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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 글을 왜 그렇게 많이 쓰느냐는 물음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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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 글을 많이 쓰는지 글을 써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고민해보니 단답으로 설명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고, 매끈한 서사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다소 중언부언이 될 지라도, 글쓰기와 연구가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얘기해본다면 나름의 대답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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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보잘 것 없는 언어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드문드문, 그 질문에 가슴을 펴고 대답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삶 전체를 보상받는 기분을 느낀다. 사람에게 대개 최상의 위로란 그가 겪은 억울함이나 고생 따위를 타인이 잘 알아주는 순간을 만날 때일 것이다. 물론 그것도 큰 위로의 순간이지만, 나는 타인이 알아주는 것보다 그저 내가 써내려간 언어가 누군가의 마음을 풀어주어 그가 ‘마치 자신의 언어’인 것처럼 여겨게 되는 순간에 더 큰 의미와 위로를 받는다. 내 삶의 궤적 전체를 충만한 의미로 보상받는 기분을 느낀다.


‘연구자’란 단어를 생각할 때면 늘 ‘무당’을 떠올린다. 무(巫)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춤을 추는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글자로 알려져 있다. 곧 무당은 하늘과 땅을 매개해 연결하고 사람의 이야기를 온 세상에 울려퍼지게 하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언젠가 본 만신, 고 김금화의 굿을 떠올려 본다. 이 땅의 큰 비극 앞에 늘 호출되어 억울한 혼을 달래고 위로하는 삶을 살았던 그의 목소리와 몸동작을 보며, 나는 그것이 연구자나 활동가와 무어가 다를까 구분할 수 없었다.


언젠가 지역의 활동가들이 대거 참석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학술대회에서, 밤을 새며 준비해 간 이야기에 ‘우리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아서 기뻤다’며 감동 섞인 반응을 받았다. 차근차근 논지를 밀고 나가다 보면 아직 세상에 별로 쓰여진 적 없는 주장에 도달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아래 같은 문장이다.

 

‘위안부’ 운동을 ‘보편화’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지역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지역의 관점에서 보편의 논의들을 재검토해 볼 수 있다. 왜 지역의 운동적 경험과 성과는 늘 주변화되는가? 가령 “‘위안부’는 지역 문제다”라고 왜 말하지 못하는가.

 

다소 거친 문제의식이지만, 아주 새롭게 대단한 발견인 것도 아니다. 이미 사람들이 해놓은 것, 하고 있는 것이 가진 의미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저 정돈된 문장을 써가며 사람들을 긍정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내가 받은 호의적 반응과 평가는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라, 나에게 그런 언어와 문장을 쓰게 만든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나에게 칭찬과 감동을 표현하는 바로 당신들을 향해야 맞을 것이다. 연구자가 무당이라면, 무당은 그저 매개하고 연결하는 사람일 뿐이다. 원통함을 가득 안고 살아왔던 영혼과 그 슬픔에 응답하며 눈물을 흘리는 군중들이아말로 굿의 주인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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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판타지 장르의 콘텐츠에서 마법은 주문의 영창(詠唱)으로 발동된다.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 연대기에서 대상의 이름에 대한 앎은 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근거이다. 타인의 진명(眞名)을 알게 되면 그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 이렇듯 언어는 마법에 관한 상상에서 필수적 요소로 상상된다.


여기에는 언어가 지닌 신비하고 놀라운 마법적 힘에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언어는 그 자체로 대상을 정확하게 지시하기도 하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수행적 힘을 지닌다. 평이하고 연속적인 일상을 초월해 비일상의 마법적 순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언어의 마법을 생각할 때면 나는 늘 청소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 내 취미는 ‘걷기’였다. 인적이 끊기고 넓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마저 드문 밤길을 오래도록 걸어다녔다. 당시 겪었던 우울, 괴로움, 부당함, 폭력 등에 관하여, 나는 땅을 밟으며 계속 질문하고 곱씹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어느샌가 질문이나 문장으로 마음이 정리가 되고는 했다. 돌이켜보면 누가 알려준 적도 없건만 나의 체험과 감각을 언어화하는 훈련의 과정을 스스로 체득했던 셈이다.


그런 나에게 어떤 책들은 내 체험과 감각을 설명하고 개념화하는 일종의 원체험을 제공해주었다. 책과의 만남은 언어에 해방적 힘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려주었다. 언어가 지닌 해방적 힘에 대한 대표적인 논의로 파울로 프레이리를 들 수 있다. 그는 인간해방을 위한 교육으로서 앎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합을 프락시스praxis 개념으로 벼려냈다. 감각과 언어가 상호 교차하며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해상도를 높이고,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의미 있는 앎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해방적 언어. 문화적, 언어적 자원이 극히 제한된 어린 시절의 좁은 세계에서 그런 언어를 마주하는 경험은 그야말로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마법의 순간과 같았다. 만약 아주 우연한 계기들로 청소년기에 그런 언어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껏 살아있었을까?


그런 나에게 연구자라는 업은 단순히 좋아하는 일 또는 밥벌이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연구자란 무엇보다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마법적 힘을 가진다면, 언어를 다루는 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마법적 권능을 사용할 책임이 있다. 언어야말로 사회적인 것이고,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직업 역시 사회가 내게 제공해 준 것이라면, 내가 받은 걸 사회에 되돌려줌으로써 권능에 대응되는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살아있기 위해 단련해 온 언어화의 근육이 이제 타인에게 해방적 언어를 전해주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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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회학은 그 학문으로서의 목적 또는 방법론적 지향과 관련해 대체로 두 계열의 전통으로 거칠게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막스 베버가 주창한 ‘이해의 이해’와 같이,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주관적 이해를 서술하고 분석하는 ‘해석적 전통’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현상과 그 이면의 구조 사이 관계를 인과적으로 해명하는 ‘설명적 전통’이다. 나는 주로 후자의 전통에서 공부를 해왔지만, 그러나 언어가 내게 해방의 순간을 가져다 준 경험을 돌이켜 본다면 해석과 설명은 그다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감각과 이해를 언어화하는 것과, 나를 둘러싼 세계의 구조를 해명하는 것은 그 선후가 뚜렷하게 나뉘지 않는 연속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해석과 설명에 ‘각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를 더 추가해 보고 싶다. 공적인 언어는 언제나 사회적 기록으로 기능한다. 누군가의 사연과 감각은 공적인 언어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하기에 의미 있고 주목해야 할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 대영도서관에서 여성을 다룬 책 중 여성 스스로가 쓴 책을 단 한 권도 찾을 수 없었다고 썼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영 제국이 생산한 문서로 가득한 인도의 아카이브를 뒤지며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그런 의미에서 연구자는 언어로서 이 세계에, 그리고 공적인 기억과 역사 속에 누군가의 존재를 각인하고 기록을 남긴다.


널리 알려진 공적인 논쟁을 상기해보자면, 나는 문재인 정부 시기 조국 사태와 박원순 사태에서 수도 없이 글을 썼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당시의 수많은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그 삶과 존재를 ‘부정denial’하는 폭력이기 때문이었고, 도저히 그 폭력을 견딜 수 없었던 탓이다.


가령 조국 사태에서 ‘공정’ 담론은 청년세대를 과잉대표함으로써 중산층의 서울 주요 대학 출신이 아닌 이들의 목소리마저 앗아갔고, 그 반대편에서 ‘관행이었다’며 조국을 옹호하는 이들은 “학벌 안 좋은 애들은 박탈감도 못 느껴”라며 계급적 위치에 따른 인식의 차이를 조국 옹호론의 근거로 전용하려 했다. 이러한 구도는 그야말로 스피박이 서술했던 영국 제국주의자와 인도 민족주의자 사이의 구도에서 피식민 여성이 목소리를 박탈당하는 것의 반복이다. 구도에 갇힌 자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렇기에 나는 구도에서 배제된 존재를 조금이라도 공적 기록에 각인하고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훗날의 역사적 분석과 평가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박원순 사태에서도 공적인 애도로서 서울특별시장(葬)을 치르는 것이 어떤 상징적 위력이 될 수 있는지를 지적하는 말들은 전혀 이해되지 못했다. 한 개인에 대한 애도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가 그럴 리가 없다’는 전제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모든 비판을 ‘고인에 대한 모독’으로 들었다. 당시 나는 장례식장에 방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때려야 말을 알아 듣는다’는 식민주의자의 말을 뒤집어, 폭력만이 식민주의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던 프란츠 파농의 문장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기에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한다면, 그런 취급을 거두어 들일 수밖에 없도록 하는 언어란 폭력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일한 사안과 사건을 위치에 따라 다르게 경험하고 해석한다. 나는 그 존재들을 공적인 언어세계 속에 각인하는 것이 언어를 다루는 사람의 소명이라고 믿는다. 연구가 해방적 언어의 생산으로 기능할 수 있다면, 존재의 ‘각인’은 그 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해석과 설명에 선행하고 선취되는 것이다. 동시에 해석과 설명은 바로 그 존재를 공적인 언어 세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해명해내는 일종의 서술적 전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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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장(field)이라는 말은 여러 용법으로 쓰이는데, 그것은 특정한 장소나 사건 또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 장소를 직접 들리거나 사건에 함께 참여하거나 혹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통해 연구자는 현장에 개입하게 된다. 그럴 때 ‘감각’이 열린다. 단순히 활자화된 정보와 지식만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체험에서 오는 감각이 거기에 있다. 그 감각을 질문으로 삼아 해명해 가는 과정 자체가 연구의 일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꼭 연구노트가 아니더라도 현장을 통해 얻은 감각과 질문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곱씹으며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순간들을 메모하듯 정리하는 글쓰기가 필요하다. 단순히 메모하지 않으면 휘발되기 때문이 아니라, 글쓰기라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 사유가 생겨나고 정돈되기 때문이다. 손이 가는 대로 생각이 생겨나듯, 생각이 글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통해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1차 자료나 고전의 원문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정말로 상식적인 얘기다. 하지만 사례연구에서 있어 그 대상이 되는 ‘현장’을 직접 보고 듣고 겪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다소간 간과되고는 한다. 현장의 당사자나 운동에 관해 훈수를 두는 문장이 쓰여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물론 운동이 언제나 정답이거나 가장 현명한 것은 아니다. 운동은 자주 오류를 범하고 같은 문제를 반복하며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당사자나 활동가도 그것을 결코 모르지 않는다. 문제는 안다고 해서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현장에서 획득되는 감각과 지식은 현장의 복잡한 맥락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특히 운동의 현장에 개입해 그 현장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외부에서 훈수를 두는 위치를 넘어서게 만든다. 왜 그럴 수밖에 없으며 무엇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약으로 작용하는지, 그러한 제약에 대해 활동가들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밖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던 운동의 성취와 한계를 확인할 수 있고, 운동의 현장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맥락들을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사회운동의 복잡한 맥락은 사회의 공유지식에는 누락되어 있기 마련이다. 사회운동 자체가 주변화된 위치에서 출발해 주변적인 지식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설령 실제 논문을 쓸 때 이 복잡한 맥락들의 아주 일부분만이 명시적으로 활용된다 할지라도, 마치 학계에서 하나의 주제에 관해 그와 관련된 기존의 공유지식을 바탕에 깔고 새로운 논의를 갱신함으로써 연구가 가능해지듯, 현장에 관한 연구도 그 현장에 개입하는 여러 행위자들 사이에 공유된 맥락적 지식을 바탕에 둘 때라야만 의미 있는 논의를 생산할 수 있다.


현장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 현장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생산하겠다는 의지를 내포한다. 이는 논문을 쓰는 매순간을 일정한 정치적 긴장과 협상의 과정으로 만든다. 때로는 현장의 활동가들과 갈등을 유발하면서도 필요한 논쟁을 제기해야 할 때도 있고, 반대로 어떤 쟁점을 드러내지 않거나 우회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그것은 지식의 사회성, 그러니까 집단적인 과정을 통해 생산된 공동의 지식이라는 성격과 사회적 발화로서 지식의 공적인 효과를 인지할 때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구자에게는 현장과의 ‘유동적인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현장에 밀착해서 교감하고 동일시하다가도 현장과 멀어져 거리를 두고 분석적 언어를 구축하는, 때에 따라 현장과 ‘거리’를 좁혔다가 늘이는 유동적인 관계 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너무 거리가 가까우면 복잡다단한 맥락과 사연들의 미로에 갇혀 아예 언어화 자체에 실패하게 되기도 하고, 너무 거리가 멀면 하나마나한 훈수두기나 상투적인 논의의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거리두기의 전제는, 현장의 실천과 감각을 근본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이는 곧 연구의 대상과는 구분되는, 언어라는 특권을 지닌 연구자로서 나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나와 같은 연구자들이 배우고 참고해야 할 지적인 레퍼런스 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해 온 것, 하고 있는 것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연구라는 작업을 통해 확인시켜주며, 그들에게 지적인 권력을 돌려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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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이태원 참사 연구를 줄곧 해오면서 그 방법론으로는 주로 문헌연구를 채택했다. 문헌연구는 진득하게 혼자 읽고 정리하는 작업이지만, 동시에 활동가 및 참사 생존자를 모아 같이 모임을 꾸리고 여러 활동을 해왔다. 고립되어 초월적인 위치에 나를 둔 채 문헌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문헌연구조차도 동료들과 서로 성장하고 배우는 집단적 작업의 일부로 삼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지식은 암묵적 맥락들을 풍부하게 전제한 채 성립된다. 또한 중간중간에 의견과 피드백을 즉각 받을 수 있고, 그런 과정에서 내가 생산한 지식은 현장에 곧바로 전달된다.


무엇보다 그런 나의/우리의 작업과 활동의 결과물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에 나는 가장 큰 의미를 느낀다. 누군가는 좀 더 정확하게 절망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한 동료이자 생존자는 자신의 맥락과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를 대하면서, 함께 운동의 언어를 만들어 가자며 마음을 열어주었다. 또 다른 동료이자 생존자에게 나의/우리의 언어는 오래도록 억압해 온 슬픔을 드러내 애도하고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 있었다. 사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고 보잘 것 없는, 연구라는 이름의 언어가 누군가를 구하고 살릴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연구는 누군가에겐 더 또렷한 절망을, 의지처를, 동료를, 깊은 위로를 전할 수 있다. 그것이 어린 시절 나를 살린 해방적 언어의 힘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질문해 본다. 나는 글을 왜 많이 쓰는 것일까? 계속 듣고 고민하고 말하는 일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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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성용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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