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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저건] 팬의 경계, 팬덤의 경계 - 그 모호한 영역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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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가 즐겨보는 LCK(대한민국 지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 리그)에서의 스토브리그(선수 이적 및 재계약 시장)가 마무리되었다. e-스포츠는 이런저런 이유로 선수 개인 팬이 많은지라 선수 이적에 따라 보금자리를 옮긴 팬들이 많다. 즉 기존 SNS 계정을 ‘폭파’하고 새로운 계정을 파거나, 트친들과 ‘블블’이든 ‘언팔’이든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선수를 떠나보내고 팀에 남는 경우라도 기존 선수가 나간 자리에 누가 들어오느냐를 노심초사 기다린다. 1군 구단과 계약을 맺지 못한 선수의 팬은 해외 리그나 2군 구단과의 계약을 묵묵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렇게 또 한 시즌이 끝났다.


내 주변에는 내가 누군가의 팬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걸 곧바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꽤 있다. 자신은 그와 같은 맹목적이고 강한 끌림 혹은 ‘사랑’의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내가 보기에는 다들 한두개씩 팬 활동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말이다. 다만 그들에게 팬 아니냐고 물어보면 ‘나는 그냥 좋아하는 거지’, ‘이 정도는 그냥 취미지’ 라고 대답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교양 생활을 ‘팬질’이라는 가벼운 단어로 설명하기를 거부한다. 즉 어떤 이유로든 팬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팬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가 가장 중요한 일처럼 보인다.


한편 팬 활동이 점점 깊어질수록 함께 팬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생기고,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즐거움이 보다 두터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교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팬덤이라는 집단 내에서 요구하는 일정한 규범을 따라야 한다. 규범을 따르지 않는 팬들은 동일한 대상을 좋아하는 이들이더라도 ‘사생팬’, ‘빠순이’, ‘라이트 팬’으로 불리며 ‘진정한’ 팬의 경계 바깥으로 내쳐진다.


그러니까 팬이 된다는 건 두 층위의 경험을 거치는 일이다. 외부의 실천과 담론을 통해 ‘팬으로 규정되는 경험’, 그리고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따라 ‘팬이 되기로 선택하는 경험’.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외부의 담론과 내면의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추를 맞추는 반복 자체가 팬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나를 포함한 팬덤 연구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건, 이 팬 정체성의 외부면과 내부면 사이의 불명확한 경계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러한 경계조차도 연구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때의 외부와 내부는 실제로는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외부의 담론과 권력이 개인의 욕망을 규제하거나 통제하기도 하고, 반대로 개인의 욕망이 주변으로 번져 유사한 욕망들과 공명하면서 외부 담론을 뒤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연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둘 중 하나만을 보기가 쉬운 것 같다. 그렇기에 외부의 담론과 권력 관계에만 집중하면 팬들의 욕망을 놓치기 쉽고, 그렇다고 팬들의 욕망만을 강조하면 그 욕망을 형성하는 권력의 맥락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요즈음의 팬덤 연구자들은 이 두 층위를 잇는 ‘통로’를 정동이나 감정 구조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곤 하는데, 집단 내 공유되는 정동에 포함되지 않는 개별 존재들의 비가시화에 대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는 계속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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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팬이 무엇인지, 어떻게 형성되는지 명확히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히려 팬인지 아닌지 모호한 경계의 사례들을 살펴보는 편이 더 흥미로울 수 있겠다. 앞서 말한 두 질문 - 외부 담론에 의해 팬으로 호명되는가, 그리고 스스로 팬으로 정체화하는가 - 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볼 때, 내 생각에 가장 흥미로운 건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지 못하는 팬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팬으로 생각하지 않고 외부에서도 팬이라고 호명하지 않지만 연구자들이 보기에는 팬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이 경우야말로 팬덤 연구자만이 뛰어들 수 있는 영역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국내에서 이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적은 실정이다. 대표적인 예가 ‘안티팬’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팬보다 더 열정적인 실천을 보여주는 안티팬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매일같이 글을 올리고 거친 말을 던지면서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과 감정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주변에서 아무리 반박 댓글을 달고 단체로 사이버불링을 해도 그 열정만큼은 변치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솟는 것 같다.


스포츠는 산업 자체가 의도적으로 안티팬을 양산하기도 한다. 특히 앞서 잠깐 언급했던 선수 이적이나 라이벌 구단 간의 경기는 안티팬이 양산되기 쉬운 행사들이다. 이 과정에서 첼시 팬은 아스날의 안티팬이 되고, 아스날 팬은 반 페르시의 안티팬이 된다. 가끔은 특정 대상을 향한 열렬한 안티팬 실천이 반대편에 있는 대상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 선수가 너무 싫어서 그와 경쟁하는 다른 선수를 옹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팬이 되는(혹은 팬으로 호명되는) 경우다. 그렇다면 안티팬과 팬 사이의 경계는 그렇게 명확하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안티팬 연구라는 분야가 따로 생기지 않는 한, 결국 이들을 연구해야 하는 건 팬덤 연구자들일 것이다. 해외에서 흥미로운 안티팬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국내에서도 이런 연구가 조금씩 시도된다면 더 풍성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팬 정체성은 여전히 단정하기 어려운 주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팬을 설명하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힘이 실린다. ‘누가 팬으로 불릴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팬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우리 사회가 팬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어떻게 인정하고 분류할 것인가라는 더 큰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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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여찬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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