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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 내 연구 과정의 목격자가 되어줘: AI가 아닌 동료에게 내 연구 입력하기



최근 동료들끼리 시작한 세미나가 있다. 매주 한 번씩 모여 일주일 동안 해온 작업을 공유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누군가는 연구 주제와 관련된 논문 1편을 읽고 정리해오고, 누군가는 작업 중인 글에 몇 단락을 더 추가해온다. 혹은 자신이 준비 중인 강의안을 가져와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 세미나의 원형은 내가 박사과정을 보낸 학교의 수업 중 하나인 ‘논문세미나’이다. 수강생은 각자 학위논문 작성에 필요한 논문을 읽고 발제하고 서로의 발제문에 토론을 한다. 정해진 주제가 있는 게 아니고 각자 자신의 문제의식과 연구관심사를 바탕으로 발제를 하다보니, 논의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인식론적 관점과 이론적 틀 그리고 구체적 연구 대상까지 서로 일치하는 게 없다. 그래서 다른 이의 연구 내용을 듣고 토론하는 게 직접적으로는 내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가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 동안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건 동료들의 공간, 팬덤, 현대문화연구소, 뿌리없음의 철학, 예술운동, 장애와 민주주의, 문학과 예술가에 대한 연구였다.


반 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연구자가 여러 문헌들을 읽으며 자신의 문제의식을 벼려가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나만 공부와 연구가 힘든 게 아니구나, 라는 동병상련의 연대를 넘어 그가 고민에 부딪히면서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 나서는 모습에서 그야말로 도파민이 샘솟는다. 각자 읽은 문헌을 공유하고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문제의식 안에서 활용될 수 있을지 혹은 그것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문제의식이 확장될 수 있을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내 연구 그리고 남의 연구라는 구분은 사라진다. 내용은 서로 달라도 그 형식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질문을 던지는 방식과 그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태도에서 서로 연결된다. 때문에 연구 분야나 대상은 다를지라도 서로의 고민은 각자의 고민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그런 과정은 우리의 공부를 조금은 덜 외롭게 만들어준다. 내가 무성애에 관해 읽은 것들을 열심히 정리해가다보면 어느새 동료들은 무성애에 대해 정말 많은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새로운 문헌을 찾아 발제를 할 때마다, 동료들은 이전에 들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질문하고 토론하고 내 문제의식과 연구질문을 상기하면서 나와 함께 고민해준다. 단지 내가 발표한 내용뿐만 아니라 각자가 다른 곳에서 보고 들었던 것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경험까지도 동원한다. 매주 내 연구 주제에 관해 모두가 관심을 가져주고 토론을 해주다니! 세미나 형식에 의해 강제되는 것일지라도 그 경험 자체가 내게 유의미하게 남는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 건 동료들이 내 연구 과정의 목격자가 되어준다는 점일 것이다. 학위 논문이나 학술지 논문으로 발간된 연구 결과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물론 즐거운 일이지만, 그 지난한 과정을 누군가 알아준다는 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다.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글에서는 빠질 수밖에 없던 것들, 몇 주 간 정리하면서 쌓아온 지식이지만 단 몇 문장으로 압축되어야 했던 것들, 심사 과정에서 받은 (때로는 비생산적인) 피드백을 애써 소화하고 반영하는 과정 등등. 연구과정의 목격자들은 그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다.



물론 연구실이라는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 여러 사람이 모여있다보면 서로가 서로의 목격자가 되어주는 일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당연한 일은 아니다. 어떤 관심사로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며 물어보는 것도,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열린 마음으로 나의 비루한 과정을 공유하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수업 과제조차 각자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형식적 강제성이 도움이 된다.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은 개인의 인성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방학 동안 동료들과 나는 서로의 연구 과정의 목격자가 되어주기로 했다. 세미나를 함께 하는 동료들은 사실 이전부터 서로의 연구 관심사나 문제의식을 공유해온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바로 서로의 연구에 과몰입할 수 있었다. 발제문을 듣고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지난 시간 동안 서로가 고민해온 것들을 계속 다시 꺼내어 생각했다. 네가 고민하던 부분이 이런 거 아니야? 너의 문제의식에서 이건 이렇지 않을까? 이건 너의 관점에서 이렇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와 같이 서로에게 빙의를 하기도 하고 각자가 이곳저곳에서 듣고 경험했던 것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렇게 세미나를 하다가 문득 이런 과정들이 무척 LLM AI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그 기술은 곧 메타포가 되어 하나의 이해 틀이 되기 마련인데, 갑자기 세미나라는 게 내가 동료들에게 내 연구를 입력하고 동료들이 내게 그들의 연구를 입력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입력된 것을 다시 동료들에게 돌려주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배움의 과정이란 게,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걸 다시 어떠한 형식으로 산출해내는 것이니까. 게다가 엄밀히 말하자면, 세미나가 AI를 닮은 게 아니라 AI가 세미나를 닮은 거겠지. 이용자와 대화를 하는 챗봇 형태의 LLM AI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동료들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 연구의 목격자가 되어주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내 동료들은 인간인지라 입력된 내용을 AI만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물론 AI의 정확성도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입력된 내용은 각자가 축적해온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맥락과 편향 속에서 소화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계속 질문하며 확인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은 내게 하나의 등대가 되어준다. 연구를 준비하면서 읽는 수많은 문헌들의 바다 속에서 헤메이는 나에게 방향성을 제시하는 건 정확하고 명료한 하나의 답이 아니라 불확실함에서 나오는 질문들이다. 네가 그 때 했던 고민이 뭐였지? 너의 문제의식은 이런 거 아니었어? 혹시 내가 이렇게 이해한 게 맞을까? 그 질문들은 나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한 번 더’에서 정말 많은 생각이 전개된다.


학위논문을 준비하다보면 내 주제, 내 관심사, 내 인식론, 내 방법론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 다양하게 열리는 세미나 중에서도 내 연구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을 다루는 세미나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다른 동료의 연구에 오지랖을 부릴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용을 중심으로 모이는 세미나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서로의 연구 과정을 지켜봐주는 세미나도 연구에 큰 동력을 제공한다. 이런 세미나의 형식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내 연구 과정을 보여주고 또 다른 이의 연구 과정을 목격하는 자리는 더 많아져야 한다. 오고가는 심사서와 답변서, 온라인으로 다운 받은 논문 PDF 파일, 그리고 제본된 종이들. 그 뒤에는 연구 과정이 있고 그 과정을 거친 사람이 있다. 그 과정과 사람에 관심을 갖고 목격자가 되는 것. 그 보람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



글. 조윤희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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