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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저건] 장애학 앞에서 내가 하게되는 자기방어

나는 석사논문에서 발달장애 자녀를 시설에 보낸 어머니들을 인터뷰하여 중증발달장애인의 자립을 어떻게 다시 상상해볼 수 있을지를 다루었다. 나는 가족이 발달장애인을 통제하고 치유하고 시설화한다는 말을 못 견디겠다는 이유로 이 주제를 시작했다. 이 말에 긁혔다는 것이 보여주듯 나는 오랫동안 장애학 논의들을 내 삶에 붙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읽을 때마다 상처를 받았으며, 논문에도 거의 반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변명하기와 회피하기 땅굴파기 등등을 하며 졸업 후 시간을 보냈다.


이 글은 내가 장애학 책을 읽으면서 또 석사논문을 쓰며 갈등했던 지점들과 그럼에도 관련 몇몇 의제에 대해 할 수 있게 된 말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초안은 25-1학기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열린 <섹슈얼리티 이론> 수업을 청강하며 작성되었고, 앨리슨 케이퍼의 책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와 김은정의 책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다. 이보다는 나아가야 되고 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어 1년 전 글을 지금 보내주게 됐다. 읽는 분들께도 발달장애 돌봄이나 탈시설 관련해서 이런 측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전달된다면 기쁠 것 같다.



장애와 관련된 두 권의 책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하게 되는 반복되는 고민들을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나는 자폐가 있는 동생과 어찌저찌 살아오면서 장애가 그 자체로 비극이라든지 없어져야 할 무언가라는 생각은 점차 하지 않게 되었고, 장애가 없는 걔의 모습 또한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장애에 의해 나타난다고 생각되는 특정한 행동이나 상황들에 익숙해지면서 어떤 건 약간은 긍정하게 되고, 장애와 함께 잘 살 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동시에 나는 걔를 완전한 성인으로 대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걔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고, 남들에게 이상하게 여겨질 어떤 행위들이 좀 줄어들길 바라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내 비장애중심주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걔와의 관계에서 내가 취하게 되는 보호자적 위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애와 관련된 이론들이나 논의들을 읽을 때, 오만하겠지만 나는 나를 장애인의 위치에 대입하지 못하고 장애인을 보호하거나 돌보는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보호자의 위치에서 왜 나는 걔가 더 규범적인 장애인이기를 바라고 걔의 무언가를 치유하고 싶어하는가? 김은정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가족의 명예를 유지하거나 도덕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물론 그런 거 진짜 있으며 위악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전부겠지만서도) 그것이 관리하기 편한 몸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모든 돌봄 책임을 지는 상황에서 혼자 씻고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없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장애 정도에 따라 갈 수 있는 기관이 위계화되어 있고 장애가 심하면 어디에 맡기는 것조차 미안해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치유열망을 품지 않을 수 있는가? 몸이 통제되지 않으면 애초에 집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나아지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보호자가 규범적인 장애인을 바란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돌보기 편한 장애인을 바라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것이 치유열망을 추동하는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닌 것 같아 덧붙이면. 나는 걔를 보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볼 때, 친구가 없어서 외톨이로 지내는 것을 볼 때,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하고 그러다가 이상한 상황에 처할 때, 내가 생각하는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에서 자꾸 미끄러진다고 느낄 때 그런 것이 좀 견디기 힘든 듯하고 걔가 정상에 가까워지길 바라게 되는 것 같다. 걔의 몸이 총체적으로 세상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니까. 장애가 환대받는 미래를 욕망해야 한다는 케이퍼의 주장이 우리 사회 전부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 되는 것 같고 그래서 그런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냉소하게 되는 것 같다. 무엇이 먼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를 때 바뀔 수 있는 것은 몸 밖에 없다는 환상을 갖게 되고 그래서 자꾸자꾸 내 치유열망을 정당화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


우리 동생이 기껏 해봐야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마찬가지로 발달장애자녀를 두었던 우리 엄마의 친구들은 지금이 좋은 거다, 더 안 컸으면 좋겠다, 평생 아기였으면 좋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했고 이것은 케이퍼와 김은정의 말을 빌리면 정신과 신체의 비동시성을 치유하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하지만 엄마들은 애초에 왜 이러한 열망을 갖는가? 나는 이 또한 돌봄의 어려움을 빼놓고는 설명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천방지축이거나 공공장소에 시민답게 출현하지 못하는 것이 나름 용인되지만 성인이 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 어렸을 때는 주변인들이 귀여워라도 해주지만 크면 그렇지 않게 된다는 것, 몸집이 커지면 실질적으로 돌보기 어려워진다는 것, 섹슈얼리티 관리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 동시에 그런 몸에 주어지는 자리가 실은 학교가 유일하고 성인기가 되면 정말 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 등등. 나는 자녀를 자신이 혼자 평생 돌보리라 예상하는 어머니들이 장애인에게 적대적인 사회적 장벽을 체감하는 가운데 아직은 작고 귀엽기에 주어지는 약간의 친절까지 회수될 것을 전망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장애가 아예 없어지는 것까지는 바랄 수 없으니 비동시성이라도 치유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케이퍼가 언급하였듯 장애인의 삶이 이토록 가족에 사유화되어 있다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것이 왜 사유화되는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발달장애인과 관계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족 말고 없기 때문이 아닌가? 주 돌봄자가 되는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자녀의 안전을 우선순위로 생각하고 자녀를 과하게 통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머니들이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거나 비장애중심적인 태도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거나 보수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돌봄이 과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발달장애인에 대한 책임이 이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발달장애인은 사회 속에서 비장애인들이 당연하게 받는 돌봄을 받지 못하고 집으로 고립되고, 어머니들은 가족에서조차 자녀를 돌보는 다른 사람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홀로 돌본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머니들이 아무리 잘해도 장애인의 자율성을 존중할 수 있는 돌봄, 김은정의 말로 표현하면 치유돌봄이 아닌 어떤 돌봄이 나타나기는 어렵다. 나는 케이퍼나 김은정의 논의가 뭔지 잘 알겠으면서도, 옆에 붙어 그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가족들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돌봄을 평생의 윤리적 책임으로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비평적 언어일지라도 그것을 ‘치유돌봄’으로 지칭하는 것이 맞는지, 비장애중심주의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는 이유로 실재하는 돌봄의 어려움을 괄호쳐도 되는지 고민이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설화’, 혹은 장애인을 시설과 가족으로 이분화해 통치하는 질서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경험되는가? 내가 석사논문을 쓰면서 만났던 어떤 어머니들은, 사회가 자녀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뀔 것이라 믿지 않는 상황에서 자녀가 시설에 살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노력과 훈련을 통해 바뀔 수 있는 몸이 있고 그렇지 않은 몸이 있는데, 자신의 자녀의 경우 너무 중증이라 몸이 바뀌지 않으며 더 바꾸려 하는 것은 “부모의 욕심”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분리된 공간일지라도 자신에게 맞는 돌봄을 받으며 사는 것이 자녀에게 좋은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반면 어떤 논문에서 비슷한 발달장애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자녀가 최대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늘려갈 수 있도록 ‘자립훈련’을 과하게 시키고 있었다. 어떤 인터뷰이는 자신이 자녀보다 더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있으면 자녀가 원하는 것만 하게 하며 살 것 같은데, 자신이 죽고 나서 어딘가에 맡겨질 자녀가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하고 돌봐지기 쉬운 몸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현재의 조건 속에서 어머니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녀를 ‘시설화’한다. 하지만 시설화로 귀결되는 선택지 속에서도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것은 이들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시설화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독임은 알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시설화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장면들이 이런 것들이라 그 개념을 적극적으로 쓰는 것이 어렵다.


장애와 돌봄과 가족에 대한 내 감정과 입장이 이 정도인 상황에서, 내가 결국 석사논문에서 하게 된 것은 어머니가 (혹은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주 돌봄자가) 장애인과 고립되어 맺게되는 이자적(dyadic)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었다. 책임지고 돌보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잘해도 좋은 돌봄이 나타나기 어렵고 특히 장애 정도가 심할수록 한 사람이 그 사람의 인생 전반을 대리결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내가 논문을 쓰며 만났던 어머니들은 시설에 보내는 것까지 홀로 결정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녀의 결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그것은 자녀를 사실상 유일하게 잘 알고 신경 쓰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가족이 장애인을 시설에 보낸다는 것은 가족 내에서 장애인을 돌보던 유일한 사람이 그를 대리해 결정한다는 것으로, 이는 장애인과 돌봄자 양자에게 한계를 내재한다. 동시에 자녀를 시설에 보내는 것은, 내가 만났던 어머니들의 경우 자신 외에도 자녀를 책임지고 돌보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 즉 돌봄자를 복수화하는 것으로 경험되었으며 이는 서로의 삶과 관계성 자체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녀를 돌보는 다른 사람을 믿게 되면서 자신이 돌보는 방식을 성찰하거나 자녀를 좀 더 자율적인 존재로 바라보게 되기도 했고 이는 어머니들 표현으로 자녀를 자신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과정에 접어드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논문을 쓰면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한계가 비장애중심주의의 해체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겠지만서도, 돌봄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맺어질 때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관계에 들어올 수 있을 때 넘어설 수 있는 제약이라는 것도 조금은 알게 되었고, 장애 논의에 있어 돌봄관계에 대한 쟁점이 함께 다뤄져야 한다는 것도 믿게 되었다. 현재의 이자관계를 문제화하지 않고 가족이 장애인을 시설화한다, 치유를 위해 돌본다는 말을 하는 것은 실제로는 유일하게 돌보는 사람에 대한 비난에 그치기 쉽기 때문이다.



탈시설과 관련된 상황에 대해서도 말을 조금 덧붙이고 싶다. ‘탈시설’에는 다양한 정의와 층위가 있겠으나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지역사회 거주로 전환한다는 뜻의 좁은 의미의 탈시설이다. 케이퍼는 중증의 발달장애인이 “불능”으로 타자화되면 안 되고, 장애범주 안에서 적극적으로 사유되어야 하고 이들이 장애의 미래의 시간성 속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이들을 장애운동이 소홀히 다뤄 온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나는 이에 매우 공감하며, 이는 현재 탈시설을 둘러싼 논쟁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중증발달장애인의 자립적 삶에 대한 상상의 불충분성이 현재의 대립구도(탈시설 찬성과 반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중증발달장애인에게 탈시설을 통한 자립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장애인의 자립은 의존을 통한 자립일 것이고 이때 중요한 것은 지원을 통해 ‘자기결정’할 수 있는 것, 즉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자신이 갖는 것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통용되는 언어로 의사소통하지 않을 경우, 일상에서 자기결정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분명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결정일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 우리는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또한 그렇게 지역사회 주거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일상은 시설에서의 일상과는 얼마나 간격이 있는가? 그것은 집에서 어머니가 일대일로 돌보던 것을 활동지원사가 일대일로 돌보는 것으로 전환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발달장애인의 경우 더더욱 결정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의 쌓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럴 때 ‘자립적’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관계 속 결정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고, (왜 그런지는 너무나 잘 알지만) 장애인의 삶이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만 반복된다. 나는 현재 논의되는 자립에 대한 상상이 약간은 신체장애인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어떤 환경과 조건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만났던 장애인거주시설이용자부모회 어머니들이 탈시설을 반대하게 되는 이유를 그들의 보수성이나 비장애중심적 사고로 일축하기는 어려웠다. 많은 우려가 현실적인 돌봄의 불충분성에 대한 우려로 나타나고 있었고 이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가늠되게 되는 감각에 기반했다. 특히 언어표현이 어려운 자녀를 두었거나 ‘도전행동’이 있는 자녀를 둔 어머니들, 즉 돌보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자녀를 둔 어머니들에게 활동지원사와 자녀가 하루 종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상황은 위험하고 통제 불가능한 환경으로 이야기되었다. 어머니들은 활동지원사가 자신도 감당이 어려웠던 자녀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지, 학대를 당해도 자녀가 당했다고 표현을 못하는데 학대가 나타날 경우 지속될 우려는 없는지, 애초에 돌보기 어려운 장애인은 활동지원사와 매치되기 어렵거나 활동지원사가 지속해서 바뀌게되고 삶이 더 불안정해지는 것이 아닌지, 동시에 그렇게 “탐탁지 않은” 활동지원사조차 24시간 보장되지가 않는데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물었다. 이러한 걱정들은 과거 자녀가 당했던 폭력 경험과 자녀의 장애가 심해 다른 곳에서 받아주지 않아 자녀와 둘이 고립되었던 경험, 그리고 사회에 대한 불신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들은 중증의 장애로 자녀가 사회 속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고 보았고, ‘자립’이라는 것을 고립된 방에서 자녀와 활동지원인이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며 불충분한 돌봄을 받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반면 어떤 어머니들에게 시설은 “누구라도 보는 눈이 있”기에 학대가 지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이야기되기도 했다. 자녀의 시설경험이 좋았던 어머니들은 시설에 자녀를 보내게 되면서 자신이 홀로 돌볼 때보다 자녀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자녀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고, 자녀를 맡길 곳이 없어 동동거리다가 자녀를 받아준 시설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시설 종사자와 시스템을 신뢰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들이 "시설이 안전하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나는 이들의 불안과 안전에 대한 주장이 보수적인 무언가이거나 이들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일축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만약에 그것이 어떤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중증발달장애인이 일대일 관계 속에 고립되지 않고 돌봄관계를 중층적으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고, 그런 조건이 마련될 수 있다면 (시설의 물적 조건이나 현실적 상황들을 고려했을 때 나이브한 주장일 수 있으나) 그 거주공간 자체가 시설인지 아닌지는 크게 상관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런 생각들이 매우 보호주의적이고 장애인의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지나친 후견주의이자 통제의 논리라는 지적이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중증발달장애인의 경우 사회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설에 살 수 있다는 전제를 너무나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돌봄 논의는 일정부분 가족이 있는 장애인을 염두에 둔 것이고, 장애인을 피돌봄자 위치에 고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시설과 가족과 돌봄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것들을 상대화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또한 이러한 논리들은 흔히 통용되는 탈시설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과 공명하는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기에. 실은 내 자기변명 욕구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이런 말들을 구구절절 해도 되는지에 대한 자신이 없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장애학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돌봄이 충분하게 나타날 수 없는 상황에서 ‘장애의 정도’는 장애인의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해진다고 생각하며 중증발달장애인이 갖게 되는 쟁점들이 잘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어떻게 ‘불능’으로 환원하지 않고 정치화할 수 있을까? 애초에 돌봄은 구체적 몸에 대한 응답이라며 몸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그 몸은 어떻게 손상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가족들이 여건이 되지 않으면 낙인 없이 시설에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장애당사자의 삶에 있어서도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어머니들이 시설에 자녀를 보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동시에 나는 우리가 탈시설의 지향을 가지고 시설 혹은 가족에 고립되지 않는 다양한 관계성과 그를 통해 나타나는 자립적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조건들을 구축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어떻게 더 양립가능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석사논문을 쓸 때도 그렇고 이것이 나에게 납득가능하게 양립이 안되었다는 것, 그래서 결국엔 한 쪽을 선택하는 것처럼 느껴왔고 (어머니와 장애인이 있다면 어머니를, 장애와 젠더가 있다면 젠더를) 실제로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는 점은 아직도 내 안에서 해결되지 못한 부분이다. 하지만 논문을 쓰면서 적어도 이 문제는 발달장애인의 문제만도 아니고 어머니 돌봄만의 문제만도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고,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장애인의 권리와 가족의 권리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구성된 대립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이 정도이고, 뭣도 모르면서 엄마들 욕하지 말라는 무지성 입장에서 여기까지 온 것도 많이 달라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여전히 책을 읽으면서 비난받는 느낌이 들고 나를 변명하고 싶은 것을 보니 옛날에 이 책들을 처음 읽었을 때와 달라진 것이 크게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다시 이 책들을 읽을 때는 좀 다르게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 마음이다.




글. 윤수정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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