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먹] AI 시대의 (학술) 번역?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1시간 전
- 3분 분량

작년에 운 좋게 책 한 권을 번역할 기회가 생겼다. 각주를 포함해 약 500쪽에 이르는 분량이라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AI를 활용하면서 노동 부담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작업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초벌 번역을 AI에 맡긴 뒤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하며 어색한 문장이나 오류를 인간이 교정한다. 혹자는 AI 번역의 신뢰성을 문제 삼을지도 모르나, 초보 번역자인 내 입장에서 AI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엑셀을 사용하면서 함수를 쓰지 않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생성형 AI는 언어에 특화된 모델이기에 복잡한 문장 구조를 분석하여 다른 언어로 재조립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초벌 번역을 AI에 맡기면 외국어 단어를 잘못 읽거나 복잡한 구문을 부분적으로 누락하는 인간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용하다. 여하튼 그렇게 난 AI를 조수 삼아 9개월만에 번역을 마칠 수 있었고, 올해 또 다른 책들을 번역하려고 계속 작업 중에 있다.
나는 AI를 사용하면서 기술을 통해 내 능력을 증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보곤 한다. 소설가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는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바둑계의 변화를 취재한다.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신세대 바둑기사들이 더 이상 인간 ‘사부’에게 의존하지 않고 AI와의 대국을 통해 실력을 연마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는 기원을 오가며 선배 바둑기사들의 수많은 기보를 반복해서 두는 방식으로 인간의 수를 학습했다면, 이제는 AI와의 대국 속에서 인간이 상상하지 못하는 수를 배우며 기량을 발전시킨다. 번역도 마찬가지로, 번역가가 되기 위해 반드시 인간 번역가나 특정 기관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1) 나 또한 작업 과정에서 AI와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며 표현을 다듬었고, 그 과정에서 내 사고 반경에서는 생각지 못한 적절한 표현을 더러 발견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AI는 문장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기계적’ 노동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번역가가 저자의 논의를 온전하게 복원하는 ‘지성적’ 노동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2)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AI 시대에 인간 번역이 대체될 것인가라는 지난한 논쟁 속에서, AI를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노동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자는 것이 하나의 모범답안처럼 제시될 법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실제로 번역을 하다 보면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업군의 최상단에 통번역가가 위치한다는 사실을 자주 실감하곤 한다. AI에 번역을 맡길 때 때로는 전문 번역가 수준의 말끔한 결과물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이 정도의 품질이라면 과연 인간 번역가가 꼭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스치면서 존재론적 위기감에 몸서리가 쳐지곤 한다. 특히 학술 번역의 경우 고민은 더 깊어진다. 해당 책이 필요해서 읽고자 하는 독자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맥락을 알고 있고, 그런 독자라면 완성도가 다소 미흡하더라도 AI 번역을 이용해 핵심 논점만 가늠하는 방식으로 접근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맥락’의 독자라면 굳이 번역서를 기다리지 않아도 기술 발전의 편의를 맘껏 누릴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내 번역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번역이 되는 것일까.

그렇기에 AI 시대에 인간 번역가가 담당해야 할 노동은 문자 그대로 언어를 옮기는 데에만 국한될 수 없을 것이다. AI가 생성한 번역문을 인간 독자가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 다듬는 작업과 함께, ‘저맥락’의 독자들이 해당 텍스트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충실히 안내하는 작업 역시 번역가의 몫이 된다. 이러한 노동은 본래 번역가가 수행해온 역할이지만, 앞으로는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지 않을까 싶다. 번역가 정영목은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에서 인간의 언어는 본래 불완전하며, 하물며 원문의 언어조차 화자의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가는 단순히 글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불완전한 양쪽 언어에서 어떤 완전한 언어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원문의 심층에 있는 의미에 접근하고 건져내어 최대한 온전하게 복원하는 사람이다. 학술 번역의 관점에서는, 독자가 원서의 논의와 맥락을 따라갈 수 있도록 꼼꼼히 각주를 달고 필요시 해제를 통해 사유의 배경을 설명하는 노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비록 이러한 추가 노동이 번역가의 부 증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AI와 차별화되는 인간 번역의 고유한 ‘질’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적 수고가 요구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에서 말하는 ‘번역’의 메타포를 끌어들여 생각해볼 수도 있다. ANT에서 번역은 한 행위자가 제시한 특정한 문제 설정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위자들의 이해관계를 재배치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확장하며 안정화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학술 번역은 어떤 네트워크를 구성하는가. 학술 출판이라는 장을 생각해 보자.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수식어가 익숙한 출판 분야에서 학술 성격이 강한 논픽션은 이른바 텍스트힙3) 열풍 속에서도 좀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수익성과 무관하게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상을 실천한다. 자신이 접하고 체득한 언어와 사유가 더 많은 독자에게 가닿기를 바라며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 마음속에 ‘번역’의 본령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번역이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사유의 맥락을 엮고 독자의 이해 가능성을 넓히며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으로 재개념화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어차피 AI 돌리면 다 읽을 수 있지 않느냐”는 회의론에 대해, AI가 이른바 ‘사상의 외교관’으로서 인간 번역가의 역할을 대체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되묻고 싶다.

저자 주
1) 물론 일정 부분 ‘번역의 기술’은 강의나 책을 통해 익힐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부연하고 싶다. 나는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따로 두 번역가 선생님의 강좌를 들었고, 시중의 여러 지침서를 읽으며 나름의 번역 기술을 익혔다. AI가 번역을 하더라도 그 결과물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결국 인간 ‘검수자’의 몫이며, 이때 무엇이 좋은 번역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감식안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2) 실제 번역 과정에서 기계적 노동과 지성적 노동의 층위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번역 경험상으로는 반복적인 기계적 노동의 수행 속에 드문드문 지성적 노동의 계기(?)가 발현되는 듯하다.
3) 텍스트(Text)와 힙하다(Hip)의 합성어로, 독서 행위가 멋지고 세련된 활동으로 인식되는 현상.

글. 서준상
편집.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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