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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편영시] 전일제 대학원생의 갓생 살기

  • 1일 전
  • 5분 분량

새로운 학기의 소회를 물어보는 승호쌤의 편지를 받은 지 넉 달이 지났네요. 아마 학기의 초중반쯤에 답해야 할 질문이었을 텐데, 이제야 답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제가 얼마나 정신없는 학기를 보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요. 저의 박사과정 두 번째 학기는 다행히도 끝이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게 무슨 말인지는 곧바로 설명드릴게요.



“잘 지냈어?”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지 고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몇 번 있어요. 그 질문은 너의 안부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던지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의례적인 구절이라고 말이에요. 나의 ‘진짜 안부’를 전하기 위해 “나 잘 못 지냈어”라는 말을 입에 머금고 상대방에게 회한의 심정을 담은 눈빛을 보내려 한다면, 그건 사회성이 없는 사람인 거라고요. 마찬가지로, 대학원생이나 연구자들과 이맘때쯤 대화를 하게 되면 “이번 학기는 어땠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주고받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네, 그럭저럭이요”라는 평이한 답을 하면 될 텐데, 굳이 저는 제 학기의 ‘진짜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샘 솟아요. 정말 사회성이 없는 사람인 거죠.


그래서 학기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한숨을 한번 짧게 쉬고 넌덜머리 난다는 표정 연기까지 더해, “아주 개똥 같은 학기를 보냈어요”하고 말합니다. 상대방은 예상치 못한 거친 언사에 한껏 당황스러운 반응을 저에게 보여줍니다. 그걸 보면 쓰윽 웃게 되는데, 저는 사회성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저 때문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걸 즐기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상대방을 난처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닙니다. 어느 정도로 개똥이었냐면, 두 수업의 기말 과제 중에서 하나를 제출하지 못했어요. 좀 더 정확히는, 마감 기한이 되기 전에 한글 파일조차 만들지 못했습니다. 정말 망해버린 겁니다.


제 반응에 당황하던 상대방들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며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냐고 되물어요. 그럼 저는 차분히 설명합니다. 제가 생각했던 기간 동안 두 건의 기말 과제를 모두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예상과는 달리 과제를 딱 하나를 끝마쳤더니 이미 마감 기한이 되어있었다고요. 누군가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이렇게 반응하신 분들을 저는 대체로 존경합니다. 그분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사신다는 점에서), 다른 누군가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그 마음 잘 안다는 의미로 어깨를 토닥여주기도 했습니다(감사합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주셔서요).



부끄럽습니다. 특히나 대학원을 다닌 햇수로 치자면 승호쌤에게 제가 선배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말로 부끄럽네요. 변명을 해보자면, 석사 때에는 이 정도로 학기가 잘못된 적은 없었어요. 변명이랍시고 한 말인데, 사실 가면 갈수록 더 못난 인간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석사 때와 지금의 저는 무엇이 달라진 걸까요? 여러 번 한 적 있는 일이랍시고, 이제는 익숙한 일이라는 생각에 그만 긴장이 풀려버린 걸까요? 혹은 이 정도로는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어버린 약아빠진 마음이 나도 몰래 발현된 걸까요?


석사과정과 박사과정 사이에서 저에게 있었던 가장 큰 변화는 사실 제가 전일제 학생이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석사 때에는 대학원과는 아무 관련 없는 외부 일을 하면서 학업과 연구를 병행했었는데, 아무래도 박사과정은 무게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에 석사 졸업과 함께 일을 그만뒀거든요. 늘 그랬듯 당시에도 이것 외에는 별다른 생각이나 대책은 없었고, 통장에 여러모로 쌓여 찍혀있던 그리 크지는 않았던 목돈만을 믿었습니다. 앞으로의 생활이 좀 궁핍해지긴 하겠지, 정도의 생각만 있었던 것 같아요. 종종 급여 입금일이 안 맞아 들어가서 남자친구에게 카드값을 대신 내달라는 말을 해야 할 정도의 처참한 상황이 될 줄은 몰랐던 거죠. 대학원과 관련 없는 직업으로 돈을 무리 없이 벌던 석사 때에는 확실히 경제적 압박을 느낀 적은 없었어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전공 교수님들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기도 했고요. 일이 힘들었던 날이면 별다른 걱정이나 죄책감 없이 그리 싸지 않은 치킨집에 주문해 치맥을 먹을 수 있었다고요.


다른 한편, 석사과정 중에는 일의 영역과 학문의 영역으로 제 삶이 양분되어 있었어요. 일은 돈을 벌 수 있지만 대체로 무의미하다고 여겼고, 공부와 연구가 제 삶에서 의미 있는 것이라 믿었죠. 너무나 일하기 싫었고, 일 때문에 나의 몸과 마음이 소진되는 게 기분 나빴어요. 우스울 수 있지만, 그래서 당시 저의 도피처는 학교와 책이었습니다. 항상 해야 하는 일보다는 안 해도 되는 일이 더 달콤한 법이잖아요. 그것이 지금보다는 더욱 순수하고 어린 마음으로 학문을 대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공부를 하겠다고 일을 그만뒀더니 거꾸로 공부가 일이 된 셈이죠. 이제는 공부로 돈을 벌어야 합니다. 올해 지원한 연구재단의 박사과정생연구장려금지원사업은 대차게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지도교수님께서 책임을 맡으신 규모 있는 프로젝트에 보조연구원으로 고용되어 연구용역을 제공하고, 당분간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지출과 비용을 감당할 만큼은 아니지만 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프로젝트를 위해 더운 여름날 땀 흘리며 현장조사와 면담을 다녀온 길이에요. 이건 일일까요, 공부일까요? 힘들지만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일도 하고 공부도 해야 했다면, 전업 박사과정생이 된 지금은 공부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 말이 맞긴 한데 좀 더 가까이서 다시 말해보자면, 저는 공부-공부를 하면서 일-공부도 해야 한다는 거죠. 하, 달라진 게 없군요. 다만, 이제는 한쪽이 하기 싫다고 다른 쪽으로 도망칠 구석이란 없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해야 할 일의 종류가 많다는 거예요. 수업 과제도 해야 하고, 개인 연구도 해야 하고, 프로젝트도 해야 하고, 공동연구에다, 학회 발표 준비에다, 각종 회의들까지. 이미 형형색색의 일정으로 가득 채워진 달력의 빈틈이 생겼다고 쉴 수는 없습니다. 가끔은 친구도 만나야 하고, 놀기도 해야 하고, 제가 하고 싶은 취미활동도 바쁘다고 손 놓아버리기에는 아쉽습니다. 이러다가 병나면 안 되니까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운동도 해야 하고요. 물건으로 가득 차 곧 터져버릴 장바구니 같은 달력. 끔찍하게 바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이상한 달력. 대체로 프리랜서의 작업 방식과 비슷한 것 같긴 한데, 수익성은 없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박사과정이라는 자리는 제가 속한 ‘학업 공동체’에 관해 고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제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에요. 제가 석사 때 선배로부터 학문적 도움을 받았던 만큼, 저도 그런 선배가 되어야 한다는 감각이 강하게 있어요. 때문에 나도 잘 모르면서 뭔가 아는 척 커리큘럼을 짜서 공동 세미나를 열기도 하고, 내가 쪼개 쓸 시간도 없는 주제에 후배님들에게 연구에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며 방긋 웃곤 해요.


이를 통해 저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어요. 하나, 저는 욕심이 많다는 것. 둘, 내가 이 많은 일들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운영’하는 데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는 것. 그 결과가 이번 학기의 못다 한 기말과제로 확인된 셈이지요. 프리랜서의 기본 소양인 일정관리 기술을 갖추어야만 전업 대학원생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기말과제를 제출하지 못한 이후로 많이 반성했습니다. 마감 기한을 맞춘다는 것은 연구자로서 필히 얻어야 하는 신뢰의 문제이고, 학위를 마친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계속 되뇌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걸음마를 떼듯이 예전엔 해보지 않았던 방식의 구체적인 일정 관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남자친구로부터 노션 템플릿을 하나 추천받아서 쓰고 있는데 아직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원활한 해결이 난망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무언가를 포기하면 된다는데, 포기하고 싶은 게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죠. 뭘 포기해야 할지, 승호쌤이라면 정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제 삶은 전일제 대학원생의 평균쯤은 되는 걸까요? 지역에 따라, 학교에 따라, 전공에 따라, 지도교수에 따라, 너무나 다른 모양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판단이 쉽지 않네요. 그래서 그런지 머릿속에는 제 삶에 대한 의구심만 한가득입니다. 답답하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저는 이제 수습을 위해 이번 학기 제출하지 못한 기말과제를 작성하러 가야 해요. 저의 학교생활에 관해 물어봐 준 승호쌤에게, 저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물론 대학원생에 준하는 삶을 이미 살고 있는 승호쌤이지만, 앞으로 닥쳐올 진짜 대학원생 라이프에 저보다는 훨씬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길 바라요.


그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한 다음 수신인을 생각해 보았어요. 신문연에서 가장 바빠 보이는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저는 보영쌤인 것 같아요. 항상 무언가를, 그것도 아주 다양한 종류의 일을 해내고 계신 모습을 보면 언제나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보영쌤의 대학원생 ‘갓생’은 어떤 모양인가요? 항상 묻고 싶었지만 이 기회를 빌어 꼭 이야기 들어보고 싶어요.


앗, 제가 보내는 편지가 보영쌤의 바쁜 일상에 또 하나의 짐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행운의 편지라는 게 원래 받을 때는 짐이지만 답장을 보낸 이후에야 행복으로 돌아오는 거라니까요🍀


이현화 드림



글. 이현화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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