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편영시] 나의 학술토론 추구미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2일 전
- 5분 분량

노릇하기란 참 어렵다. 우빈의 고민을 읽으면서 다시금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좋은 토론자 노릇을 하기는 왜 어려울까? 그건 ‘좋은 토론자‘란 무엇인지, 또 ‘좋은 토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완전한 정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거야. 게다가 학자들은 실제로 자신이 평생 하고 살아가게 될 대부분의 일들에 대한 트레이닝을 받지 않은 상태로 직업을 갖게 되잖아. 교수법을 배운 적 없이 강의자가 되고,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 제작 기술이나 구두 발표의 구조를 짜는 법을 아무도 가르치지 않지만 평생 그런 발표를 하며 살아야 하고, 실제 직업 세계에 가면 펀딩을 요령 있게 따내는 일이 너무 중요한데 그런 건 그 누구도 가르치거나 집단적으로 그 역량 강화를 고민하지 않아. 이렇게 암묵지로만 존재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일이 ‘토론하기‘일 거야. 우리는 보통 먼저 학계에서 활동하는 선배들이 토론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강의 감을 잡고, 우연한 기회를 얻어 바로 실전에 투입돼.
토론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TPO라는 게 있을 거야. 하지만 공개적인 학술행사에서 진행되는 특정한 발표에 대한 지정토론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나는 우빈과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오히려 토론자가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 그래서 우빈이 겪은 상황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우빈이 나쁜 느낌을 받았다면 그건 토론자가 발표의 범위를 넘어섰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해. 그리고 만약 그 나쁜 느낌의 근거가 토론자가 자기 아는 이야기를 했다는 데로 수렴된다면, 그 감각을 학계의 청중이 느낀다는 사실이 어떤 암묵적인 관습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를 토론해보고 싶어.

핵심부터 이야기해보면, 내가 가장 경계하는 건 학술대회에서의 발표와 토론이 논문 심사처럼 흘러가는 것, 혹은 논문 투고의 예비 단계처럼 여겨지는 공통의 인식이야. 많은 사람들은 SSCI, KCI 정량 실적 경쟁이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는 당연히 논문으로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것임을 전제해버리는 것 같아. 그리고 이때 지정토론자의 역할은 발표자가 제출한 미완의 글을 먼저 읽고 완성된 글로 만들기 위해 어떤 작업이 필요한지를 제안하는 조력자로 설정돼. 이 조력자는 생산적인(productive) 제안 내지는 조언을 하는 사람이 되는데, 토론을 주로 발표자보다 학력이 더 높거나 경험이 더 많은 연구자에게 맡기는 관행, 특히 대학원생이 발표자일 때의 토론이 논문 심사나 심지어는 ‘지도‘처럼 흘러가버리는 경향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
내가 이러한 토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이게 생산성을 우선으로 하는 학계 문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여서이고, 자꾸 ‘연구 방법이 더 자세히 서술되어야 한다’ ’이론적 논의나 선행 연구에서 뭐가 빠졌다‘와 같은 기술적(technical)인 얘기들만 토론자가 발화하다보니 직관적으로 재미가 없게 느껴져서야.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토론이 발표자-토론자의 2자 관계 안으로 소통이 수렴됨으로써 청중을 소외시키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해. 발표자의 발표는 청중 혹은 학계의 동료들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기보다는 지정토론자를 향하게 돼. (혹은 사실 많은 발표가 독백에 가깝다는 생각을 할 떄도 있어.) 토론자도 발표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혹은 매우 진정성 있게 발표자를 응원하고 격려하고 돕는 사람이 돼. 하지만 청중과는 감응하지 않지. 최종적으로 발표자는 짧게 배정된 시간 탓에 1분, 길면 3분 동안 토론자의 질문에 간단히 답하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발표를 완성해. 물론 무대라는 게 깔렸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에서 이 ‘2자 관계’에도 청중 효과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좀 끝까지 밀어붙여 말해보면, 둘 사이에서만, 또 발표한 그 글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할 거라면 그냥 이메일 보내서 커피 챗을 하든 메일을 주고 받든 하는 게 모두에게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청중을 소외시키지 않는 방식의 발표와 토론이란 무엇일까? 여기도 확실한 답은 없지만, 적어도 ‘청중을 고려한다면’ 발표자의 말하기와 토론자의 말하기가 모두 질적으로 다를 거라는 확신은 있어. 난 사실 발표자가 청중을 고려한다면 글을 처음부터 주루룩 읽거나 혹은 시간이 부족하다며 약속한 시간을 멋대로 넘기거나 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 다만 오늘 얘기하는 건 발표가 아니고 토론이니까, 나는 청중을 고려하는 토론을 위한 실천적인 행동 방침이 다른 게 아니라 ’논문 심사 하지 않기‘라고 생각해. 그리고 발표자가 주연이고 토론자는 조연이라는 구별에서 멀어지는 일도 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이런 내 생각도 이렇게 글로 풀어보는 건 우빈 덕분에 쓰게 된 편지가 시작이고, 그래서 이런 원칙을 다른 동료와 구두로 합의해 본 경험도 없다는 게 생각나긴 하는데, 하지만 문화연구포럼을 처음 시작하던 때, 토론자들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서 ”발표문의 완성도를 평가하거나 심사하지 마시고, 발표문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생각들을 토론문에 담아주시면 좋겠다“고 얘기했던 것, 굳이 한 발표에 지정토론을 두 명씩 붙였던 것은 지금에서야 글로 처음 정리해보는 이런 문제의식과 관련되어 있었던 거야. 나는 토론자가 발표를 초과하는 무엇을 했을 때, 그 토론을 듣는 일을 즐겁다고 느끼는 것 같아. 토론자가 발표문과 관련성을 유지하면서도 거기서부터 어떤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토론자가 발표자보다 공부를 오래 해서나 뛰어나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차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거야.
나도 얼마나 그 추구미처럼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토론 추구미는 번역가 혹은 매개자가 되는 거야. 발표를 토론자의 개인적인 언어로 혹은 학술 영역, 정책 영역, 액티비즘 영역 등의 약간은 객관화된 언어로 바꾸어서 청중에게 다르게 가닿게 하는 것 말이야. 많은 역자들은 역자의 글도 쓰고, 역자 주도 엄청 달고 또 우리가 번역서 읽을 때 그런 책들이 이해하기 쉽다고 좋아하기도 하잖아. 토론자도 그런 식으로 자기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보통의 발표문들이 학계에서 권장되는 방식인 ’연구 주제 좁히기’를 충실히 수행한 결과물이잖아. 토론자는 이 발표가 지금 청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여러 담론적 계보 내에 그 발표를 배치해봄으로써 발견해 전달할 수 있을 거야. (이런 작업을 통해 발표자도 오히려 자신이 쓴 글이 무엇인지, 쓰려고 했던 것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수도 있어.) 발표자와 생각이, 특히 이론적 관점이 다른 부분을, 그 차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을 거야. 혹은 발표로부터 하게 된 자기 고민을, 자신의 연구 현장이나 경험을 경유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거야. 나는 ‘남은 바꿀 수 없어도 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을 좀 좋아하는 편인데, 사실 발표자에게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떤지 제안한 것을 발표자가 실행할 가능성보다 토론자가 하는 진실된 자기 고민만큼 자기 자신의 다음을 바꿀 수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도 해. 같은 이야기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덧붙이자면, 사실 모든 경험이라는 것은 그것이 충만했을 때 자신의 세계가 흔들려야 하는 일이고, 그래서 ‘사람은 어떤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런 말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토론자가 자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고 물화된 발표문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토론을 생각하면, 그건 사실 토론자가 너무 안전하고 권위 있는 위치에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하잖아.

지금까지 한 말들은 당연히 발표와 상관 없이 지 얘기만 하는 토론을 옹호하기 위해 쓴 말이 아냐. 청중 앞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청중 앞에서 혼자 말하는 일도 내게 유쾌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아. 나는 최근에 커뮤니케이션학 박사들이 얼마나 실전 커뮤니케이션에는 약한가의 문제에 혼자만의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를테면 말할 때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기 떄문에 앞에서 지루해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말하기에만 몰입하는 그런 거 말야. SMCRE(sender, message, channel, receiver, effect)이 다 중요하다고 학부 1학년 때부터 배웠건만 왜 SM에 있고 CRE로는 가질 못하니 이런 생각이 가끔 드는데, 그러니까 좀 딴소리로 샜지만 자기 얘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 듣는 일이 더 중요할거야. 발표문도 더 잘 읽어야겠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 특정한 토론의 애티튜드나 양식, 톤을 규범화하는 일 또한 경계할 필요도 있어. 나부터가 너무 그런 캐릭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모두가 너무 얌전하고, 격식 있고, ‘무해‘한 토론자인 학계는 지향할 만한 것인가 하면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태도는 또 특정한 계급적 배경으로부터 나오는 언어 자본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우빈에게 받은 편지로부터 쓰인 이 편지를 승호에게 보내. 꽤나 정기적으로 학술행사에 참여한 게 석사과정 입학하면서였으니까 난 벌써 거의 15년 가까이 되었더라고. 그래서 나만의 추구미라는 것도 생기고, 또 너무 굳어져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내게는 이제 꽤나 익숙해진 일들이, 이제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승호에게는 ‘낯설게 하기’ 하지 않아도 아직은 낯선 풍경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어. 물론 요새 학부생은 물론 고등학생들도 학술대회 같은 것을 꽤나 많이 하는 듯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그리고 최근에 신문연에 새로 합류해 첫 문화연구포럼 행사를 함께 하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도 매우 궁금한 부분이야. 그때 지나가면서 한 얘기로는 ‘집중력이 없어서 딴 짓을 많이 하다보니 끝났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게 기억나긴 하는데, 사실 ‘글을 써야 해서 쓰다 보면 알게 되는 나의 진심’의 맥락까지 들어갔을 때 승호의 감상이 어땠는지 궁금한 거야. 너무 머지 않게 승호가 누군가에게 보낸 다음 편지를 읽을 수 있길 바랄게.
줄이면서 하고 싶은 말은 성찰의 시간이 꼭 필요하지만 성찰을 중단하는 시간도 꼭 필요하다는 말이야. 좋은 토론자 노릇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혹은 그렇게 되고 싶다는 열망이 우리를 저만치 나아가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더 뚝딱거리게 하는 것 같기도 해. 사실 당장 나도 지금 세 시간 반 뒤에 하나의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 편지를 쓰면서 ’당장 나는 얼마나 청중을 고려하는 말하기를 할 수 있어서 이런 글을 쓰고 있냐?’ 라는 자기 물음이 들 때마다 다음 단어를 쓰지 못하고 멈춰 있었어. 하지만 잠깐 잊고, 언제나처럼 약간의 개그 욕심을 부리면서 잘 하고 돌아갈게.

글. 김선기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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