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까저건] 부동산 커뮤 탐방기 (1): 투자상품으로서의 부동산과 소유권 개인주의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5일 전
- 8분 분량

“폭락이들 다 죽었으면”
“아파트를 주거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면 평생 거지꼴을 못 벗어나지”
“찢재명 대통되면 집값 오르나요?”
이곳에서 게시물을 몇 개 클릭해서 볼 때엔 늘 마주치는 댓글들이다. 언제부터 인지도 모르겠다. 왜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이곳에서 이런 말들을 매일 보고 있을까? 저런 댓글들이 마치 매크로처럼 달리는 이곳, 모든 것이 ‘집값’으로 수렴되는 이곳. 여기는 부동산 카페다. 물론 부동산 카페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말들일 수 있겠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집’은 단순히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자산증식을 위한 재산 목록 중 최상위를 차지하는 사회니까. 그리고 소수이긴 하지만, 좋은 주거 요건, 주거권에 대한 의견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의견들의 종착지는 집값 상승을 통한 자산 증식으로 귀결되거나, 소위 ‘몽상가’ 취급을 받으며,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당하기 일쑤일 뿐.
내가 이곳에서 “부동산 불패”, “집값 상승” 운운하는 게시물들을 보게 된 연유는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부동산, 특히 아파트를 중심으로 짜여진 한국 사람들의 집에 대한 관념을 제일 노골적으로 볼 수 있는 커뮤니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내 집 마련”을 골자로 한 한국 사회의 주거 담론에 특정한 의미들이 접합되어 나타나는 사회-문화적 현상을 분석하고자 하는 나름의 목적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맞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렴 어떤가. 그냥 피곤할 뿐이다.
내가 매일 같이 부동산 카페에 출석하고 숙제처럼 게시물을 훑어보는 것 때문일까? 내가 신진 팀으로부터 청탁받은 원고는 ‘부동산 커뮤니티’에 대한 두세 페이지 남짓의 짤막한 문화 비평이었다. 그런데 막상 수락하고 이에 대해 쓰려고 하니, 내가 부동산 커뮤니티에서 보고 듣고, 그리고 그로 인해 느끼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내가 부동산 커뮤니티를 보며 생각하는 것들은 누구나 다 익히 알고 있는 한국 사회 내 부동산 담론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동산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날것의 욕망들과 흡사 극우 유튜버의 그것을 상기시키는 말들을 매번 접하다 보니 피로감과 회의감에 찌든 인상 비평 이상을 내놓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짤막한 비평은 어디까지나 체계적 분석이 뒷받침된 글이라기보다 인상 비평에 가깝다는 것을 먼저 고백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분량의 한계로 이 글은 총 세 번에 나눠 연재하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은 부동산 커뮤니티에서 인식하는 한국 사회 내 ‘집’에 대한 관점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개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후의 글은 보다 세부적으로 부동산 커뮤니티 내부 행위자들의 역학과 그들이 ‘집’을 매개로 어떠한 ‘말들’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 ‘말들’에 담긴 의미에 대한 단상을 담고자 한다. 마지막은 부동산 커뮤니티를 매개로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현장을 바라보는 나와 커뮤니티 내 행위자의 관계,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소회를 짤막하게 풀어내 보고자 한다.
주택? 주거? 아니, 부동산!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 위주의 부동산이 각광받는 현상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아파트는 이미 현대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주거 양식으로 자리 잡았고, 이미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 중이니 말이다. 이에 대해 일찍이 발레리 줄레조는 “아파트 공화국”이라 명명하며 논의를 전개한 바 있었으며1), 전상인 역시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변동 양상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논한 바 있다.2) 이들의 논의에서 한국 사회의 아파트는 ‘자산 증식을 위한 투자재’, ‘중산층적 삶이 반영된 위한 주거 양식’으로 드러난다. 또한 아파트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를 형성시키는 폐쇄적인 성격을 띰과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개폐식 삶’이 꾸려지는 공통체가 구성되는 등,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긴밀하게 관계맺는 주거 양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파트라는 대상에 달라붙는 말들 중 가장 앞선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 가격이다. 물론 아파트라는 재화가 상당히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격에 대한 말들이 우선적으로 발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파트는 사람들에게 가장 각광받는 주거 형태이자,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주거 양식이기 때문에 그 가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그 재화 가격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지만, 주거와 관련한 주거권과 관련된 논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부동산에 대한 논의로 바꿔서 말하면 어떻게 될까?
익히 알다시피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이는 한국 사회 내 부동산에 대한 논의가 과열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논의가 과열되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말들이 과잉된 채 떠다니고 있다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 아니 ‘집’에 대한 논의는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되지 않은 단계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집’에 접근하는 관점이 주거권을 위주로 접근해야 할지, 부동산이라는 자산 범주와 그를 둘러싼 주택 시장을 중심으로 접근해야 할지 아직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그에 대한 논의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항상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범주에서, 또는 ‘집값 과열’과 같은 현상이 있을 때마다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말들이 발화 되지만, 집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은 이러한 담론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입장들을 그저 떠다니는 ‘말들’로만 여기는 것이 다반사다.
물론 나 역시 몇 년 전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집은 사는buying 것이 아니라 사는living 곳이라는 관점을 언급한 바 있지만, 사실 그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집은 거주를 위한 곳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거래하는 재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관점은 분리해서 생각해 보면 주거권의 관점과 시장의 관점을 각각 대변하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의 주택과 관련한 논의에서는 이 두 관점 모두를 등한시 하며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작금의 주거 담론에서 중심이 되는 논의는 무엇일까. 아니 앞서 집에 접근하는 관점이 합의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 재화이자 자산 증식을 위한 의제자본으로서의 부동산으로 합의가 된 것이 아닐까? 오히려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측은 복지로서의 주거권에 대한 입장이 아닐까 싶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집은 철저히 자산 증식을 위한 투자 상품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마찬가지로 집을 구매하는 이들 역시, 거주하기 위해 구매하기도 하지만, ‘집값 상승’을 염두에 둔 미래에 증식될 자산을 마련하기 위한 의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주거에 대한 담론 자체가 철저하게 시장 가격과 그에 연동된 자산으로 환원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부동산 커뮤니티의 다양한 행위자들은 모두 ‘집값’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이는 자신이 거주하기 위한 주택 마련의 용도보다, 자산 확보 및 증식을 추구하기 위한 관심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택을 구매하는 이들은 자연스레 주택, 아니 부동산을 하나의 투자 상품으로 접근하게 되고, 이들은 자연스레 투자자라는 주체로 구성된다. 이때, 주거와 관련한 제반 요소들 - 주거 편의성, 교통, 주택을 매개로 한 커뮤니티 등 - 은 ‘집값 상승’을 위한 재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거권은 어디까지나 ‘집값 상승’에 밀려 등한시 되게 된다. 가령, 임대 주택 공급에 대해 부동산 커뮤니티에서 날 선 반응을 내세우거나, 임대 주택 거주자를 자기계발에 실패한 패배자 내지는, 보통의 사회 구성원, 즉 시민으로 여기지 않는 말들을 내뱉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투자 상품이 된 부동산
그렇다면 부동산은 어떻게 투자 상품화 되었을까? 아니, 보다 정확히는 투자 상품으로 각광받게 되었을까? 이는 아마 부동산이라는 자산이 주식, 선물, 코인 등과는 달리 안전자산으로 인식됨과 동시에 “꽤 큰”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재화로 기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은 언제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했을까? 물론 과거 고성장 시기, 부동산을 통한 시세 차익으로 자산을 축적해 왔던 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부동산을 놓고 “가즈아”를 외치며, 부동산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을 발현하게 된 연유는, 한국 사회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 그리고 한국 사회 전반에 금융화가 고도화되었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라파비차스는 금융화가 생산성의 부진을 돌파하기 위해 자본이 선택한 활로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3) 이는 하비가 언급했던 자본의 순환과 유사한 방향의 논의라 할 수 있다. 특히 하비가 언급한 자본의 2차, 3차 순환은 자본의 생산성 향상에 따른 이윤율 저하 경향에 따라 발생하는 자본 축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영역을 자본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비에 따르면 자본의 1차 순환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제시된 생산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2차 순환은 ‘고정자본’과 ‘소비기금’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고정자본은 생산 내부 영역뿐 아니라 상품이 소비되기 위한 인구의 집적을 가능케하는 ‘도시적인 것’을 포함된 “건조된 환경”을 의미한다. 3차 순환은 과학기술, 교육, 금융제도 등으로 발전. 각각의 순환은 자본 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율 저하 경향에 의한 축적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자본의 확장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즉, 1차 순환의 경우 상품→자본으로의 전환 매커니즘이 지속적으로 발생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순환을 보장해주는 요소가 없다는 것, 그로 인한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자본의 2차 순환이다. 자본의 2차 순환에서 사적 자본은 고정자본에 투하된 가치의 실현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안정된 자본 순환은 늘 위기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또한 건조환경의 건설에 국가가 개입한다 해도, 이 역시 자본의 유동성에 의해 파생되는 가치잠식이 존재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은 또 다른 순환 과정으로 돌입하는데, 이것이 자본의 3차 순환이다.4)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역시 위기의 근본적 해결이 아닌 위기의 분산을 야기하며, 오히려 이러한 위기는 사회 전 영역, 전 지구적 영역으로 확산 되곤 한다.5)
이를 주택 시장으로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사회 내 금융화가 가속화되며, 신용 확대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용의 확대는 과거 금융 서비스를 받지 못하던 이들에게도 비교적 고가의 재화인 주택이라는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주택이라는 상품은 자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신용 확대란 자산 축적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한국 사회에서 2000년대 이후 거대한 ‘자산 효과’를 창출해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신용 확대로 인한 레버리지 확대로 주택을 구입하는 것은 실제 생산성이나 사회 전체의 이윤과는 다소 유리된 채 자산을 증식시키는 효과만 발생시킨다. 즉 이는 실물경제와 어느 정도 관계는 맺고 있지만(실물경제를 통한 이윤 축적이 늘어난 측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신용 확대를 통한 부채를 통해 만들어진 측면이 크다. 가령 지금 한국의 주택 시장을 생각해 볼 때, 서울의 높은 부동산 가격은 웬만한 임금 노동자의 소득만으로 구입하기 힘든 수준이다. 따라서 이들은 2000년대 들어서 발생한 신용확대의 기류와 부동산과 관련한 공식/비공식 금융을 통한 현금 창출을 통해 주택을 마련하곤 한다. 이는 가계부채 중 가장 높은 비율이 부동산 담보 대출(모기지론)이라는 것을 토대로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향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는 금융화 시대에 자산 효과가 만들어지는 것이 수익성이 있는(또는 수익성이 예상되는) 투자 경로에 관심 증대 등에 있다는 것을 예증하며, 나아가 이러한 자산 효과가 실물경제보다 높은 자산 가치 상승이 예상되는 투자재 - 코인과 같은 사례도 있겠지만 특히 부동산 - 에 의해 창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창출된 가치는 다시금 주택 가치의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며, 다시금 신용에 의한 접근성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아이작스에 따르면 이렇게 창출된 자산효과는 주로 “투자와 소비를 통한 유효수요의 유지”라는 기능을 수행한다.6)

소유적 개인주의 , 소유권 사회
따라서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 - 물론 이는 서울과 일부 수도권 지역에 국한된다 - 의 급격한 주택 가격 상승을 투자자와 같이 예리한(?) 감각으로 주택 시장에 접근하지 않는 이들은 부동산 커뮤니티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벼락 거지”라는 말이 예시하듯이 자신의 주거 조차 보장받지 못할 정도로 낙오된 이들로 호명되곤 한다. 이처럼 이들에게 투자자-주체란 당연한 주체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주거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투자자로서 성공적인 투자 - 내 집 마련과 그를 통한 주거 자산의 확보 및 증식 - 가 수행되지 않으면 보장받지 못하는 관점이 자연스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물론 주택을 철저한 자산 증식을 위한 투자 상품으로 인식하고 주택 시장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을 투자자-주체로만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김명수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이들을 금융자본주의의 헤게모니에 포착되어, 그에 부합하는 합리성에 입각한 자기통치 테크놀로지를 체화한 주체로 국한하여 논의하면 한국 사회 내 ‘내 집 마련’을 둘러싼 개별 가구들의 생활조건과 ‘내 집’이라는 것이 발현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7) 부동산 커뮤니티에서도 자산 증식을 기본으로 목적하고 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내 집’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 집’이라는 것이 안전자산이자 삶의 기반이 되는 자산으로 인식되는 현상에 대한 설명은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자 상품으로서의 부동산이라는 관점 이외에 ‘내 집’에 달라붙는 근본적 요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크로포드 맥퍼슨은 일찍이 근대 이후, 사람들의 근간에 ‘소유적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신들이 자신들의 소유물로써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관점으로, 맥퍼슨은 이에 대해 “인간의 본질은 타자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자유는 소유의 기능이다. 사회는 그들 자신의 능력 그리고 그들의 활동/실천/운동에 의해 획득한 것의 소유자로서, 상호 간 관계에 의해 연결된 자유롭고 동등한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한다.8) 맥퍼슨의 진술에서 엿볼 수 있듯이,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나’는 내가 가진 것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자아는 타자와 유리된 오롯이 나 자신만이 소유한 것이 된다. 따라서 소유적 개인주의적 관점하에서 ‘나’는 오롯이 ‘자기를 소유한 존재’로 귀결된다. 즉, 소유를 중심으로 나와 타자를 구별 짓고, 능력, 자아, 감각 등 모든 것이 소유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자장 하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맑스 역시 사적 소유에 대해 논하며, “모든 물리적, 정신적 감각들이 철저하게 소외되고, ‘소유’의 감각이 이를 대체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9)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 ‘소유’란 존재 원리이자 권리이다. 나아가 소유한 것, 소유의 감각에 의해 타인과 구별된다는 것은, 다시금 소유의 질과 양에 의해 차등이 발생한다는 것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주거 영역에서 자산 가치 상승을 통한 격차가 심화되고, 생활기회의 차등화를 야기하는 현실 속에서 주택 소유는 단순한 자산 증식이 아닌, 도시에서의 생존이자 자신의 계급/계층을 재생산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따라서 주택에 대한 소유는 단순한 자산 증식을 위한 수단이 아닌, 주거라는 삶의 필요를 충족함과 동시에 자신의 삶에서 배타적 차별화를 꾀할 수 있는 표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부동산 카페의 행위자들은 이러한 방식을 체현하고 있기에 그들에게 주택, 즉 부동산이란 부침이 있을지언정 언제나 꺼지지 않는 신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늘 - 부동산 시장이 과열된 지금 역시도 - 부동산(주택)의 미래 가치의 할인율에 대한 기대를 기반 삼아 언제나 “지금이 가장 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주거는 언제나 소유할 수 있는 것, 소유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1) 발레리 줄레조 (2007). <아파트 공화국>. 서울: 후마니타스.
2) 전상인 (2009). <아파트에 미치다: 현대한국의 주거사회학>. 서울: 이숲
3) Lapavitsas, C. (2009). Financialisation, or the Search for Profits in Circulation. Economiaz, 72(3), 98-119.
4) 자세한 내용은 하비(1982/1997) 참조. 데이비드 하비(1982/1997). <자본의 한계>. 파주: 한울.
5) 자세한 내용은 강내희(2014) 참조. 강내희(2014).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서울: 문화과학사.
6) Isaacs, G. (2011). Contemporary financialization: A Marxian analysis. Journal of Political Inquiry, 4, 1-33. 직접인용은 17페이지.
7) 김명수 (2020). <내 집에 갇힌 사회>. 파주: 창비.
8) Macpherson, C. B. (1962).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Oxford University Press. 직접인용은 3페이지.
9) 1884년 <경제학 철학 수고>. 출처: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4/manuscripts/comm.htm 직접 인용 원문: “In the place of all physical and mental senses there has therefore come the sheer estrangement of all these senses, the sense of having”

글. 구승우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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