구의 각 단계를 순환적으로 오가며 문제의식을 조정해 나가는 부단한 대화의 과정이다. 연구자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의사결정을 내리며 합당한 윤리적 근거를 쌓아간다. 그러나 IRB의 심의 모델은 질적 연구의 발견적인 속성을 통제해야 할 불확실성으로 규정하며, 연구자가 현장에서 발휘해야 할 윤리적 예민함을 계획 이탈로 치환해 버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준화된 가이드라인의 준수가 아니라 참여자와의 사이에서 생동하는 관계 윤리(relational ethics)의 회복이다. 관계 윤리는 서로 다른 위치의 두 존재가 마주 앉아 각자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싹튼다. 연구자는 참여자의 세계에 몰입하여 라포(rapport)를 쌓으면서도, 동시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분열적인 위치에서 오는 진통을 감내한다. 한편 연구 참여자는 내밀한 고백이 연구자의 해석에 의해 다른 의미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불안을 안은 채 기꺼이 자신을 열어 보인다. 이처럼 각자의 취약함이 정직하게 맞부딪치며 발생하는 긴장을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나와 너’라는 인격적 관계 안에서 서로의 세계를 횡단하는 대화가 가능해진다.

관계 윤리의 지평 위에서 연구자의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장애를 경험하지 않은 다수자이자 연구자의 위치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이들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왜곡 없이 글 안에 위치시킬 수 있을까? 나의 학술적 언어가 그들이 온몸으로 통과해 온 생의 질감을 단 한 조각이라도 만져낼 수 있을까? 생생한 몸 경험과 다기한 감정들이 평면적인 글로 옮겨지며 끝내 휘발되고 마는 절망 앞에서 연구자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흔들린다. 그러나 재현의 불가능성(unrepresentability)과 치열한 자문을 붙들고 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야말로, 타자의 세계를 향해 조심스럽게 내딛는 관계 윤리의 실천이 된다.

이러한 윤리적 분투는 연구자와 참여자 모두를 이전과는 다른 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참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과정에서 자기 변형(self-transformation)의 귀중한 성과를 얻고, 연구자는 그들의 세계에 참여하며 얻은 성찰을 발판 삼아 또 다른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힘을 기른다. 이 관계의 깊어짐은 사전에 승인된 질문이나 동의서 한 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IRB의 차가운 서류 뭉치 속에 결코 담기지 않는, 마주한 두 존재가 깊이 연루되며 남긴 윤리적 흔적이다.

연구자들은 모두가 자신의 연구 윤리와 싸우고 있다. 이 싸움은 타자의 삶에 발을 들이는 무게를 매 순간 윤리적 결단으로 감당해 내는 과정이다. 긴 시간 벼려온 이론과 개념이 구체적인 삶 앞에서 끊임없이 되물어지는 과정이며, 자신의 해석 범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낯선 세계를 만나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책임 있는 자리를 지켜내는 일이다. 정답 없는 길 위에서 각자의 윤리적 책무를 짊어진 채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동료 연구자들의 분투에 진심 어린 연대를 보낸다. 우리가 감내하는 그 무게야말로, 연구를 통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응답이라 믿는다.


글. 이해수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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