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먹] 학술대회의 암과 명: 학회는 대학원생에게 어떤 공간으로 자리해야 하는가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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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5일 전

학문세계에 갓 입문한 대학원생의 입장에서 학회는 연구자로서 정체성을 인정받거나 역할을 이행하기 위한 비중 있는 사회화 통로로 인식되며, 낯선 흥미와 모종의 망설임을 함께 주는 공간이다. 우리는 ‘학술대회에 간 대학원생’을 주제로 만나, 학회의 다양한 기능과 문제에 대한 대학원생들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를 가졌다. <신진>에서 열린 두 차례의 대담은 처음 가보게 된 학회가 어떤 점에서 진입장벽을 만들고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지, 학회 활동이나 참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장점과 가능성을 갖는지, 학회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어떤 공간으로 자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비가시화된 학술노동의 공간으로서 학회1)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계기는 국내 학회들이 대학원생을 포함한 신진연구자들에게 더 다가가기 위한 여러 고민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범 인문사회 분야의 대대적인 축소가 일어나고 국내보다 해외 네트워킹이 선호되는 상황 속에서 학회 운영의 중심 성원은 과거의 기성세대보다 좀 더 젊은 연령대로, 정교수에서 비정규직 박사로 차츰 내려오고 있다. 그럼에도, 신규 박사학위자와 대학원생의 학회 참석률이 저조하거나 네트워킹이 쉽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은 학회의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이에 어느 학회의 임원은 ‘대학원생 스스로가 학회에 장벽을 느끼거나 학회의 중심 성원이 아니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견을 주기도 했다. ‘요즘 학회’는 대학원생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선배 세대와 토론하려고 하는 걸 환영하기 때문에 학회 참여에 주체적인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원생의 입장에서 너무나도 일상화된 학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임원급 연구자들에게 잘 인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못 놀랍다. 학회는 기본적으로 대학원생 자신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보다는 자기가 속한 전공 학술 장의 구조를 인지하고 기존 연구자들이 생성하는 주요 의제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의 위상을 갖는다. 먼저 두 차례 대담에서 확인되었듯, 많은 경우 “대학원생에게 학술대회는 우선적으로 노동의 장소”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학회는 대학원생이 학교를 넘어 학계에서 수행되는 유무형의 ‘학술노동’의 형태를 가장 먼저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이고, 그 노동에 학계 위계질서의 취약자로서 이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쉽게 투입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들은 세션장에 못 들어가는 카운터 담당, 여러 세션장을 돌아다녀야 하는 촬영 스태프, 세션이 끝나기 전에 시작해야 하는 저녁 식사 예약과 인솔, 결제 담당 등으로 참여하면서 학술대회 운영을 밑바닥에서 떠받친다. 학회에서 대학원생들의 노동은 당연하게도 매우 소외적인 노동경험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만들어낸 노동의 결과물이 학술대회 개최라는 형태로 돌아가지만, 그들의 노동 메커니즘 자체는 연구와 노동을 분리시키는 문화 아래에서 비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술대회에서의 노동경험은 ‘도와주어서 고마운 일’이나 ‘나의 앞날을 위한 수련과 경험’으로 환원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며 학회에서 대학원생이 어떤 주체가 될 수 있는지로 나아가는 의미화에 이르는 데는 거의 항상 실패하게 된다. 학술공간에서 학계 구성원에 의해 “환대받기도 전에 먼저 참석자들을 환대해야 하는” 이들의 역설적인 위치는 오히려 노동하는 대학원생이 학회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노동 기간이 길어지면 이들은 종종 간사나 운영위원, 조직위원 등으로 동원되면서 학술대회 뒤에 숨겨진 학술 장의 착취적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연구와 강의 이외에도 학계를 굴리기 위해 숱한 ‘실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한편, 엄연히 필요한 실무에 대한 비용을 헐값에 깎거나 내부 인력에게 착취시키는 “노동의 내부화” 관행이 학계에서 꽤 일반적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연구자의 지위나 젠더에 의해 노동의 분업과 불평등이 발생하는 문화를 보며, 학술대회의 의제나 운영구조가 그 재원을 마련해주는 사업단이나 후원기업의 관심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된다. 나아가 자신의 윗세대인 비정규직 박사들이 정교원을 대신하여 학회 운영과 돌봄을 떠맡는 것을 보며, 학회가 소수의 많은 희생으로 굴러가는 곳이라는 것을, 선배들의 위치가 곧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학술노동의 문제와 쟁점들이 학회에서 공론화되지 않는 한, 이미 긴 시간 노동을 통해 많은 것들을 경험한 ‘신진’들이 대부분의 학술공간에서 애증과 냉소, 두려움과 피로함을 느끼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다.
낯선/경력자들의 공간으로서 학회2)
반대로, 노동하는 위치를 벗어나 어떻게 좋은 기회에 순수한 참석자로 학술대회에 들어가더라도, 대다수의 대학원생들에게 학회에서의 경험은 ‘자신이 활동 주체가 된다’는 느낌을 주기는 어려웠다.
먼저, 대담에서 공통으로 지적되었던 것은 대학원생의 학회 진입 과정 자체가 대부분 직접 정보를 얻기보다 지도교수나 선배를 통해 수동적으로 ‘동원’되는 것에 가까운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권은 대학원 과정에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학계 구성원의 인적 네트워크 자원을 통해 전수된다는 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강의하는 법’이나 ‘논문 투고할 저널 고르는 법’이 그렇듯이) “암묵지의 영역”에 있는 학계의 수많은 지식들 중 하나다. 공론화의 영역에 이르지 못하는 학술노동이 ‘수련노동’으로 격하되듯, 암묵지에 대한 매뉴얼화나 교육의 부재는 ‘암묵지의 차등적 분배’로 나타난다. 소속학교의 규모나 동료들의 유무, 지도교수의 관심사나 범주에 따라 대학원생의 학회에 대한 정보와 인식의 격차 자체가 커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학술대회를 넘어 학회 회원으로서 대학원생이 갖는 이점이 많지 않다는 의견도 나왔다. 학회별로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많은 학회가 논문 투고나 학술대회 참석을 위해서는 회원가입을 요구하고 있기에, 학위를 받기 전에도 대학원생들이 학회에 가입할 기회는 생각보다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편이다. 별도의 수입원이 없는 대학원생에게는 많게는 십여만 원에 달하는 학회의 연회비도 부담스럽지만, 가입하더라도 규정상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면 정회원 자격을 부여받을 수 없는 상황도 많다. 설령 회원자격을 갖추었더라도 박사학위자들에 비해 대학원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자신이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네트워킹 기회가 부족하다는 것은 큰 난점이다. 아마도 많은 학회에서 ‘대학원생 전용 세션’이 만들어지거나 오히려 대학원생들을 따로 고립시킨다는 여러 비판 끝에 다시 없어지는 것 또한, 학술대회에 온 대학원생들을 서로 교류시킬 방법을 고민한 끝에 나온 여러 수순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술대회에서 대학원생이 만나는 대부분의 연구자는 기껏해야 자신이 그간 논문 속에서만 만나던 ‘낯선 경력자들’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의미화는 소거하고, 경력자들의 활동을 더 우대하는 것 같은 학회 분위기 속에서 대학원생들이 처음부터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을까? 학회의 보이지 않는 요소를 구성하고 있지만 결국 학회 구성의 주체가 되지는 못하는 이들의 불완전한 경험과, 이런 경험에 대한 논의 자체가 학회를 포함한 학술 장 내에서 과소한 것이야말로 학회에 대한 장벽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회의 효용”
그렇다면, ‘본격 학계의 기본 성원권’을 가진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전까지는 대학원생에게 학회 활동이 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최근 문화연구 전공 대학원생들을 인터뷰하고, 방송학회에서 동료들과 차세대연구자에 대한 설문을 진행하면서 흥미로운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학원생들이 여전히 학회에 오기를 고민하고 학회에서 ‘현타’를 느끼며 뒤풀이 자리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상황에 있지만, 동시에 여전히 학회가 궁금하고 학회에서 동료들을 찾고 싶으며 네트워킹의 풀을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학회는 대학원에 들어온 학계 구성원의 신참자가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또 다른 학교 밖의 제도적 장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큰 의미를 가진다. 인문사회 분야를 중심으로 대학 제도의 힘이 약화되면서, 과거처럼 대학원 내에서 한 사람이 연구자로 형성될 수 있는 광범위한 지식과 네트워크를 제공받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학회는 대학 밖 학술공동체가 그렇듯-어쩌면 그보다 더 공적이고 효과적으로-이들을 집약할 수 있고, 대학원생에게 여러 형태의 자원과 학술 장의 암묵지를 제공할 수 있는 다수의 연구자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특히 학회는 연구자들을 새로운 학적 세계에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 중 하나다.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대학원생들의 연구관심사가 특정되며 더욱 뾰족해지는 상황에서, 학회 참여 경험은 평소라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연구자의 세계에 잠시 빠져들 수 있는-“나 자신을 그러한 우연한 충돌 상황에 열려 있도록 하는 기회”3)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여러 인적 자원이 만나는 학회는 오히려 대학원생들이 여러 형태의 자원 취득과 의제 구성을 위해 전략적으로 점유하고 활용해야 하는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학원생이 어떻게 학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대학원생들에게 관계적 자원과 교류의 장을 제공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단순히 어떤 세션이나 행사를 기획하는 것 이상으로 학회 전 구성원의 조직적이고 문화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학회가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이를 단순한 ‘금전 지원’을 넘어선 다른 방향으로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학회의 지원 정도로 대학원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학비와 생활비 재원을 마련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현재 연구재단의 장학금으로도 그런 건 충분하지 않다). 그럴 바엔 차라리 대학원생에게 다른 형태의 주체화 경험과 학술자원을 분배해 주고 이들의 노동을 공론화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인 방식이 아닐까 느끼고 있다.
특히, 학회 스스로 대학원생들과 비정규직 박사들이 수행하는 학술노동들의 존재를 이해하고 이것이 어떤 형태의 노동이자 기여인지 명명할 수 있어야 하며, 이렇게 수행되는 노동들에 대해 학회가 어떤 방식의 제도적인 구조를 만들 수 있고 문화적 장치를 만들어야 하는지도 논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학술대회를 통해 학술노동을 공론화하거나 학계에서 수행하는 다양한 노동의 의미를 논의하고 학회의 실천에 반영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수의 학회에서 대학원생을 학회 운영위원이나 조직위원으로 참여하게 하여 학술대회 의제를 설정하게끔 하는 경험은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대담에서 지적되었듯 학회 차원에서의 학술노동을 대학원생에게 불가피하게 전가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들에게 평소에 탐구하고 싶었던 주제에 대해 “판을 짤 권한을 분배”해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양가적 효과를 준다. 대담에 나왔던 “F학회”의 사례처럼 공동의 의제를 만들고 학회에서 노동하는 과정의 전 단계를 성찰적으로 고민하고 토론하는 절차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선례를 만든 공간은 그 과정만으로도 대학원생들에게 인상 깊은 사례로 기억되며 회자되고 있다.
대학원생에게는 여전히 기존 학계 구성원들의 환대와 주체적 동료화의 경험이 필요하다. 언젠가 내가 더 깊게 몸담을지 모르는 많은 학회가 그러한 경험을 더욱 깊이 고민하고 있기를, 그리고 나름의 실천을 통해 변화시켜 왔기를, 그렇기에 앞으로도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공간으로 자리하기를 바란다.
1) <신진> 탁상共론 1회 (2025.04.05) 참조
2) <신진> 탁상공론 2회 (2025.04.19) 참조
3) 김선기 (2019.08.22). "학회의 효용".

글. 김지수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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