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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먹] 제주에서 사회학하기

최종 수정일: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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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사회학을 한다는 건 여러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일이다. 부분적으로 이는 제주가 서울과 물리적으로 단절된 섬이자 관광지라는 이유로 인해 발생한다. 제주에서 학술행사를 기획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부분 중 하나는 육지에서 오신 손님들의 숙소와 식당 예약이다. 공항에서 행사장과 뒤풀이 장소까지 동선을 체크하고 이동수단을 세심하게 챙겨야 한다. 행사 다음 날에 ‘투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 그러다 보니 여행사가 하는 일이랑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느냐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행사로 연을 맺게 된 분들에게는 뭔가 맛집이라도 알려드려야 하진 않을까 하는 책임감도 들고. 이미 많은 ‘신진’ 연구자들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제주에서의 학문하기 역시 많은 보이지 않는 노동을 감내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때로는 ‘제주’ 연구자가 될 것을 요구받기도 한다. 제주의 ‘현장’을 연구하고 육지 연구자들에게 제주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제주를 방문한 연구자들의 눈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육지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나 그런 이유로 인해 대안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들이다. 비단 육지 연구자들과의 관계 때문은 아니다. 제주에서 연구자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애정어린 조언을 가끔 듣곤 한다. 누군가는 해녀와 4.3을 말하고, 누군가는 강정과 제2공항과 관련된 투쟁 현장을 이야기한다. 이런 것들을 육지에서 온 이주민 연구자들이 주도하기 보다는 나처럼 제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연구자들이 한다면 더욱 좋지 않겠니… 진정한 제주 연구자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이 글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에게 요청되는 제주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제주에서 공부를 하면서 다시금 발견한 제주에 가깝다. 그것은 학술장의 변방으로서의 제주이다. 학술장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연구자들의 업계, 연구자들의 현장에 주목하자는 의미에서이다. 알다시피 제주는 서울 중심의 학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물리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많은 지방대 대학원들이 그런 것처럼 학계에서 활동하는 전문적인 연구자를 길러내는 공간임과 동시에 일종의 시민교육 내지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이 된다. 그래서인지 스스로를 연구자로 정체화하기를 주저하거나 박사과정 진학 후에도 논문을 써야 하는지 자체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유학을 고민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제주에서 경영학도, 행정학도 아닌 사회학을 한다는 것은 … 전문 사회학자가 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간의 사회생활 내지 활동을 잠시 멈추고 지난 시간을 반추하고 숙고의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차원에 가깝다. 나 또한 딱 그정도의 기대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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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학술장의 변방이라는 이 조건이 내가 연구자로서 성장하는 데 매우 긍정적인 조건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내가 속해 있는 학술장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학계와 멀리 떨어져 있어 여러 현실과 사정에 밝지 않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학계의 자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 무지함 덕분에 내가 연루되어 있는 학술장의 지적 관행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학술지에 투고한 첫 번째 논문은 라클라우 사상을 수용해 왔던 한국의 비판적 인문사회과학계에 대한 연구였고, 두 번째는 서구의 지식체계에 대한 종속과 자본과 국가 권력에 대한 종속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해 왔던 김경만 교수와 한국의 비판사회학자들 사이의 논쟁에 대한 연구였다. 둘 다 학술적으로는 엄밀하지 않은 투박한 연구이지만,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장에 대한 ‘현장 연구’라는 점은 덧붙이고 싶다. 많은 경우 현장에 대한 이야기는 그러한 현장과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제주라는 조건이 그런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했다.
변방이라는 조건은 사회학하기, 학문하기에 대한 숙고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논문을 꼭 써야 하느냐를 고민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논문을 반드시 써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이 어렵고 비효율적이고 즉각적인 성취도 없는 일을 왜 해야 할까? 기존 연구 검토를 하거나 다른 논문들을 인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논문을 쓰면 누가 읽을까? 이런 것들을 알려줄 선배는 없었지만, 운좋게도 좋은 동료들을 만나 나는 이 질문들을 대학원 과정 내내 고민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갈 수 있었다. 이런 고민들이 당장 탁월한 전문 연구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느리더라도 지반을 탄탄히 다지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제주에서 사회학을 하기로 한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졸업을 하고 나니 제주에서 살 것이냐, 서울에서 살 것이냐고 묻는 분들이 많다. 잘 모르겠다. 그곳이 어디든 나는 제주에서 배운 것들을 간직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한 사람의 특수한 경험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각자의 위치를 돌아보며 (학술장의 변방이 아닌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를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에 글을 썼다. 오늘날 학술운동과 학술정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과연 그런 운동과 정치가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지역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늘 어렵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준비가 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고 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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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현우식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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