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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그리고 '우리'의 방

최종 수정일: 10시간 전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연구 공간이 필요하다. 이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때로 그렇지 않기도 하다. ‘랩실’이 존재하지 않는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에서는 학생들에게 연구 공간이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논문이 도서관에서, 기숙사에서, 혹은 (스터디) 카페 안에서 쓰여 왔다. 워낙 노트북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글을 쓰는 일이 익숙하다 보니, 더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한 연구 공간에는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다.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는 어떤 연구 공간을 필요로 할까?


새 학기를 앞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이번 대담에서는 ‘연구 공간’을 주제로 가벼운 수다를 떨었다. 각자가 거쳐 온 연구 공간의 역사부터, 공들인 데스크테리어 자랑, 연구 공간 없는 설움과 막상 연구 공간을 얻게 되었을 때 그것을 운용하는 데 있어 겪은 어려움 등을 나눴다. 이 수다는 단지 공간에 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서로가 어떻게 연구해 왔는지에 관한 이야기로도 나아갔다(2부에서 다룰 예정이다). 공간은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습관과 작업 방식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되어가는 과정은 연구하고 논문 쓰는 법을 익히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를 위한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트레비 박사과정.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공간을 정리하고 꾸미는 데만 열심이다. 집구석이 산만하면 오히려 창의성이 높다는데, 늘 정리되어 있어서 창의성이 부족한 것인지 고민이다.


유령 석사수료. 학위논문을 쓰고 있다. 고수는 장비를 가리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외장 모니터를 처음 경험한 이후 공부는 장비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브로콜리 박사과정. 공대 대학원을 잠깐 다닌 적 있다. 경기도 북부에는 애인의 집, 서울에는 더컬처럴, 경기도 남부에는 학교 기숙사, 그리고 프로젝트를 위해 서울 서북권까지… 동서남북 방방곡곡 가야 할 곳이 너무 많다.


아메 박사수료. 주로 집에서 공부해왔는데, 박사논문을 쓰면서는 학교에 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당장 닥친 마감이 없어져서 퍼지기 시작했다.



# 내 책상을 사진으로 남기기


트레비 일단 시작은 가볍게 해볼까 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보려고 사전에 각자의 책상이나 작업 공간을 찍어와달라고 했는데… 다들 책상 사진을 자주 찍는 편이야?


아메 아니…


브로콜리 아니…222


유령 은근히 찍어놓은 게 많았어. 의식하지 못했는데 공부하다가 집중 안 되면 한 번씩 찍는 것 같아. 주로 새벽에 깨어 있고 혼자 외롭고 심심하니까, 깨어 있을 것 같은 친구들한테 ‘뭐 해?’ 이런 식으로 공유하고. 그래서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


트레비 나는 찍어놓은 게 많아서, 내가 책상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구나 했어. 예전에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자기 책상을 찍는 심리는 뭘까? 그냥 찍는 게 아니라 인스타에 올리든 약간 자랑을 하게 되는데… 나 지금 이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까. 근데 아메랑 브로콜리는 안 찍는구나. 그러면 작업 공유 이런 걸 잘 안 하는 거야? 나 지금 공부하고 있어요, 같은.


아메 굳이 안 해도 되는 거 아닐까?


브로콜리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된 느낌으로 작업하는 것 같아. 그래서 사진이 없는데, 얼마 전에 친구가 놀러와서 내가 책상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찍어줬어. 나도 처음 보는 모습인데 꽤 괜찮은 거야. 나 이렇게 멋있게 살고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어. 그 이후로는 종종 찍어볼까 생각하긴 했어.


아메 그러고 보니까, 그런 날이 별로 없지만 작업보다는 그냥 책 읽다가 중간에 책상에 놓인 위스키를 종종 찍곤 해. 그게 책상 사진 찍는 거랑 비슷하게 나오는 건데.


트레비 위스키는 왜 찍는 거야?


아메 나는 놀고 있고 지금 기분이 좋다.


트레비 놀고 있는 장면을 찍는 거구나.


트레비의 책상


트레비의 책상 사진. 책상 왼쪽에는 높은 책장이 있고 그 안은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책상 위에는 왼쪽부터 가습기, 세로 모니터, 가로모니터, 키보드, 피규어, 필통이 놓여져 있다. 책상 뒤 벽면에는 여러 엽서가 붙여져 있고 그 옆에는 블라인드가 있는 창문이 있다.

트레비 내가 책상 정리를 되게 좋아하더라고. (다른 사진도 보여주며) 계속 배치가 바뀌잖아. 공부하다가도 갑자기 뭐 하나 눈에 띄면 그거 옮기느라고 책상을 뒤엎고. 작업하다 보면 어질러지는데 꼭 다 정리를 해야 하고. 근데 정리가 안 돼 있을수록 창의성이 높을 확률이 높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 ‘이래서 내가 창의성이 없나’ 생각이 들더라고…


브로콜리 창의성이 높은 사람은 어지럽다. 어지러운 사람은 창의성이 있다…


트레비 그치. 창의적인 사람이니까 어질러져 있을 수 있는 건데, 난 창의적이지 않아서 정리하고 있구나… 근데 딱 보기에는 좋잖아!


브로콜리의 책상


책상 앞에 브로콜리가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 전체적으로 어두운 방 안에 책 상 전체를 가로지르는, 가로로 긴 스탠드가 켜져 있다. 책상 위에는 왼쪽부터 책, 겉옷, 모니터, 필통이 놓여져 있다. 책상 오른쪽에는 잡다한 물건이 수납되어 있는 철제 수납장 그리고 책으로 가득 찬 낮은 책장이 놓여져 있다.

유령 스탠드가 탐나네


트레비 저 스탠드 참 좋아.


브로콜리 이렇게 찍어놓으니까 되게 뭔가 열심히 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사실 여기 애인 집이야. 석사 졸업하고서는 기숙사가 날아간 상황에서 공부하고 작업할 공간이 없어진 상황이었어. 어쩌다 보니 애인 집에 방이 남아서 작업실처럼 쓰게 되었어. 잠도 잘 수 있긴 한데, 뭔가 작업을 위한 공간이 있다, 나만의 공간이 있다, 이 느낌이 참 좋은 것 같아. 책상도 넓은 걸 사고 모니터도 가져다 놓으니까 너무 마음에 드는 상태.


트레비 그럼 여기가 서울집인 거야?


브로콜리 애인집은 경기도 북부야.


트레비 그러니까 일단 경기 북부에 작업 공간이 있고, 또 들어가게 될 기숙사는 저 멀리 경기도 남부에 있고…


브로콜리 경기도 북부와 남부, 다이나믹한 이동을.


아메 진짜 경기 서울 전체를 아우르네.


아메의 책상


아메의 책상을 가까이서 찍은 사진. 책상 뒤로는 책으로 가득찬 큰 책장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책상 가운데에는 책이 올려진 독서대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찻잔과 차 주전자가 놓여져 있다.

브로콜리 우와. 너무 멋있다.


아메 지금은 벽면이 다 책장이고… 책상은 일부러 큰 거를 샀어. 사람들 부르거나 술도 마시고 하니까. 그리고 책상 위에 먹을 것과 마실 것들, 차 같은 걸 막 쌓아두고 있거든. 여기서 산 지 4년째인데, 이전 집에서는 침대랑 작업 공간이 같이 있었거든.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해서 지금은 투룸인데 작업 공간이 훨씬 크고 자는 방은 옷을 때려 넣어서 되게 작아.


유령 자는 곳이랑 작업 공간을 분리하는 건 중요한 것 같아.


유령의 책상


유령의 책상을 찍은 사진. 책장 왼쪽부터 모니터, 노트북 거치대 위 맥북, 스탠드, 공책, 물컵, 이리저리 펼쳐진 책들과 필통이 놓여져 있다. 책상 뒤 벽면에는 메모지가 여러 장 붙어있기도 하다.

유령 이게 집인데, 이거는 프로포절 발표 일주일 전 상태. 책상이 폭탄 맞은 상태인 게 너무 웃겨서 찍어놨어.


브로콜리 아니 이게 폭탄이라니. 나는 평상시에도 훨씬 어지러운데.


유령 근데 확실히 집에서 주로 하다보니까 학교 연구실은 텅텅 비게 되더라고.



# 집과 연구실, 그리고 골칫덩이 책들


유령 궁금한 게 있어. (외부)연구실을 쓰기 전에 집에서 공부를 제일 많이 했었고, 집에 책을 두니까 학교 연구실은 잠깐 머무르다가 집으로 가곤 했어. 뭔가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두 개가 되었을 때 한 쪽에서만 하게 되고 나머지 하나는 잘 이용하지 않게 되더라고. 트레비는 집에도 책상을 잘 만들어 놓고 연구실도 잘 해놓았던데, 이동하면서 공부하는 데에 문제는 없어? 둘 다 잘 쓰고 있어? 나는 그 분배가 어려워서 한 쪽에만 틀어박히게 되는데…


트레비 나는 집에 잘 해놓으니까 연구실 안 가면 집에서 하면 되지, 하고 안 가기도 하거든. 근데 집에서는 퍼지기 쉽잖아. 나는 방에서 하는데 바로 뒤에 침대가 있거든. 스르륵 하면 바로 누워버릴 수 있는 거고… 그래서 연구실에서 되도록 하려고 하는데, 연구실에서 밤을 샐 수는 없고 어쨌든 집에는 돌아와야 하고, 집에서도 작업을 해야 하니까 그때 편하려고 집 책상에도 모니터를 두고, 이것저것 가져다 두다 보니 하나씩 생기더라고. 공간에 대한 애착이 있다 보니까 막 꾸미게 되고 그런 것 같아. 허전한 상태를 잘 못 견디는 것 같아.


브로콜리 아메는 두 곳 이상 공간을 이용한 적 있어?


아메 지금은 학교에서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 코스웍을 할 때는 텍스트가 정해져 있으니까 사실 장소가 중요하지 않은데, 본격적으로 작업을 해야 할 때는 이거 보고 저거 보고 해야 하니까 책이 많이 있는 공간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학교 연구실에도 책장을 더 추가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


트레비 맞아. 두 개가 되면 불편한 게, 내가 연구실에 있을 때 필요한 책은 집에 있고, 집에서 필요한 책은 연구실에 있고… 책을 들고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게 불편해.


브로콜리 나는 석사과정 때 학교에 따로 연구실이 없어서, 경기 남부에 있는 학교랑 서울에 있는 자취방을 오고 가며 작업을 했어. 도서관에서는 마음대로 밤을 새우기도 애매하고, 밤새서 아침에 기숙사로 돌아가면 기숙사 룸메이트는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는 자야 되고… 이런 게 안 맞으니까 석사논문을 거의 서울 집 근처 스터디 카페에서 썼어. 그게 쉽지는 않더라고. 책은 다 기숙사에 있는데 그거를 서울에 올 때마다 이 책 저 책 보따리처럼 싸가지고 오고, 또 이건 기숙사에 있는 책을 봐야 하는데 이러면서 못 보고, 못 쓰고. 확실히 책이 어디 있는지가 연구 공간 여럿 이용할 때 가장 큰 부분인 것 같아.


유령 그러면 다들 작업 공간을 어떻게 쌓아 올렸어? 언제부터 그런 공간들이 생기기 시작한 건지…


아메 몇 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면서 새로운 게 들어오고 그런 느낌이야. 차곡차곡 쌓인 책들은 학부 때부터 쌓아놓은 것들.


브로콜리 이사할 때 너무 힘들잖아.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사람을 부르는데, 그분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책이 얼마나 있는지 사진 찍어서 보내주는 게 기사님에게 중요한 정보더라고.


아메 지금은 책상의 한 3분의 2가 책으로 쌓여 있어서 감당이 안 돼. 책장에 더 들어갈 공간도 없고. 박사논문을 쓰면 이사를 해야지, 18평은 되야겠다 생각을 하고 있어.


유령 책을 수용하기 위해 평수를 늘리는 거네


브로콜리 맞아. 책이 제일 문제야.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책 사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트레비 나는 스트레스를 안 받아도 사는데 어떡하지? 오늘도 책 한 권이 배송 올 거야.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야… 아무튼 어쩌다 보니 책이 너무 많아졌는데 이사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브로콜리 일단 사람을 부른다. 근데 만약 부르지 못하면 꿀팁 하나. 나눠 담아야 해. 한 박스에 책을 몰아 넣으면 안 돼. 책을 밑에 깔고 옷을 넣고, 주방 기구를 넣고 이런 식으로 해야 해. 책만 넣은 박스는 못 들어.


트레비 맞아.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하면 책을 많이 사기 어려울 것 같아… 잘라서 스캔해야 하나 싶고.



# 어쨌든 모이면 무언가가 시작돼


유령 늘 작업 공간이 여러 개일 때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고민을 계속 하면서 학교를 다녔어. 최근에 연구실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장비가 생겼는데, 모니터가 정말 중요하구나 싶었어. 공부는 장비빨이라는 걸 너무 느끼고. 확실히 모니터가 생기니까 본거지가 집에서 연구실로 옮겨졌어. 지금 집 책상은 먼지만 쌓이고 있어. 아무것도 없고.


트레비 그럼 왜 처음에 학교 연구실은 잘 못 썼던 거야?


유령 학교 연구실에서 사람들이랑 같이 공부하는 게 처음이다 보니까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 다들 뭐하는 지 공유가 되는데, 사람들 있는 데서 글을 완성하는 게 왜인지 나한테는 어려웠거든. 그래서 어디서 마감을 많이 쳐보느냐, 그 경험이 누적되는 게 약간 그 공간이 편해지는 데 중요한 것 같아. 또 학교 연구실에 있어도 관계를 내가 만들어 가야 하잖아. 같이 스터디를 하거나 모임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어. 또 학부 전공이 석사 전공이랑 많이 달라서, 대학원에 와서 글 쓰고 토론하고 이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실 문화에 섞이는 게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브로콜리 나는 공대 대학원을 1년 정도 다녔거든? 공대에는 랩실이라는 개념이 있고, 거기서 모든 게 이루어지잖아. 책도 연구실에 다 꽂혀 있어서 서로 돌려 보고, 마감치는 것도 밤 새는 것도 모두 연구실에서 할 수 있는 시스템이지. 샤워실, 화장실, 라꾸라꾸 다 있고… 그래서 그때는 연구실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어. 그냥 들어가면 당연히 자리를 주니까. 그런데 인문사회 쪽으로 전공을 옮기니까 공간 하나가 굉장히 중요하고 크다는 걸 느꼈어. 공간 하나를 마련하고 얻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전공별 연구실이 없거든. 도서관에 따로 매 학기 신청해서 개인 자리를 얻어야 하는 거야. 자리를 얻는 게 계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


트레비 연구 공간이라는 게 당연하게 있는 게 아니잖아. 나는 석사 때도 학교에서 따로 연구실을 주는 건 없었어. 그냥 모든 대학원생들이 쓰는 공간 하나가 있었지. 근데 내가 다니던 학과의 연구소 안에 딸린 사무실 자리를 얻었고, 거기를 연구실처럼 사용했어. 근데 지금은 학교를 옮겼는데 여기엔 브로콜리처럼 도서관에 딸린 개인석들이 있는 거고. 그러다 보니 학교를 안 가게 되고… 같은 학과생들끼리 사용할 수 있는 연구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어쨌든 학과 별로 있으면 그 중심으로 모이게 되니까. ‘과방’ 느낌처럼. 근데 지금 학교에는 그런 구심점이 될 공간이 없으니까 누군가가 깃발 들고 ‘모입시다!’ 하지 않으면 모이기가 힘들어. 그런 사람도 없어지면 완전히 와해가 되어버리고. 공간이 참 중요한데, 학교에서도 그런 공간을 마련해주기 어려워 하고. 공대에는 랩실이 잘 되어 있고 자원들도 많이 투여가 되지만 인문사회쪽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공간을 따로 주는 경우가 좀 드문 것 같더라고.


유령 나도 석사과정 2년을 다니면서 매 학기 분위기가 달랐던 것 같아. 연구실에서 사는 듯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많이 모여서 딱 하는 분위기가 되고. 근데 그런 사람이 없을 때는 출석율이 안 좋아지는 것 같긴 해. 근데 확실히 공간이 있으니까 거기 모여서 밥도 먹고 같이 얘기하고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면 확실히 교류가 일어난다는 느낌은 있어.


아메 나는 학부 때 대학원생들이랑 세미나를 많이 해서 대학원 연구실에서 책 읽는 경우도 많았어. 논문 쓰는 사람들은 연구실에서 대충 도시락 싸오거나 밥 먹고 그랬어. 서로 반찬 가져 와서 냉장고에 때려 넣고, 같이 먹고, 같이 책 보고 세미나 하고 그랬던 것 같아. 좀 나이가 있는 대학원생들이 이거 챙겨주고 저거 챙겨주고 하면서 관계들이 만들어졌던 것 같아.


브로콜리 그래서 지금은 여기 연구실에 나온 지 얼마 안 됐지만 오랜만에 따뜻한 느낌을 받아본 것 같아. 밥 드세요. 같이 밥 먹으러 갈까요? 공대 랩실에서 느꼈던 거기도 한데, 안정된 공간이 있다는 느낌이 거기서 오는 것 같아. ‘저희 밥 먹으러 갈까요?’ 이 질문 하나가 되게 큰 안정감을 주는구나.


트레비 맞아.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계속 이루어져야 하고, 뭐 공부 얘기를 하든 뭐든 자꾸 자기 관심사를 얘기하게 되는 경험들을 하게 되는데, 모이지 않으면 그런 걸 공유할 기회들이 없어지는 것 같아.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 부분을 보충하는지 궁금했던 것 같아.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도 구심점이 되어주던 선배들이 없어지고 나서는, 학생들끼리 자기 연구에 대해서 잘 얘기 안하고 그러다 보니까 좀 낯설었던 것 같아. 특히 대부분 다 석사생들인데, 대학원이 사실 (학술적으로는) 유일한 커뮤니티인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사람들의 경험이 되게 제약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 그러다 보니 그런 공간이 주어지는 곳의 학생들이 여러모로 긍정적인 경험들을 할 기회들이 많겠구나 싶었어.


브로콜리 누군가 작업하고 있으면 그 사람 앞에 책이 펴져 있고 모니터에 뭔가 띄워져 있잖아. 뭔가 보고 물어볼 수 있는 게 생기고, 책장에 꽂힌 책을 보고 책에 대한 얘기를 할 수도 있는 거고. 이런 부분에서 공간이 주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 문득 가지게 된 느낌인데,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대학원생들의 경우엔 서로 연구 주제를 물어보는 걸 약간 껄끄러워 한다고 해야 하나, 그걸 묻지 않는 게 에티켓인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어. 근데 가끔 선배가 와서 후배들에게 ‘관심 주제가 뭐야?’라고 물어보고, 같이 얘기하는 분위기를 일부러 만든다거나 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어. 만약 공간이 있으면 다 눈앞에 펼쳐져 있고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이걸 말할 기회가 확실히 생기는 것 같아.


트레비 물론 공간이 없어도 하려면 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 근데 없으면 더 노력을 해야 하는. 일부러 약속을 잡고, 일부러 만나서 얘기를 해야 되고 이런 노력들이 추가되다 보니까, 대학원 사람들이랑 관계를 맺는 게 부담이 되는 게 있었어. 그래서 좀 아쉬웠던 것 같아.


아메 그래서 대학 바깥에 자리나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는 늘 있었던 것 같아.


트레비 맞아. 대학 밖 학술단체나 여러 모임들처럼 그런 떠도는 사람들을 모여서 뭘 해보려고 하는 것들이 늘 있었던 것 같아. 학교가 그걸 제공을 잘 못해주는 측면들도 있으니까, 늘 무너지기 쉽다는 것도 있고. 학과의 전통이니 관례이니 하는 게 구심점이 되던 선배가 졸업하고 떠나버리고, 누가 주도해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면 그대로 끝나버리니까.


아메 그러다 보니 요즘은 SNS를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


트레비 동료가 만들어지기 참 어렵다.


유령 그럼 브로콜리는 스터디 카페에서 주로 논문을 썼다고 했는데, 그런 동료들을 별로 만나지 못하고 썼던 거야?


브로콜리 같이 작업을 하진 않았는데, 내 친구가 박사논문을 쓰고 있을 때였어. 그래서 친구랑 같이 주고받으면서 서로 봐주는 식으로 할 수 있는데, 그건 행운처럼 우연하게 생긴 관계고. 보통은 그런 게 흔하게 있진 않잖아. 그러니까 동료들을 찾아야 하는 거고. 근데 공간이 없으면 그런 동료가 자연스럽게 생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



#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학위논문을…


브로콜리  갑자기 재미 있는 일화가 떠올랐다! 석사과정 중에 성소수자 관련 연구를 할 때 내가 좋아하는 동네 카페에서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 카페가 교회 손님이 엄청 많았어. 전도사님들 맨날 양복 입고 와서 커피 마시고, 교회 다니는 분들 와서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왜 우리 교회 목사님이 더 격렬하게 반대를 안 하시는지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하고. 나는 그 옆 테이블에서 책 읽으면서 ‘게이… 퀴어…’ 이러고. (일동 웃음) 읽으면서도 카페 말고 다른 조용한 공간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트레비  적대적인 공간이었네.


브로콜리  그리고 감이 있잖아. 확증은 아니지만 교회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 보니 카페 사장님도 교회 다니시는 것 같은데, 그 카페 사장님 앞에서 맨날 ‘게이…’ 그런 책들 읽는 게 약간 눈치 보였어.


트레비  교회 사람들도 지피지기 해야지.


브로콜리  불편하다, 어디 딴 데 가고 싶다 이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네가 날 좀 참아야지!’ 이러면서 일부러 더 그러고. 이런 기억이 갑자기 났어.


아메  맞아. 나 아는 선생님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데 자기 지도교수가 박사논문 쓸 때 내전이 일어났다고 해. 내전 상태에서 집에 처박혀서 논문을 썼다고… 그거 보고 함부로 핑계 대면 안 되겠다 싶었어.


브로콜리  그런 상황에서도 박사 논문을 쓰는 건가


트레비  세상이 무너져도 논문은 쓰여야… (웃음)


아메  어디까지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쓸 수 있는 것일까?


트레비  일단 밖에 못 나가니까 쓰게 된 걸까. 그냥 가둬버려서.


(2부에서 계속)



글. 트레비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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