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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연구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지난 탁상공론에서 언급했던 ‘대명절’을 맞아 시작했던 우리의 연구재단 지원사업 살풀이는, 어느덧 학술제도의 틀과 협상해야 하는 연구자의 삶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었다. 각종 지원사업과 제도가 구성하는 프레임 속에서 연구자 개인의 삶, 생애주기, 감정, 관계, 그리고 연구 속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지금 당장 빠르게 쓸 수 있는 논문 주제를 선택하면서, 경쟁하는 동료의 좋은 소식을 선뜻 축하해 주지 못하면서, 나의 학술적 농도가 축적되기보다는 소진되는 느낌을 겪으면서, 혹은 남들보다 느린 연구자로 사는 불안감을 겪으면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특정한 방식의 ‘연구자 되기’를 요구받게 되는 걸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연구자의 생애 모델은 불가능한 것일까. 서로 다른 속도, 서로 다른 소속(나아가 소속 없는 독립연구자까지도), 다양한 연구의 가치가 고루 존중받는 학문 생태계는 어떻게 가능할까.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장기적 불안정성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연구자로서의 삶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꾸려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대담의 끝에는 결코 해결하기 어렵지만 그렇기에 더 오래 집요하게 고민해야 할 질문들이 남았다.


#참여자 소개: (1부부터 참석한 사이다, 닥터피쉬, 완두앙금, 라즈베리, 우롱차의 소개는 여기를 참조!)



# 연구자의 시간, 연구의 시간


사이다 내가 학위를 받은 곳에서는 논문 한 편이 없더라도 긴 시간 앉아서 하는 공부를 중요시했었어. 그런데 BK로 일했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매년 논문을 몇 편씩 써. 정량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어. BK장학금을 주는 기준이 학교별로 다른데, 내가 있었던 곳은 박사과정의 경우 장학금 받는 학기 수만큼 논문을 써야 했어. 아무래도 성과가 안 나오면 다음 학기 장학생 선발에 영향이 있고. 그래서 학생들이 첫 학기부터 논문을 써. 그치만 고민할 시간이 없다보니 막상 자기 학위 논문 주제를 못 찾아서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이 봤어.


닥터피쉬 그런 상황이면 어떤 아이디어가 생겨나도 이론적으로 충분히 숙고시킬 시간이 없겠네. 일단은 논문으로 쓰고 봐야하는구나.


우롱차 당장 내가 눈에 들어오는 아이템을 써야 하는 거지.


사이다 기말 페이퍼가 대부분 학술지 투고로 바로 가더라고.  


완두앙금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점도 있겠다.


사이다 맞아. 맞아. 그런데 난 좀 슬프기도 했어.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 훈련 받은 것처럼 느리지만 우직하게 내공을 쌓는 건 통하지 않는 거야. 어쨌든 모든 대학이 논문 편수로 평가하잖아. 그게 맞다고 다시 확인 받은 거지. 


라즈베리 하지만 그게 어쩔 수가 없는 거고.


사이다 응. 연구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야. 학교가 정량으로 평가하고 실적을 중요시하니까 논문을 이렇게 빨리, 많이 쓸 수밖에 없는 거야. 어떤 학생들은 공부가 힘들고 즐겁지 않다고 우는 경우도 많았어. 자기가 뭘 공부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우롱차 속상하다. 수업을 듣는 과정도 편하지 않을 것 같아. 수업을 들으면 항상 기말 페이퍼를 내잖아. 그건 내가 많은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거든. 내 학위논문 주제와 이론, 방법론을 여러 방향으로 시도해보고 교수님과 동료들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그런데 여기서는 수업을 통해 꼭 한 두 개의 논문을 만들어 게재해야 하는 거 잖아.


라즈베리 그걸 처음부터 생각하고 수업을 들어야 하는 상황인 거지.


사이다 뭔가 느리더라도 시행착오를 겪고 실수해보는 경험을 할 시간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 그래서 사실 비판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BK에 적응할 수가 없어. (웃음) 


일동 (웃음)


닥터피쉬 주위에서 BK로 석박을 하신 분들은 졸업하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못하신 사례들도 좀 있어. BK를 받는 동안 글감이 생기면 기계처럼 바로 연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 소진된 거야. 연구자가 졸업 직후에 시작하는 활동이 앞으로의 커리어에 정말 중요하잖아. 그런데 거기서 스턴이 걸려버리니 결국 졸업하고 나서도 자기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악순환이 생기기도 해.


사이다 더 슬픈 건, 실적이 많은 연구소가 다른 대학 연구소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으니까 다른 대학 연구소도 성과와 실적 중심의 선별적 지원 체계로 바뀌더라는 거야. 


라즈베리 사실 나 같은 경우는 아무런 경쟁 없이 BK장학금을 받았거든. 너무나도 당연하다는듯이 받았어. 다른 전공에서는 엑셀로 실적을 정리하고 관리하기도 한대. 우리 교수님은 가끔씩 나를 불러서 글을 좀 써야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씀하시긴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교수님께서 실적에 대한 압박이 있으셨겠구나 싶어. (웃음)


완두앙금 뒤에서 다 막아주고 계셨던 거 아냐? (웃음)


우롱차 나는 사실 이공계 연구소에서 예산 관련 행정 사무를 맡아서 한 적이 있는데, 거긴 기본적으로 랩실 차원에서 학생 인건비를 정액으로 주는 곳이었어. BK는 그 재원 중 하나였을 뿐이었지. 다른 국가과제나 민간과제로도 돈을 가져올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따온 돈을 다 합쳐서 석사와 박사 인건비를 모두 같은 금액으로 맞춰서 나눠주는 거야. BK는 여기서 그냥 보조적 재원이었어. 


닥터피쉬 이공계 BK과제에서도 실적은 필요하지 않아?


완두앙금 실적은 알아서 다 나오겠지.


우롱차 이공계 랩실 구조상 실적은 나올 수밖에 없어. 교수가 진행하는 과제를 통해 실험 장비와 재료에 접근하고 또 연구를 해야 하잖아. 학생 혼자서는 실험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런 랩실 차원에서 많은 인원이 실험에 참여하고 그걸 활용해서 학위 논문도 쓰는 거고.


사이다 이공계랑 인문사회계는 분명 다른데, 이공계의 연구 속도를 인문사회계가 따라가는 느낌이 있어. 논문을 최근 3년의 실적만 보잖아. 데이터 중심 연구에서는 정보의 최신성이 중요하니 이해는 돼. 하지만 호흡이 다른 연구들이 분명 있잖아. 3년은 너무 짧아. 그래서 선배들도 졸업 후에 길게 보고, 연구 성과가 특정 시기에만 집중되지 않도록 페이스를 조절하라고 하더라. 성과가 끊기지 않게 흐름을 관리하라는 조언이지.


라즈베리 졸업하고 바로 다 내면 안 되고 시간을 둬서 내라는 거구나.


우롱차 취업할 때 실적이 될 수 있는지 계산을 해야 된다는 거지. 나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 지금 당장 낼 수 있다고 내는 거 아니다. 게다가 교수가 되려면 영어 논문을 요구하는데 사실 영어 논문은 투고를 한다고 해서 언제 나올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


라즈베리 우리 교수님도 지금부터 준비해서 내야된다고 하더라.


우롱차 지금부터 해야 몇 년 후에 졸업을 해서 취업을 준비할 때쯤 게재가 되겠지, 이런 계산을 해야 된다는 거야.



# 다양한 연구자의 생애 모델이 필요해


사이다 그 말이 맞는데… 우리가 그런 전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서 여기에 있는 거잖아. 우리가 아무리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그렇게 전략적인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해. (일동 웃음) 때로는 교수라는 자리가 나한테 꼭 맞는 옷일까 고민이 들 때가 있어. 내가 그 속도와 맞지 않는 성향인 걸 너무 잘 알아서. 교수가 되는 과정이나 그 이후의 삶에서 연구자로서 행복을 지킬 수 있을까. 


완두앙금 나도 졸업 후에 다른 길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싶어. 그럼 사이다는 A유형 끝내고 난 다음을 어떻게 상상하고 있어?


사이다 나는 연구재단 과제 외에 다른 여러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 재밌어. 만족하는 편이야. 그래서 내 직업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연구를 하고 있을 것 같아. 어떤 형태든, 그 길이 조금 안정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런데 주변에선 이런 생각을 현실과 타협한 정도로 보기도 하더라고. 그래서 고민이 되기도 해. 나는 지금 정규직, 소위 전임은 아니지만 연구하는 게 즐겁고 좋은데 이게 정말 내 진심인지 아니면 스스로 다른 기회에 선을 긋고 있는 건지? 


라즈베리 나도 비슷해. 박사과정 들어오면서, 교수 안 되겠지? 못하겠지? 안 할거야! (웃음) 이게 다 뒤섞이더라. 내가 분명 관심 있는 대상을 들여다보는 건 행복한데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건 부담스러워. 그리고 그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아. 연구재단에서 이런 지원을 받아서 성과를 내고 실적을 차곡차곡 쌓아서 내 커리어를 위해 필요한 걸 하고. 난 그런 계획을 잘 세우는 사람이 아니고, 그런 경쟁에 올라타는 게 내 인생의 결과 맞는 것 같지도 않아. 그러면서도, 지원금이 있다면 심적인 여유를 갖고 불안감 없이 연구현장에 가고 공부를 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없으면 어떻게 돈을 벌어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남지.


닥터피쉬 전임교수직을 보며 내가 딱 하나 부러운 건 안정성이야. 학생 때부터 불안정성에 시달려온 기간이 너무 기니까, 그게 내 모든 삶의 디폴트가 되어버린 게 너무 지쳐. 하지만 전임교수가 되려면 저 무한 경쟁 속에서 나를 갈아야 하고. 왜 이 세계에는 소수의 전임교수와 다수의 계약직 불안정 연구자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걸까. 그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살고 싶을 뿐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원 사업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따라 볼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모델이 있어야 해. 그래서 다양한 선배들의 사례도 계속 찾아보면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라즈베리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서 돈을 받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연구자에게 좀 다른 공공 지원이 안정적으로 있었으면 좋겠어. 이걸로 내가 일확천금을 받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냥 소소한 행복과 함께 연구를 하면 너무 좋을 텐데.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야만 안정적인 연구자로 인정해주잖아. 독립연구자가 아니라 어디 연구원에 들어가있어야 그 연구가 굉장히 전문적으로 보이는 것도 문제고. 


우롱차 연구자라는 직업이라는 게 어떤 직장에 소속되지 않고 취업을 하지 않더라도 가질 수 있는 건지.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게 내 직업이 될 수 있는지에 있어서 사실 돈을 받냐 여부가 중요하잖아. 외면할래도 할 수 없는 문제지. 대학원 가면 당연히 교수가 되는 줄 아는 주변 사람들한테도 난 계속 나 못 된다고 말하고 다니거든. 근데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여기에 대한 답이 필요한데, 그런 경로나 모델을 축적해가는 선배들이 있어서 너무 감사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독립연구자로서 살아가는 선배들이 많고 다들 어떻게든 여러가지 경로를 뚫고 있는 걸 보면 어떤 안도감을 갖게 되기도 해. 나는 그래서 운이 좋다고도 생각하고.


사이다 맞아. 우리가 연구를 통해 어디 취직하는 것만 쫓는 사람들도 아니고. 들어보면 다들 연구가 좋고 학생 만나는 게 좋아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연구자로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기도 어려워지고 결국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기가 어려운 것 같아. 그렇기 때문에 성과 중심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연구자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지원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 생애주기와 사업의 시간성


우롱차 사이다는 최근 출산도 경험했잖아. 그 과정은 어땠어?


사이다 A유형에 도전했던 가장 큰 이유였어. 연구교수는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를 가졌고. 사실 연구소 입장에서는 공백 없이 일할 수 있는 연구자를 선호하는 게 현실적인 판단이니까, 출산 휴가를 상의하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어. 출산 후에도 충분히 회복할 여유가 없었어. 연구와 일을 지키고 싶어서 아이 낳기 사흘 전까지 강의를 했고, 출산 후에도 곧바로 강의 현장에 복귀했으니까.


완두앙금 와…


사이다 그때 처음으로 '이래서 정규직 교원이어야 하는구나' 싶더라고. 내가 출산으로 강의를 잠시 쉬는 게, 연구소에 양해를 구하는 게,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기회를 스스로 내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컸거든. 그렇다보니 육아와 연구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선택지가 A유형 과제였고… 아기 낳자마자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지원서를 산후조리원에서 썼어. (웃음)


라즈베리 뭐!? 진짜 이거는…


사이다 연구소의 사이클에 맞춰가면서 육아와 일을 지키는 게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어. 연구소에 자리를 비우면서까지 자리 보존해달라 내 욕심만 챙길 수도 없고. 그래서 연구에 집중하면서도 육아도 같이 할 수 있는 A유형에 지원해보자 싶었어. 조리원에서 저 엄마는 쉬지도 않고 밤에 매일 불 켜져있다고 할 정도였어. 이게 비정규직 연구자의 현실이구나 싶었지. 자리를 잡기 전까지 늘 연구에 대한 긴장을 늦출 수 없으니까. 잠시 쉬는 것조차 죄책감을 느끼니까. 그런데 출산하고 나니 몸이 너무 달라져서 예전만큼의 생산성을 내기가 너무 어려워... 힘들어. 


닥터피쉬 체감이 돼?


사이다 응. 지금은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 같아. 이런 여성의 생애주기도 고려해주면 좋겠다 싶지. 다른 얘긴데, 여성 연구자는 연구 그 자체보다 뒤에서 그림자 노동하듯 꼼꼼한 일처리와 같은 성실성으로 더 인정 받는 경우가 많아. 남성 연구자에게는 꼼꼼한 문서처리, 살뜰한 행사 기획과 준비… 그런 걸 기대하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고. 


닥터피쉬 아니, 나 갑자기 일 못하고 일하기 싫어하고 다른 사람들과 열심히 관계를 맺지 않는데도 연구 하나만으로 인정 받는 남성 연구자들이 여럿 떠올랐어. 내 주변의 내 세대에 이 샘플이 아직도 있다는 게 너무 싫다 정말.


우롱차 연구소 안에서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연구자로 키워지는 사람 따로 있지. 이렇게 여성과 남성의 차이도 있고, 또 여성 안에서도 기혼과 비혼 여성 간 시간성과 생애주기도 무척 다르잖아. 그런데 행정의 한계상 제도라는 건 하나의 틀로 모두를 끼워맞추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고. 그 내적 차이들은 다 소거가 되지. 그리고 제도적으로 요구되는 시간성을 계속 가속화되고 있고 거기서 생기는 갈등과 경쟁이 너무 심해지는 것 같아.



# 연구자가 못돼


사이다 최근에 대학에서 국내 박사도 많이 뽑는 것 같아. 좋은 일인데, 그 이유가 해외 박사보단 국내 박사가 근성 있게 조직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완두앙금 근성은 나도 자신 있는데!


사이다 나도나도. (웃음) 어쨌든 그래도 학문적 역량보다 일할 사람으로 먼저 평가 받는 현실은 좀 씁쓸하지.


우롱차 국내 박사는 사실상 일할 사람을 키우는 곳이었구나. (웃음)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어. 이제 대학에서 교수의 업무 종류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거지. 행정적인 일을 굉장히 많이 해야 하고, 유학생 유치가 많다보니 유학생 생활지도도 교수들이 다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야. 게다가 사업도 따와서 연구소 운영도 해야 하고.


사이다 그래서 전임교수가 되도 그 나름의 스트레스가 많더라고. 학교 성과 지표 때문에 논문을 빠르게 다작해야고 사업 계획서 쓰고… 연구자가 아닌 사업가와 행정가를 원하니까.


우롱차 사실 이런 상황 때문에 최근 임용된 교수들 사이에서도 연구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 같더라. 근데 이게 전임교수가 아닌 독립연구자들과 소통할 수 없는 문제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아. 서로 싸울 일이 아닌데 말이야.


사이다 연구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소통하지 못하는 건 개개인의 마음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커. 실적은 갈수록 더 많이 요구하는데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니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기가 어렵지.


라즈베리 지금의 구조 상에서는 모두가 연구 성과를 내야 하지만 연구자는 될 수 없는 것 같아. 그래서 서로를 미워하게 되고. 모두가 연구를 하고 싶은 건 똑같은데.


우롱차 그리고 제도적으로 인정 받는 연구와 인정 받지 못하는 연구의 구분도 계속 생기잖아. 이공계와 인문사회계, 양방과 질방 등등. 이런 구분이 계속 만들어지고 우리는 이 모든 지원과 실패 과정 속에서 그러한 구분을 계속 확인 받아.


사이다 그래서 학교의 속도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 밖에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시도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좋은 모델이라 생각해. 그런데 다만 생계가 유지되지 않으니까 서로 비평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사실 연구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적으니 연구재단사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이 사업에,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목소리를 낼 여력이 없어지는 거지. 연구재단사업은 연구자의 처우를 보장하고 개선하는 것을 넘어서 학문 발전을 위해 있는 건데 그 토대가 오히려 무너지는 것 같아.


닥터피쉬 이런 목소리가 더 많아져야 하고 실제로 많은 분들이 연구자 현실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학계 바깥으로 환류하는 과정에서 계속 걸림돌이 생기는 것 같아. 네가 스스로 선택한 길인데 왜 징징대냐. 너 하고 싶은 공부에 왜 돈을 줘야 하냐는 식이야. 예전에 예술인들이 복지 문제를 요구할 때 받았던 취급이랑 비슷해. 결국 인문사회 학문의 가치 인정과 사회를 위한 연구의 기준에 대한 더 많은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고 느껴.



# 달팽이 연구자


라즈베리 어떤 연구가 국가에 기여하는가. 그 기준에 맞춰 인문사회계 연구를 낮게 평가하면서 인문사회계 연구의 기반이 탄탄하게 쌓이지 못하는 것 같아. 성과 위주로만 간다면 튼튼한 기반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그냥 허술한 탑만 만들어지는 거지.


우롱차 국가에 대한 기여, 실효성, 효과 같은 것은 매우 주관적 기준에 의해 정해지지만 객관적 지표처럼 여겨지잖아. 그리고 인문사회계의 연구는 단기적 관점 안에서 성과로 보이기 어렵기도 하지. 지금의 문법으로는 우리가 항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이미 짜여진 구조와 문법 안에서 우리가 반론을 하려면 그 문법을 체화해서 활용해야 하는데 그 자체가 안 되는 거야. 기준 자체가 너무 안 맞아.


라즈베리 느린 연구자도 빠르게 정상적인 속도를 갖추라고 압박하니까, 너무 부담스러워.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싶고. 그래서 자꾸 나와 비슷한 느리게 가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지만 또 서로 섞일 필요도 있고. 달팽이들끼리만 있으면 너무 행복하지만 말이야. (웃음)


우롱차 우리끼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웃음)


사이다 내가 연구소에 있던 시절이 힘들었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나한테 좋은 자극을 주는 환경이 이기도 했어. 난 언제나 달팽이였는데 나와 다른 속도의 세계를 살고 있는 연구자들이 있더라고.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힘들어 할 때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연구자 공동체가 있어서 큰 위로를 받았기도 했어. 그곳에서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해줬어. “우울해하지 마.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한 거야. 또 그 과정에서 네가 소중히 여기는 세계가 무엇인지 더 명확히 알게 됐잖아.”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 그런 치열한 세계를 접해본 게 참 다행이야. 한때는 내가 지향하는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짧은 기간에 논문을 많이 쓰는 연구자들을 성급하게 판단했었는데, 그런 편견도 많이 깨졌어. 옳구나. 많이 쓰는 것도 중요하구나.


일동 (웃음)



글. 닥터피쉬

편집.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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