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고민이 둘이 되어도 좋은 이유: 문화연구포럼 라운드 테이블 후기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2일 전
- 3분 분량

학교는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다. 8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지금껏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석사과정에 들어오고부터는 학교가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한 이상 앞으로 학교는 배움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일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는데도, 학교와 나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며 여러 가지 고민이 증폭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건 학교를 떠나지 않는 일이 될까? 계속 공부하면 학교 안팎에서 벌어먹고 살 수 있게 될까?
우연히 이런 고민을 환기할 기회를 가지게 된 건 지난 1월에 열린 문화연구포럼에서였다. 포럼의 마지막 순서는 기획 세션이었던 라운드 테이블이었다. 지난해에 결성된 신문연의 ‘비판적 청소년 연구’ 분과에서 기획에 도움을 주셔서 ‘학교, 정상성의 재생산’이라는 주제로 대담이 꾸려졌다. 이번 라운드 테이블에 독특한 점이 있다면, 패널로 연구자 대신 각기 다른 현장에서 학교, 교육, 정상성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계신 분들을 초청했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학교라는 공간에 접속하고 계신 분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에서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을 만나는 현민 선생님(성소수자교사모임 QTQ)과 맹수용 선생님(전국역사교사모임), 규범적인 과학 지식 체계 내에서 성소수자와 관련된 쟁점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고민하는 도치님(한국이공계게이연구자모임 기묘한연구소), 학교 밖 청(소)년들과 만나고, 학벌주의 철폐 운동을 전개하는 연혜원 활동가님(투명가방끈),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동생의 탈시설을 지원하는 언니로서 학교와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지역위원장 장혜영 전 의원님이 라운드테이블 패널로 참석해 주셨다.

내 이야기 같아 가장 공감이 되었던 건 대학원생이면서 동시에 학벌주의 반대 운동을 하시는 연혜원 활동가님의 이야기였다. 누군가는 대학원생이 학벌주의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을 테다. 대학원과 학벌주의 반대 운동은 언뜻 보아 모순되는 조합 같기 때문이다. 한국 학벌주의에서 핵심은 ‘대입’인 만큼,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야 진입할 수 있는 대학원은 이미 그 구조의 이익을 누리고 있는 영역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그러나 대학원에서도 여전히 학벌주의의 문제는 심각하다. 어느 연구를 했느냐보다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가 연구자로서 생계를 꾸리는 데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교수가 되려면 국내 박사는 안돼’. (인문사회계) 대학원생이라면 하도 들어서 익숙해졌을 이 말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학벌주의는 대학원에서도 어김없이 누군가는 선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머지는 선 밖에 내버려둔다. 그렇다면 선 바깥으로 밀려나고 나서도 살아 나갈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을까?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대학에서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이 바로 학벌주의 반대 운동과 대학원을 연결한다.
학벌주의의 자장 안에 있는 것은 다른 ‘학교’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입을 앞둔 중고교 교육과정은 사실상 ‘수능’이라는 귀결점을 향해 짜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신체 건강하고, 이성애적이고, 집에 별다른 불화가 없어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중상위 계급 학생들에게 맞춰져 있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학생을 지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중고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두 분은 지도의 무대가 되는 ‘학교’에 대한 고민을 나눠주셨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계급적 배경이 어려운 학생들과 더 갈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맹수용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안타까움과 속상함에서 비롯되는 ‘너희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해’라는 지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교육과정 속에서 좌절하고 이탈하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학교가 그 자체로 제도권 안팎을 구분 짓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떻게 관리되고 있을까? 장혜영 전 의원님은 국회에서 학교와 교육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회고하셨다. 첫째는 수능에 대한 논의이고, 둘째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교육정책을 사소하게 조정하는 것이다. 그 외에 현재 교육 과정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편향은 무엇인지, 다른 교육 과정을 상상하고자 할 때 거기에 반영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의제화조차 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우리가 학교를 통해 배우게 되는 ‘정상’, ‘보편’, ‘평범함’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각기 다른 ‘학교’들에 관한 고민을 우리는 정상성, 재생산, 학벌주의라는 키워드를 통해 나눴다. 물론 각각의 고민은 서로 층위도 달랐고, 무엇보다 서로의 이야기가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는 점을 짐작하고,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 확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무언가 해소되는 감각이 들었다.
대학원생이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관성적으로 신세 한탄을 하게 될 때가 있다. 학기가 지날수록 등록금은 야금야금 오르는 반면, 졸업 후의 미래는 불투명하게 느껴질 때 그렇다. 공부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막막함은 결국 내가 이 길을 선택했기에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은 내 선택에 따르는 책임일 뿐인 걸까? 이런 고민이 들 때면 오갈 데 없이 답답한 기분이 든다. 신기했던 것은, 이 답답함이 나와는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학교와 얽혀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히려 누그러졌다는 점이다. 대담을 들으면서 나의 고민을 상대화해 보는 일은 나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던 정신을 번쩍 깨워주었다. 나의 문제가 상대화될 수 있다는 것은 내 문제가 타인들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을 깨달을 때, 고민에 접근하는 시선을 한 번씩 재정비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라운드 테이블에서 기억에 남았던 것은, 앞선 발표 세션까지만 해도 발표자와 토론자로 나섰던 연구자들이 청중으로 물러나 모두 함께 대담을 듣는 장면이었다. 학술 행사는 애초에 학교와 전공의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연구자들이 모이는 자리이다. 다만 이번 포럼에서는 학교와 전공의 경계뿐만 아니라 학술장이라는 경계 역시 가로질러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시도만으로도 앞선 세션에서 오갔던 발표와 토론이 좀 더 풍성해지는 듯했다. 우리가 여기에 모여서 연구를 발표하고 토론하듯이, 이 바깥에도 치열하게 각자의 일을 하는 이들이 있구나. 우리는 사회의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구나. 이런 사실을 환기할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부여하는 의미와 방향성을 재정비하게 된다. 이번 포럼의 라운드 테이블은 그런 환기구의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다.

글. 권오경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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