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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끔이 데뷔 썰

최종 수정일: 4월 11일



정신없이 바쁜 석사 3학기를 보내던 나는, 어느 순간 수료가 코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학할 때만 해도 수료까지 남은 수업 10개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끝이 다가오니 듣지 못한 수업이 너무 많았다. 특히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부터 '동물'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작 입학한 후에는 관련 수업이나 세미나에 참여해 볼 기회가 없었다. 하루는 대학원 동료들과 둘러앉아 이런 넋두리를 하다가 직접 세미나를 열어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여태까지 누군가가 열어준 세미나에 참여해 열심히 따라가고 배우기에만 익숙했던 나에게는 낯선 제안이었다. ‘제가요...?’ 하던 마음은 동료들의 적극적인 응원에 ‘한번 해보지 뭐’로 바뀌었다. 준비가 될 때까지 미뤄두기보다는 관심사가 비슷한 다른 분들을 만나보고 생각을 나눠볼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세미나 준비를 시작했다. 엮어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은 텍스트를 몇 가지 모아 느슨하고 부담 없는 커리큘럼을 구상했다. 신문연에서 흔쾌히 자리를 만들어 주신 덕에 세미나가 현실이 됐다!


호기롭게 시작한 것과 달리, 막상 세미나가 시작하니 매주 잔뜩 긴장하고 횡설수설하는 나를 발견했다. 가장 큰 원인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분들이 신청해주셨고, 내가 구상한 커리큘럼이 참여자 분들의 관심사를 모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부담감에 있었다.


 ‘동물과 관계 맺기’라는 제목 아래 맨 처음 홀로 세미나 커리큘럼을 구상할 때는, 동물권 담론을 넘어서서 동물과 관계 맺는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을 세미나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동물권 담론과 비거니즘 운동을 통해 ‘동물’이란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나에게는 ‘동물보호’나 ‘동물권’ 담론이 때로 드러내는 한계가 최근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면 내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있었다. 동물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을 줄이는 것은 중요하나, 정말 우리는 동물과 위계를 완전히 소거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어떠한 고통도 폭력도 없는 관계가 가능할까? 그렇다면 동물에 대한 모든 억압과 폭력을 지양하는 동물권 담론 안에서 '중성화는 동물 보호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가 어떻게 구축된 것일까? 중성화는 동물에 대한 보호인가 폭력인가? 그 연장선에서 다시, 폭력 없는 무결한 관계란 가능할까? 이런 모순적인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 특히 반려동물과 그 섹슈얼리티라는 소재에 집중해서 동물권 담론의 한계를 파고드는 텍스트를 선정했다. 커리큘럼을 준비하면서는 아무래도 나처럼 동물권 담론 자체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세미나 첫 시간에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자,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미 현장에서 동물 연구를 하고 계신 분들이 꽤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려동물을 소재로 연구를 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축산 현장을 연구 대상으로 삼으신 분도 계셨고, 그 밖에도 퀴어 연구를 하시는 분, 장애 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고루 참여해 주셨다. 동물 중에서도 반려동물, 그리고 동물과 관계 맺는 현장보다는 동물을 둘러싼 담론에 초점을 맞추었던 나의 커리큘럼이 세미나 구성원 분들의 다양한 관심사를 다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동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갖고 있던 나의 관심이 일면적인 것이었구나!’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던 자리였다.


세미나에서는 매주 내 예상을 벗어나는 이야기들이 오갔기에 하루하루가 긴장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동물권 담론을 통해 동물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진 나는, 아무리 그것의 한계를 느끼더라도 동물 일반에 대한 윤리적 원칙과 태도에 매여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동물을 만나면서 '모든 동물에 대한 추상적이고 윤리적인 응답'보다도 '구체적인 관계적 실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응답'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는 분도 계셨다. 그 과정에서 동물권을 둘러싼 담론의 형성과 현장에서 동물과의 상호작용을 실천하고 ‘응답’의 여지를 발견해 나가는 인류학적 동물 연구가 가지는 상이한 층위를 마주하게 되었다. 두 층위는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연동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한편 ‘동물’을 둘러싼 재현과 담론의 역할을 끝까지 밀어붙여 본 주차도 있었다. 동물이 인간 사회의 궁극의 타자로 계속해서 호명되는 경향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리는 왜 점점 더 동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게 될까? 담론 속에 동물이라는 타자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주변화된 타자를 계속해서 발견하고 드러내는 연구의 역할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연구가 결국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민들을 나누기도 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운동, 담론, 현장 연구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고, 막연하게나마 ‘동물’이라는 주제를 구성하는 다양한 범주와 지형을 그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동물’이라는 주제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상이한 관심사와 관점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5주 내내 우리는 서로 간의 차이를 확인했고, 그 차이를 통해서 배웠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산발적으로 내던져지기만 하고, 어떠한 의미로 봉합되지 못한 주차도 많다. 그럴 때마다 이끔이로서 역할을 충분히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다른 세미나 구성원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세미나를 무탈히 마쳤다. 이 지면을 빌려서 초짜 이끔이와 함께 공부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세미나를 마치면서 남은 것은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석사과정생인 나는 아직 지식의 소비자, 즉 학생 역할에 익숙하다. 대학원에서의 수업은 대부분 교수님의 일방향적인 강의보다 수업 구성원들이 모두 발제와 토론에 참여하는 세미나 형식이다. 다만 이런 세미나형 수업에서조차 나는 은연중에 나를 학생의 역할, 즉 다른 분들로부터 배우는 역할에 놓아두곤 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이끔이 역할을 맡아보면서 그저 열심히 따라가기만 했던 학생의 역할에서 벗어나 세미나의 다른 측면에 대해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또 도움 받으면서 함께 공부해 나가는 것은 어떤 노력을 필요로 할까? 대학원에 적응하기 위해서 나는 무조건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낮은 자리에 놓아두곤 했지만, 이제는 학생에서 동료로 나아가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기 위해서는 일방적으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나누는 것이 불가피한 순간 역시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관점과 생각이 어떤 부분에 속하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차이를 마주하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차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무엇에 대해 함께 말하고 있는가?


때로 차이를 확인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세미나 전마다 벌벌 떨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마다 이번 세미나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자 한다. 우리는 동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차이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차이는 언제나 위계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위계 없는 관계 맺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차이와 위계는 불가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맺기는 가능하다. 우리는 차이와 위계를 폭력이 아니라 소통의 계기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관계 맺기는 서로 다른 종 간의 만남에서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배경과 역량을 가진 동료들이 함께 공부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일 테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 주변화된 타자에 대해서, 위계에 대해서 자꾸 궁금해하는 것은 아닐까?




글. 권오경(신문연 회원, 2025 여름 신문연세미나 동물반 이끔이)

편집.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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