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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아들맘은 왜 ‘심리학적 계산기’가 되었나 : 신문연 세미나 <캐해반> 리뷰



아들을 낳았다. 그와 동시에 이 아이를 바람직한 사회 구성원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나에게 주어졌다. 두려웠다. 나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다른 생명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게다가 내 아이는 ‘남자’였다. 요즘은 아들을 가지면 ‘엄마가 힘들겠다’거나 ‘엄마한텐 딸이 필요하다’며 안쓰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부모들 사이에서도 첫째가 딸이면 둘째를 맘 편히 갖지만, 첫째가 아들일 경우에는 망설여진다는 이야기가 관용구처럼 반복된다. 그만큼 남성성이 문제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자식 교육 좀 잘하라”라는 시대의 명령은 ‘딸맘’보다 ‘아들맘’에게 더 큰 압박감을 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때부터였어요... 오은영 박사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기 시작한 게...’

임신 이후 <금쪽같은 내 새끼>류의 육아 콘텐츠를 진지하게 섭렵했다. 양육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대비하려면 길라잡이가 되어줄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최민준의 아들 TV>라는 유튜브 채널이 특히 흥미로웠다. 난생처음 듣는 직업인 ‘아들 전문가’를 자처하는 최민준 씨는 아들의 ‘기질’과 ‘성향’에 맞는 세밀한 양육법 코칭으로 인지도를 쌓았다. 예컨대 아들의 승부욕, 공격성, 산만함과 같은 내적 특성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승화하고 통제할지에 대한 기술을 제공하는 식이다. “어머니, 아들은 다릅니다.” 그 말이 어찌나 솔깃하게 들리던지. 댓글 창은 이미 공감과 간증으로 가득했고, 나 역시 나중에 써먹겠단 생각으로 공유와 저장 버튼을 자주 눌렀다.

이런 콘텐츠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부모-자식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인간의 ‘내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 주목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내면성에 대한 지식―좁게는 심리학, 넓게는 ‘psy-’로 시작하는 과학들―을 광범위하게 유통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어휘와 분류 체계는 부모가 자녀의 상황을 심리학적으로 진단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스스로 처방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로 전수된다. 일상의 어려움에 곧바로 적용 가능한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심리 지식은 매우 유용하고 자연스러운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비단 육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부·연인·친구·학교·직장 등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균열을 ‘내면에 관한 지식 체계’를 통해 해석하려는 경향이 일상화되었다. 가스라이팅,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 아스퍼거 증후군, 경계선 지능, 착한 아이 콤플렉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진료실의 언어’가 얼마나 친숙한 일상어로 자리 잡았는지 상기하면 새삼 놀랍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MBTI를 필두로 한 ‘심리학적 자기 해석’ 열풍은 애착 유형, 에니어그램, 에겐·테토 테스트, 심지어 사주팔자에 이르기까지, ‘자아’에 관한 온갖 지식의 범람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난겨울, 내가 신문연 세미나 <캐해반>에 참여한 이유는 바로 이 ‘심리의 범람’을 향한 양가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나는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심리 지식에 자주 흥미를 느끼고, 때로 과몰입했다. 특히 아들이 태어난 후로는 나의 자아를 넘어, 아들의 자아에 대한 관심이 이러한 몰입을 더 부추겼다. 그러나 동시에, 심리학적 용어 없이 인간성을 설명하거나 구상하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에 정체 불분명한 꺼림칙함을 느꼈다. 굳이 상담소를 찾지 않아도, AI에게 고민을 입력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언제나 심리학의 문법을 따랐다. “네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해. 이런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OOO이라고 부르는데 …”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그렇게나 협소한 존재인가? 심리학은 어떻게 인간의 본성을 해설하는 권위자가 되었는가?


<캐해반>에서 7주 동안 함께 읽은 니콜라스 로즈(Nicolas Rose)의 『우리 자신을 발명하기: 심리학, 권력, 그리고 개인성』은 내가 느낀 찝찝함을 언어화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 그건 다름 아닌 ‘심리학이 우리의 자아를 통치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로즈에 따르면, 심리(psy) 과학은 우리가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현대적 자아 개념―일관된 경계와 내적 공간을 갖춘 개별화된 주체―을 ‘발명’하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아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19세기 후반 특정한 정치적·사회적·지적 국면 속에서 우리가 자아와 맺는 관계가 지금의 형태로 ‘조립’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국면은 곧 자유민주주의 통치 체제로의 이행, 그리고 의식과 행위의 주체로서 자유롭고 내면적인 개인의 등장으로 특징지어진다. 외부의 강압이 아닌 내면의 ‘진실’을 바탕으로 인간 스스로 삶을 경영해야 하는 시대에, 심리학은 인간의 내적 본질을 탐구하는 지식 체계로서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심리학이 비추는 ‘내적 진실’이란 사실상 각종 측정 도구를 통해 인간을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번역한 결과에 가깝다. 개인은 표준화된 분포 속에 위치 지워지고, 평균에서 벗어난 특성들은 치료와 교정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심리학은 자아에 대한 분석적 언어를 제공함으로써 개인을 자아실현을 위한 주체적 노력으로 이끌고, 그 노력이 사회의 통치 합리성에 부합하도록 유도하는 ‘지적 기술’로 기능한다. 이런 점에서 심리학은 개인의 본성에 맞추어 인간을 통치하는 가장 ‘민주적’이고 ‘윤리적’인 권위로 정당화된다.

심리학적 통치가 꽤나 ‘윤리적’이라면, 게다가 ‘유용’하기까지 하다면 무엇이 그토록 문제적인가? 로즈는 우리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의 역사적 우발성이 심리학의 언어로 은폐됨으로써 그것을 질문하고 변형할 수 있는 ‘대안적 가능성’이 차단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로즈의 언어를 빌려 나름의 ‘심리학 성토대회’를 도모했던 우리 세미나에서도, 토론은 빈번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의 효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흘렀다. 심리학적 진단명이 개인의 정체성을 보호하거나 법적 분쟁에서 중요한 자원이 되는 방식, 심리 상담이 실제로 발휘하는 치유적 효과, 그러한 지식이 대인관계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 제공하는 효능감까지. 우리 역시 현대적 자아 체제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심리학적 통치라는 ‘어항’ 바깥을 상상하기란 생각보다 더 어려웠고, 그 안에서의 삶을 거리 두고 성찰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로즈는 오늘날의 자아 체제가 다양한 권리와 특권을 부여하는 만큼, 새로운 불안과 실망, 규범과 통제를 생성해 낸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심리학적 언어로 자기를 이해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자유롭게 삶을 꾸려 나간다고 ‘믿는’ 바로 그 과정에서 무엇이 상실되는지는, 지금의 자아가 필연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상상할 수 있다. 로즈는 이러한 ‘다른 가능성’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내면으로 더 깊이 침잠하는 방향이라기보다, 바깥으로 열려 있는 다른 존재 방식과 관계 형식을 상상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내가 <아들 TV>에서 느낀 양가적인 감정은 아마도 나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앞으로 아들이 마주할 수많은 문제들이 심리학적으로만 틀지어진다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테다. MBTI, 에겐·테토, 불안형·회피형 등 인간의 내면을 규정하여 관계를 해석하려 하는 여러 어휘들 역시 마찬가지다. 나와 타인의 관계가 항상 ‘자아 대 자아’의 구도 속에서 분석된다면, 그 자아들을 둘러싸고 있는 더 큰 맥락―그 ‘나머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고, 또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심리학의 언어는 엄마에게 ‘심리학적 계산기’가 될 것을 요구한다.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그의 본성과 기질을 심리학적 도구로 정확히 파악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양육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양육 전문가’나 ‘딸 전문가’가 아니라 굳이 ‘아들 전문가’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그만큼 현재 한국 사회에서 아들이 문제적인 분석 대상으로 구성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맘’에게 자녀 양육은 사적 책임의 영역을 넘어, 문제적인 성인 남성을 길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공적 책임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심리학적으로만 환원되는 구도에서, 아들의 일탈과 문제 행동은 결국 엄마의 책임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엄마가 아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적절히 훈육하지 못했다는 식이다. 그러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에 오늘날 남성성의 문제가 ‘아들맘 혐오’―남자와 결혼해 남자를 낳고 기른 남미새 여성을 향한 혐오―로까지 번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맘’으로서 나는 그러한 비난을 피하고 싶지 않다. 아들을 인간답게 키워낼 가장 큰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를 위해 앞으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으로 아들을 더 잘 파악하고 통제 가능하게 만드는 양육 지식을 습득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심리학적 사고방식의 만연함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나와 아들이 속해 있는 더 큰 세계에서 우리는 매일 다른 삶을 살아가고,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조립될 것이다. 그 세계는 내면을 비추는 어휘만으로는 온전히 포착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모순들로 구조화되어 있다. 부모의 손이 닿지 않는 그 영역에서, 아들이 무엇을 마주하고 어떠한 존재로 변모해 나갈지 두렵기도 하다. 심리학은 인간을 계산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존재로 번역해 주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게 명료한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아를 상상하는 언어가 심리학에 한정될 때, 삶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균열과 모순은 다시 개인의 내면과 책임 문제로 되돌아온다. 우리가 저마다의 위치에서 삶의 기술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동안, 그 바깥의 더 거대하고 위력적인 모순들은 방해받지 않은 채 보존되어 조용히 다시 우리 삶을 틀 짓는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규정하는 더 많은 어휘가 아니라, 그 어휘들이 미처 포착하지 못하는 삶의 영역을 상상해 보는 연습일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가 자아라는 상(像)에 얼마나 뿌리 깊은 애착을 지니고 있는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에 얼마나 관습적으로 매료되는지, 그것이 열어준 수많은 가능성이 동시에 얼마나 많은 것을 제약하는지를 직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캐해반> 세미나에서 나와 동료들은 그 첫 단추를 함께 끼웠다. 이제 이 여정을 다음 단계로 이어가려 한다. 우리의 자아는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으며, 그 너머의 다른 가능성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을 붙들고 계속 함께 고민할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삶, 다른 관계, 그리고 다른 세계를 사유하기 위하여.



글. 이가은(신문연 회원)

편집. 권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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