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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먹] 내일의 스승님들, 비온 뒤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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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들은 이번 탁상공론을 읽으면서 어딘가 비어 있다는 느낌, 생생함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편집 과정에서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많이 생략되었다. ‘제도’나 ‘일’처럼 추상적인 것에 비해, 구체적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누구 이야기더라”는 식으로 특정될 수도 있고,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처럼 뜻하지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말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마냥 “우리 교수님 짱짱 최고예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라고 찬양할 수도, 그런다고 “교수님 나빠요 다시는 보지 맙시다”라고 단칼에 정리할 수도 없을 만큼, 모호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애증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애’와 ‘증’이라고 하기엔 강렬하지도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마 탁상공론에서 다뤄왔던 학술대회, 학회, 학술지 등등도 다 비슷할 것이다. 그것들은 제도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탁상공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교수님은 원래 그런 분이니까…”였다. 어쩌면 이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학생은 원래 그런 애니까…”).


10호 탁상공론 “오늘의 지도교수님, 맑은 뒤 흐림”을 편집하면서, “대학원에 처음 들어와서 누군가와 스승-제자 관계가 된다는 것이 신선하다, 혹은 신기하다고 느꼈다.”라고 썼다. 아직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말하자면 안정과 불안을 오가는 감각이었다. 나의 성향 탓도 있겠지만, 업무나 연구에 있어서 사소한 실수를 하거나 낮은 평가를 받을 때면 내 자질에 대한 불안감이 확 엄습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나봐’라는 자기비하보다도, 나에게 실망한 교수님이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 더 이상 일을 같이 못하겠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에 가까웠다. 신뢰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 속에서, 그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관계에 충실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평가를 받는 위치’였고, 그 평가에 따라 내 앞으로의 진로가 크게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전히 스승과 제자라는 표명된 관계 속에서 필요한 케어를 받을 수 있다는 안정감이 공존했다. 내가 좀 미숙하고 실수하더라도 내가 아직 과정생이며 또 지도제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암묵적인 양해가 존재했다. 내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관계가 바로 종료되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제자’라는 바운더리 안에 있을 수 있었다. 내가 탁상공론 자리에서 ‘가부장’이라고 표현한 것도 정확히 그런 의미였다. 학생과 교수가 서로 ‘능력’을 주고받을 뿐이며 그 계약을 준수하지 못하면 실망하고 파기하는 식의 관계는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탁상공론에서의 말들이 모든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를 담아내지도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교수님과 대학원생들이 있다. 두호나 매실처럼 양가감정을 가질 수 있고, 화분처럼 지도교수에게 논문 지도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교수는 일상의 너무 깊숙한 곳까지 관여하려고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 학문적 견해를 좁히지 못해 갈등할 수도 있다. 학계에 자리 잡은 연구자와, 이제 막 학계에 발을 딛으려는 신참의 관계만 있을 뿐 그 이후는 모두 열린 결말인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다른 관계의 모델이 존재할 수 있는지 고민이 든다. 인간적으로 우리는 정형화되지 않은 다양한 관계를 모색해볼 수 있지만, 제도적으로는 여전히 도제 시스템이 존재한다. 지도교수의 역할, 책임, 혹은 권한은 단지 대학원생의 학위 논문 지도에만 그치지 않는다. 각자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느냐에 따라 교수는 대학원생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도, 혹은 착취하거나 부당하게 퇴출시킬 수도 있다. 꼭 성과와 관련된 것이 아니어도 대학원생은 심리적으로도 취약해지기 쉬운 위치에 있다. 어떤 부분에선 이 관계의 형태가 많은 경우 교수의 선의에 달려 있기에, 단지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만 말할 수 없는 난점도 존재한다. 여기서 어줍잖게 새롭고 대안적인 모델이나 ‘바람직한 관계론’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지금의 시스템이 대학원생들을 ‘홀로 남겨진 개인’으로 남겨두지 않고 어떻게든 관계 안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도 존재한다.


다만 나는 늘 깊이 연루되는 느낌이 들 때마다 한 발자국 물러서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동시에 교수님도 계속해서 거리를 조절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서로에게 ‘선’이 있다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서로 지켜야 하는 ‘선’을 알려면 늘 ‘바깥’이 필요하고, 다른 관계들이 필요하다. 교수님 앞에서는 계속 긴장하게 되면서도, 어떻게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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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스승-제자 관계가 꼭 지도교수와 지도학생에 국한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지도교수님에게 많은 걸 배웠지만, 그만큼이나 다른 선배나 동료들로부터도 배웠다. 그래서 교수님보다도 선배와 동료 들을 더 많이 자랑하고 싶기도 하다. 이들은 나에게 늘 제도의 ‘바깥’이 되어주었다. 그런 ‘바깥’이 있기 때문에 한 쪽의 관계에만 매몰되지 않고 균형을 지킬 수 있었다. 앞으로 이런 관계들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감정을 직시할 수 있을 때에야, 이 관계의 형태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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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곰탕

편집.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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