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편영시] 좋은 토론자가 되고 싶어요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2일 전
- 3분 분량

어쩌다 보니 기세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서우빈이 되어버렸는데요. 같이 박사과정 1학기를 마친 지금 시점에서 한 학기를 ‘기세’있게 보냈냐하면 ‘아닌데요ㅠㅠ(눈물줄줄)’를 강력히 외쳐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1학기를 회고해보자면 선우가 더 좋은 ‘독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만큼 학술장 안에서 더 좋은 ‘토론자’가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한 학기였던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해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헤맬 때 쉽게(?) 기댈 수 있는 나의 센빠이 선기쌤께 편지를 빙자한 ‘좋은 토론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썰’을 풀고 그 답을 내놓으라고 닦달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써보려고 합니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건 최근에 한 학회에서 겪었던 일 때문이었는데요. 상황은 한 석사과정생의 발표에, 박사수료 이상으로 보이는 분이 토론을 맡은 순간이었습니다. 토론자는 발제자의 주제가 자신의 전공이 아님을 밝히면서도 발제자가 제시한 한 소재를 확장하며 어느 순간 발제와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주제를 벗어난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그 토론이 점점 ‘내가 아는 얘기’로 점철되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물론, 이 장면을 보며 느낀 불편함은 곧바로 나 자신의 과거와 겹쳐졌구요. 항상 제삼자의 입장에서 남의 글과 말을 평가하는 것이 제일 쉽다는 말처럼, 나 또한 그 상황에서 과연 발제자에게 필요한 토론을 할 수 있었을까 싶었지만, 적어도 그 노력에 가닿는 토론이었느냐 하면 그건 또 잘 모르겠다는 게 그 당시 제 판단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석사과정 2학기를 밟고 있을 때, 수업에서 한 분의 토론을 맡았었어요. 당시 학회에 제대로 참가해 본 적도 없고, 발표나 토론 역시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저는 매우 부끄러운 토론을 했었죠. 발제자가 제시한 ‘소재’를 나의 이야깃거리 삼아 다시 '나'와 발표와 내 생각에만 연결해 토론을 제시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더 최악이었던 것은 저 스스로 그 토론이 ‘왜 토론으로 기능하지 못했는지’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죠. 다행히(?) 그 수업을 같이 듣던 한 동료 박사과정 선생님이 수업이 끝난 뒤 저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토론의 방법에 대해서 엄청난 조언을 전해주었고, 그제야 제 토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지를 자각하며 부끄러움에 빠졌지만, 그 부끄러움을 일찍 느꼈다는 것이 오히려 제가 더 빨리 변화할 수 있다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좋은 기회로 작은 학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당시 저는 ‘유튜브’와 관련된 주제로 발표를 했는데, 마침 토론자 선생님도 유튜브를 소재로 한 박사논문을 쓰고 계신 분이셨죠. 사실 이런 분께 토론을 받기엔 저의 글은 학기말 페이퍼 수준의 부끄러운 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지점에서 시작한 저의 문제의식을 높게 평가하며, 너무나도 부족했던 저에게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시간상의 문제로 토론을 더 듣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으니까요. 좋은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 글은 결국 완성된 원고로 투고되진 못했지만, ‘좋은 토론’이 무엇인지는 조금 깨닫게 된 것 같았달까요.

하지만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는 좋은 선례가 있더라도 스스로 그 능력을 체득하기까지는 고단한 여정이 함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박사과정에 진학한 뒤 석사과정생과 박사과정생을 모아놓고 열린 신입생 세미나 첫 주차에 석사과정생분 발제문의 토론을 맡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토론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 의도를 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석사과정생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훌륭한 발제문을 눈앞에 두고 경탄하고 싶었지만, 서투른 저의 글은 그를 향한 평가가 되어버렸고, 정리되지 못한 토론글들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주장만을 남겨버린 것이었죠. 더 부끄러웠던 것은 이 감각을 퇴고하기 전까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결국 토론문을 제출하게 되었고, 그 토론문을 접한 다른 동료 선생님의 귀띔으로 다시금 저의 부족함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수업에서 발제와 토론이 이루어졌고, 여전히 헤매는 일이 잦았더랬죠. 그러다 또 한 석사과정생분의 발제문에 토론을 맡을 일이 있었습니다. 그 주의 텍스트가 매우 현학적이고 어려웠기에, 저 또한 이해하기 힘들었던 만큼 발제자도 고군분투한 흔적이 가득한 발제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발제자가 제시한 토론거리는 그 주의 이론가가 제시한 개념을 조금 오독한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죠. 그러나 너무나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왜 그렇게 오독할 수밖에 없었는지 발제자의 입장에서 그 글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조심스레 토론문을 써 내려갔고, 발제자는 ‘다른 수업에서 토론을 해보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라며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정작 저는 저의 글이 여전히 좋은 토론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좋은 토론’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면, 그건 발제자의 세계에 방문하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기나긴 과정을 거쳐 쓰인 성긴 글들은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고민의 흔적들을 남기며 ‘문제의식’이라는 세계를 만드니까요. 물론, 여전히 그 세계를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힘들지도 모르죠. 그렇기에 타인의 세계를 더 많이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선배 연구자들의 노련함이 더욱 지난한 여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과정에서도 저를 일깨워줬던 선배들이 있었네요.
한편으론 이렇게 편지를 쓰고자 했는데도 구구절절 내 얘기만 늘어놓아 버리게 된 후배를 보며 선기쌤은 어떤 답장을 떠올릴까요? 나쁜 말이 떠오르더라도 사랑으로 보듬어 주세요(당당). 그럼 답장 기다릴게요.
서우빈 드림

글. 서우빈
편집.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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