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나는 학회의 효용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 글이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류의 꼰대스플레인으로 읽힐지 모른다는 겁도 난다. 그래도 나는 학회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을 믿고 있기에 기꺼이 꼰대가 되고, 또 기꺼이 ‘젊은 문화연구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일조하겠다. 그 계기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제 있을 필요 있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는 ‘문화연구캠프’이기도,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에서 중요한 달력행사로 만들어보려고 하는 ‘문화연구포럼G’이기도, 또 우연히 만들어질 수많은 지적 교류의 기회들이기도 하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은 자신의 프로그램을 고난이도의 기술적 요소, 그리고 풍부한 표현력으로 채우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할까? 곡에 맞추어 온아이스(on-ice) 훈련을 반복하고, 프로그램에 구성한 기술들, 특히 점프를 수백 번 연습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점프를 잘 뛰기 위해서는 근력, 회전력, 유연성, 체공력 등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점프 뛰는 것만으로 체력의 기초 스탯을 키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온아이스 훈련보다 더 장시간의 지상훈련과 여러 종류의 운동, 식단 관리를 병행하면서 피겨스케이팅에 적합한 몸을 만든다. 유연성과 안무동작, 표정의 디테일을 겨냥하면서 유연성과 연기력, 심리적 안정 등에 중점을 둔 훈련을 병행한다. 김연아 선수의 아름다운 연기 뒤에 발레 훈련과 이미지 트레이닝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많은 꿈나무는 피겨스케이팅 종목 자체와 직접적 관련은 없어 보이는 K-POP 댄스를 훈련으로 소화한다.
피겨스케이팅을 정말 잘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도 함께 잘해야 하는 이 원리는 다른 운동 종목뿐만 아니라 문화연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연구)에도 적용된다. 문화연구가 기본적으로 학제적(interdisciplinary) 성격을 가진 학문이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내 생각엔 연구라는 게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인 듯하다. ‘좋은’ 논문을 쓰려면 자기 논문 주제에 비좁게 천착했을 때의 한계를 메워 줄 배경 근육이 필요하다. 문화연구자는 철학자가 아니지만 인식론, 존재론, 윤리학 등에 대한 관점을 필요로 하고, 사학자가 아니지만 역사적 관점과 배경을 필요로 하고, 사회학자가 아니지만 인과관계나 상관관계 등을 다루는 논리력을 필요로 하고, 이 문장은 끝내지 않고자 하면 영원히 이어나갈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석박사 학위논문을 쓰기 전까지의 학부 및 대학원 수련기간(coursework)은 논문 쓰기에 필요한 다양한 기초 근육(역량)을 만드는 시간으로 이해되어왔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그때부터는 이제 기초 근육 대신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의 응용 논의만 해도 되는 것일까? 물론 난 아직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지만,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 상태를 유지하거나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기초를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상황은 바뀌었다. 대학과 제도권 학계가 성과주의적인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대학원을 채우는 구성원 중 ‘연구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삶을 사는’ 그런 환상을 추구하는 학생보다는 얼른 졸업해서 졸업장을 채용시장에서 효용이 되는 자본으로 환금하려는 학생들이 더 많아지면서다. 학술지 논문 한 편의 분량(대략 A4 15페이지)에 맞추어 연구문제를 좁혀, 최대한 빠르게 많은 글을 생산해내는 것이 연구자에게 최대의 덕목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막상 그 방식으로 작업을 할 때조차 기초 근육의 정도가 생산력과 논문의 품질을 결정한다.) 빠르게 학위논문 주제를 정하고, 수업은 그 주제에서 최대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골라 듣고, 당장 자신의 논문 쓰기와 관련 없어 보이는 일에 괜히 나서서 참여하지 않는 영리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주류적 조언의 내용이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중의 하나가 ‘학술대회가 망해 가거나 늙어 가고 있는’ 작금의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Low risk, Middle return’이 행동 결정의 기준이 된 오늘날 상황에서 학회 청중석에 앉아서 시간을 뺏기고, (국제 학회 발표보다 실적점수도 낮으면서 소규모 학술행사들과는 달리 꽤나 완성된 글을 요구하는) 학술대회 발표문을 공들여 쓰고, 심지어 그러한 학회를 위해서 몸과 마음의 노동을 하는 일은 미련하거나 전략을 잘못 잡은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듯하다. ― 물론 학회가 쇠퇴해 가고 있다면 그건 일차적으로 ‘그 학회가 노잼’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발표되는 연구의 내용이나 토론의 품질이 높지 않아서 지적인 자극을 주지 못한다면, 대학원생들에게 적절한 자기 역할이 학회 내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하루나 이틀의 시간을 들어내 세션장에 앉아 있는 것이 마치 ‘동원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고역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어떤 학술행사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우글거린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학회, 즉 학자/연구자들이 모이는 자리 그 자체에 무시할 수 없는 효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학술공동체’ 차원에서뿐 아니라―이러한 대의를 내세워봐야 어차피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개인 차원에서도 솟아난다. ‘좋은’ 학회 경험은 개인의 공부와 연구자로서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고, 오히려 최단시간(Low risk)을 들여 가장 큰 성장 혹은 변화(High return)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앞선 논의로 돌아가자. 만약 최소한 당신이 졸업장이나 논문실적(Middle return)을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좋은 연구’와 ‘연구자로서의 명예’(High return)를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인 것이라면 말이다. (표현력을 키우겠다고 ‘표현력’이라는 말에 갇혀 백날 갸륵한 표정만 짓는다고 표현력이 나아지지 않는다.) 자기 주제와 자기 분과학문, 자기 주변 사람들이라는 테두리에 좁게 갇혀 있을 때 갇히게 되는 알을 깰 수 있는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이 필요하다. 지식의 진보는 아마도 어떠한 위치들에 갇혀 있던 지식의 경계가 무너지는 접합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일 테다.
이러한 마주침의 기회는 구조적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는 듯하다. 대학은 점점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면서 이질적인 사유들이 서로 만날 기회가 제한되고 있다. 검색어를 넣어 논문을 찾는 시대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검색어’를 넘어서는 이질적인 지식에 내가 노출될 기회를 제한하는 기술적 제반 조건이 된다. 학회는 가장 짧은 시간, 단 하루나 이틀을 투자하면 나 자신을 그러한 우연한 충돌 상황에 열려 있도록 하는 기회다. 우리 학계에서 쓴 논문을 학계 사람들도 안 읽어서 문제라는데, 어쨌든 30분간의 발표 시간 동안 다른 연구자가 공들여 쓴 논문을 읽으면서 다른 세계에 빠졌다가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 그 경험은 내 주제에 아주 새로운 분야와 사유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일 수도 있고, 나는 저렇게 연구하지는 말아야지, 저렇게 토론하지는 말아야지 하는 반면교사의 획득일 수도 있다. 학회가 어느 정도 잘 돌아간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하는 효용이기는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어떤 연구가 이루어지는지, 또 어떤 연구가 좋은 연구로 여겨지고 있는지의 동향을 파악하고 자기 연구의 위치설정에 대해 고민할 수도 있다.
발표자로 학회에 참여한다면, 당연히 청중일 때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내 글이 읽히고, 꼼꼼히 비평되는 경험. 익명적인 지식으로서의 논문이 아니라 발표자의 얼굴과 이름이 있는 상태로 내 논문이 읽히는 자리는 결국 한날한시에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야 하는 오프라인 학회뿐이다. (이 역시 학회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발표를 함으로써 학계의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얼굴을 알리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너무 많은 비판을 당하면 어쩌냐고? 그 비판을 수용하든, 자기 갱신의 자양분으로 삼든 어느 쪽이든 그 비판은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 발표하는 논문의 수준이 낮아서 쪽팔리는 쪽이면 어떠냐고? 어쨌든 학술 장은 글과 말로 자신을 드러내는 ‘관종’의 성격이 어느 정도 끼어드는데, 주목 경제에서는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
학회 갈 시간에 자기 연구나 더 하는 게 낫다는 냉소적인 태도는 한편으로 현재의 학회를 반성케 하는 계기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학회를 조금 더 긍정적인 경험이 되게끔 개선하려고 하는 대안적 실천들에도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나는 제안한다. 지금까지 학회에서 했던 그 나쁜 경험들이 학회의 본질은 아닐 수 있으니, 좀 더 좋은 학회 경험을 만들어 보고 또 거기에서 함께 만나자고. 물론 여전히 학회라는 개념 자체가 이 시대에 더는 필요 없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안 된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테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swagger다. 해보겠다는 사람들 앞에서 괜히 초 치는 소리 하지 말고 떡이나 먹자, 굿은 나와 신문연이 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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