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동향] 나.키.소(나의 키보드를 소개합니다)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2일 전
- 2분 분량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장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도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연구자에게 도구란 무엇일까?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여러 방법론일까? 아니면 (문득 이론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지도교수님의 목소리가 맴도는데) 여전히 현상을 바라보고 기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이론’이 연구자에게는 가장 큰 도구이자 무기인 것일까? 연구자마다 각자의 해답이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도구란, 연구자도 일련의 과정을 거쳐 결국 ‘글’이라는 생산물을 내야 하는 생산자라는 입장에서, 글의 생산을 보조하는 ‘키보드’인 것 같다. 그렇다. 사실 이 글은 나의 키보드를 자랑하는 글이다.
처음 키보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석사논문을 작성할 때였다. 시험기간엔 뉴스마저 재밌게 느껴지듯이 논문을 쓸 때도 딴짓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딴짓의 첫 시작은 책상 정리였다. 으레 논문 작성의 과정이 그러하듯, 책상에는 수많은 책과 인쇄된 참고 문헌들, 비어버린 커피 컵들, 어질러진 초콜릿 봉지들이 가득했다. 분명 부산한 어지러움 속에서도 질서가 있기에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잘 살아왔을 텐데, 그때는 도저히 이대로는 논문을 쓸 수 없다는 판단(핑계)에 책상을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더 큰 화면에서 논문을 쓰면 되지 않을까? 노트북을 닫고 쓰려면 키보드가 필요할 텐데. 그럼 키보드를 사자!’라는 고민 끝에 나의 키보드 여정이 시작되었다.
키보드와의 첫 만남은 실망스러웠다. 키보드라는 취미를 처음 가질 때만 하더라도 지금같이 기계식 키보드의 대중화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가성비 제품을 찾다 보니 타건감도, 디자인도 뭐하나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다 연구실 동료 선생님이 알고 보니 키보드 덕후였고(!), 너무나 흔쾌히 자신의 기계식 키보드를 쳐보라고 건네준 그 순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앤디가 처음으로 지미추를 신었을 때 “영혼을 팔았다”라는 나이젤의 말처럼 나는 키보드에 내 영혼을 뺏겼다. ‘도각’하고 초콜릿이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그 청각이 정확히 촉각으로 전달되어 느껴지는 공감각적 경험은 나를 ‘커스텀’ 키보드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렇게 첫 ‘커스텀’ 키보드를 구매하게 된다. 키캡, 스위치, 윤활 등 낯선 것투성이였던 것들을 하나둘씩 내 손안 최고의 선생님 유튜브와 함께 독파해 나가다 보니 키보드를 완성할 수 있었고, 완제품에 손가락을 얹어 타이핑을 치는 순간 정말 순식간에 논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생산성이 늘기는 했다. 논문 작성에서 가장 어려운 건 아무래도 ‘시작하기’일 텐데, 뭐라도 치고 싶어서 한두 문장씩 쓰고 있으면 어느새 한 문단이 되고 한 절이 완성되곤 했다. 그 이후로 글이 안 써질 때마다 새로운 스위치로 교환해 보거나, 새로운 키캡을 사거나, 다양한 배열(65키, 87키, 스플릿 등)의 키보드를 구매하면서 ‘도구’로써 키보드의 수명을 연장해 왔다. 키보드를 사고 나니 좋은 모니터가 사고 싶고, 이 모든 것들을 올려두고도 편하게 공부할 책상이 필요해지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연구를 지향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누구보다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복속된 삶을 사는 내 모습과 가벼워지는 지갑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그렇게 연구자의 책상에 쌓이는 다양한 것들이 또 오늘의 연구자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연구자들의 무엇을 소개한다면 흔히 ‘책장’을 주목하곤 한다. 책장에 있는 책들을 통해 그 사람의 전공과 관심사, 삶을 본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적 여정을 쌓아두는 책장이 아닌 일상적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연구자의 ‘책상’에서는 어떤 연구자의 이야기들이 있을까? 어쩌면 잠을 청하는 침대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연구자의 책상에는 어떠한 물건과 이야기들이 쌓이고 있을까? 또 ‘랩(Lab)’ 생활을 하고 있는 이공계 연구자의 공간과 인문사회 연구자의 공간은 또 어떻게 다를까? 혹은 다른 사람들의 자취방을 궁금해하며 ‘자취남’과 같은 집방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다른 연구자들의 책상을 궁금해할까? 이런 실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연초 신문연의 사업을 점검하는 워크숍 때 새로운 사업(?)으로 회원분들의 책상을 주제로 찾아가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 또한 학기가 시작하고 나면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부단히 노력해 보고 싶다. 그러니 혹시 자신의 책상을 자랑하고 싶으신 회원분들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연락을 부탁드리겠다! 아니면 직접 찾아 연락을 드릴 예정이다!(빵야-).
p.s <더 컬처럴> 내 신문연 사무실에는 다양한 기계식 키보드들이 구비되어 있다. 프라이빗한(?) 타건샵으로 많이들 놀러 오시라!

글. 서우빈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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