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먹] 지식, 지식, 지식을 만듭시다: 생산적인 일로서의 지식 만들기에 대하여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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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선생님이 장래희망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이 될래요!" 대신 "더 많은 아이들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요!"고 말하고 "CEO가 되고 싶습니다." 대신 "저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기업을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라는 소리다.
대학원에 입학한지 어언 n년.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장래에 교수가 되는 거냐고 물어본다. "아니 애초에 박사 따도 교수 되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고요...." 부터 시작해서 연구원이 될 수도, 강사가 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은 나에게 다소 모호하게 느껴진다. 학위 보유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고 지식노동으로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자리는 바늘구멍 같은 지금, 장래 희망하는 직업을 명명한다 한들 구체적인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과거 선생님의 가르침과 같이 ‘교수’, ‘연구원’, ‘강사’ 등등의 명사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을 명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사로써 우리가 하는 일, 하고자 하고 앞으로도 해나가게 될 일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당최 연구라는 건 무엇이고 지식 생산이라는 건 뭘 하는 일일까?

최근에 이과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대학원에 다니는 친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다. 이론서 한 권을 몇 주 내내 붙들어 해석하고 사회 인식에 관련된 설문항을 뒤지는 나의 일과 분자를 레이저로 쏘아서 쪼개는 그 친구의 일은 겹치는 바가 전혀 없지만, 거쳐온 생각의 궤적이 똑 닮아 있어서 신기했다. 어쩌면 둘 다 순수학문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고민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랐다.
대학원 진학을 처음 결심했을 때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지식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원에 들어와 마주한 학계는 현실세계와 꽤나 유리되어 있고, 그 안의 사람들도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것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우리의 중간 결론은 “그래도 일단 재밌으니까 계속 해보자”로 다다랐는데, 이것 역시 대학원 생활을 몇 년 더 지속하다 보니 시들해졌다. 재미도 재미지만, 그렇다면 이게 우리의 ‘일’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지식을 만드는 일은 분명히 재미있다. 어쩌면 사회에 약간의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 현상에 대해 가슴 뛰는 새로운 해석을 해내면 정말 뿌듯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특정 분자의 새로운 구조를 찾아내면 정말 신나겠지, 하지만 그래서? 지식욕은 혼자서 책 보고 공부하고 시민강연을 들으러 다니는 것으로 해결된다. 심지어 제도화된 peer review 과정을 거치지 않겠다고 다짐만 한다면 무언가 써서 내놓는 일도 살면서 계속 할 수 있다. 다만 개인적인 방식으로. 하지만 취미활동으로서의 지식 탐구를 넘어서 ‘일’로서의 지식 생산을 하겠다고 하면 또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이고 왜 이걸 계속 하려고 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 각자는 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지만, 많은 대학원 친구들, 학우들과 자주 나누게 되는 이야기 주제임은 틀림없다. 답은 수백 수천 가지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우리는 왜 이렇게나 이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걸까? 가장 간단한 답은 ‘그것이 대학원생이니까…’이다. 애초에 쓸데없는(?) 주제에 대해 쓸데없이(?) 많이 곱씹어보는 사람들이 연구자의 정의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건 공적인 글쓰기에 어울리는 진지한 답은 아니다. 그러니 답해보자면, “우리가 하는 일을 왜 계속 해야 하는 걸까?” 라는 고민이 계속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사회에서 요구되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식 생산은 엄연히 ‘생산’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우리가 하는 활동은 사회에서 그다지 ’생산적인’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는 활동들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돈 되는 일, 내지는 돈 될 가능성이 되는 일이 생산적인 일로 여겨진다. 실상 모든 일하는 사람들은 왜 그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나름의 고민을 한다. 하지만 마케터, 회계사, 약사, 요리사, 방송인, 선생님 등등의 직업인에게는 언제나 다른 문 하나가, 그 위에 “돈 벌어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적힌 작은 문이 하나 열려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꼭 그 일 자체의 내적 목적을 찾지 못 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히 생계활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 단언한다 비판하셔도 된다, 실제로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 생산은 어떤가. 그것도 유튜브 채널이나 팟캐스트를 통하지 않고 논문과 책을 통해 지식 생산을 해보겠다는 사람이 “돈 벌어 먹고 살기 위해서” 이 일을 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아마 모두가 당황할 것이다. “학계가 뭔지는 아세요 혹시?” 같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슬픈 현실이지만 현시점에서 학술 장에서 하는 방식의 지식 생산은 웬만해서는 나를 먹여 살리지는 못 할 가능성이 크다(그러나 동시에 본 목적과는 별개로 이것을 통해 돈 벌어 먹고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도 진심이다). 이것이 우리가, 또는 내가 자본주의 사회의 영점이 아닌 방식으로 지식 ‘생산’을 함에 대해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이렇게나 고군분투하는 이유라 생각한다. 모든 목적이 자본주의적 가치를 향해 수렴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에 정반대로 향해 가는 길을 가는 우리는 자꾸만 우물쭈물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요구받는다. 획일화된 목적을 향해 가는 사회로부터,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님으로부터, 그리고 나 자신을 어쨌든 먹여 살려야 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사람마다 부담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일단 나의 경우는 그렇다. 나 자신을 안정적으로 먹여 살릴 가능성이 이렇게나 희박한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면, 어떤 확고한 목적의식 내지는 대단한 의미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에 때때로 시달린다.
다행인 것은 내가 자명해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질문하기를 핵심 미덕으로 여기는 인문사회 대학원생으로 자라났다는 점이다. 아직은 문득 나를 망설이게도, 냉소하게도 하는 현실의 압박감보다는 질문하고 답을 찾아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더 강하다. 일련의 고민을 내어놓음을 통해 ‘생산적임’의 의미가 재구성되었으면 하는 대단한 마음까지는 없지만, 최소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개발하고 실체 있는 활자로 표상해내는 일이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다. 그래서 자꾸만 궁리하고,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의미를 찾아내려 하고, 나 자신도 의미 있는 연구를 하고 싶어서 기를 쓰고 달려들게 되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명사로서의 직업명과는 관계없이, 어쩌면 아무런 직업도 얻지 못 해도, 동사로서 이 일을 계속 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 있게 같은 마음의 ‘우리’를 상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글을 읽다가, 발표를 듣다가, 학술대회장 한켠에서 짧게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런 확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 눈 (신문연 회원)
편집.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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