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에게 방학은 저주일까 축복일까?
-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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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중에 수업을 듣고 발제문을 쓰며, 정신없이 기말과제를 하다 보면 방학을 기대하게 된다. 이것만 끝나면 쉰다! 하지만 방학이 시작되고 내가 자주 했던 말은 ‘나에게 마감을 주세요’였다. 막상 바쁜 게 끝나고 나니 나를 독촉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무언가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긴 방학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으니 이런저런 세미나를 계획하고 나에게 과제를 부여했지만, 방학이 끝나가는 지금은 ‘지금까지 뭐했지?’라는 생각뿐이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었나? 왜 마음은 부산한데 제자리걸음일까? 갓생을 살지 못하는 나, 어딘가 잘못 살고 있는 걸까?
이번 신진 탁상공론에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방학을 보내거나 보내 왔던 대학원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농담 삼아 대학원생에게 방학은 없다고들 한다. 실제로 방학에는 수업만 없을 뿐이다. 정해진 수업이 없고 학교에 나갈 유인도 줄어들기 때문에 더더욱 시간이 붕 떠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 시간들을 ‘누리거나’, ‘견디고’ 있을까?

참여자 소개
리모컨 박사과정. 이번 방학은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고 중얼거리는 중. 근데 사실 망하지 않은 방학이 없었다.
아보카도 박사수료. 연구 현장을 찾아 다니고 있지만 생각만큼 잘 풀리진 않는다. 휴가 갈 때도 노트북을 챙기는 편
우산 박사수료. 루틴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길 반복하고 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라이언 석사과정. 이제 곧 논문 학기. 방학에는 직전 학기 실라버스를 다시 펼쳐서 읽는다.
오순도순 박사과정. 집중력 이슈로 고민 중. 불안하면 일로 채운다.

리모컨 다들 방학 어떻게 보냈어? 나는 망했어.
아보카도 방학이 항상 그런 기분으로 끝나는 것 같아.
리모컨 기말과제 끝내고 이제 방학이다! 하면서, 이번 방학에는 논문도 쓰고 책도 읽고 막 이것저것 좀 해야지 생각했는데 다음주면 개강인 거야. 왜 이렇게 됐지, 이 의문을 계속 품고 살고 있는데 다들 방학이 어떤지 궁금해. 내가 못 나서 그런지, 아니면 방학은 다들 비슷한 건가 생각이 들어가지고.
아보카도 나는 수많은 방학을 거쳐갔잖아. 근데 인생 중에 단 한 번도 이번 방학 재밌었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아. 초등학교 때도 그렇지만 항상 찜찜함을 안고 끝나는 것 같고. 박사과정 때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 계획을 해서 찜찜함이 없는 끝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항상 반복인 것 같아. 그래서 처음에 방학을 주제로 탁상공론을 한다고 했을 때는 ‘깊생’을 하게 되더라고.

# 이번에야 말로 갓생을 살아보리다
리모컨 어때? 다들 열심히 살았어?
오순도순 나는 코스웍을 안 할 때는 세미나를 한다든가 그렇게 보냈던 것 같고. 수업 때 못 읽은 텍스트를 읽거나 하면서 열심히 하려고 다짐은 하는데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실패하고 시도하고 그런 것 같아. 이번 방학은 번역이나 교수님과의 공동 작업 때문에 좀 정신없이 보낸 것 같고.
리모컨 그렇게 보냈을 때 오순도순의 자기 평가는 어떄?
오순도순 음… 근데 나는 솔직히 불안이 좀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타임라인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잖아. 대학원생의 방학이라고 하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낼 수도 있는 거고, 또 하려고 하면 할 게 너무 많은 거지. 어쨌든 거기서 좀 타협을 하면서 지내는 건데 약간, 불안이 올라오면 그걸 일로 메꾸려고 했던 것 같아.
아보카도 누구랑 같이 하면 구속력이 생기잖아. 교수님이랑 하면 자연스레 하게 되는 게 있는데, 내가 혼자 하는 거는 잘 하지 못한 채로 끝나고… 나는 외국어를 계속 공부해야 돼서 독학처럼 하다가 최근에는 화상전화를 하고 있거든. 그런 걸 하면 그래도 시간이 고정되니까 뭔가 되는 것 같아. 근데 한편으로는 뿌듯함과 회의감이 같이 있어. 돈을 내고 누군가랑 약속해서 하는 건 하는데, 내가 읽기로 한 책은 50쪽 읽고 남겨져 있고… 이런 거에 좀 양가적인 감정이 있어.
리모컨 학기 중에는 마감이 일주일, 아니면 이틀, 사흘 단위로 막 있으니까 정신없이 막 하는데, 방학을 하고 나니까 이제 뭐 해야하지, 하다가 늘어지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한테 하고 다녔던 말이 ‘나한테 마감을 주세요’였어. 맨날 그 소리를 하면서 다녔지만 망해버린 방학이 되어 버렸는데.
우산 나는 이번 방학에 시작한 건 아니지만, 최근에 새로 시도해본 게 루틴 만들기였어. 무라카미 하루키 루틴을 따라 해봤거든? 줄여서 하루틴이라고, 영양제 이름이라서 친구들이 놀리는데(웃음) 오전 5시 즈음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점심 먹기 전까지는 무조건 글만 쓰는 거야. 그리고 점심 먹고 나서, 오후에는 메일 쓰기나 세미나 책 읽기, 서류 작업처럼 산만해지는 일들을 하는 거지. 창의적인 작업을 오전에 하는. 오전 시간을 잘 쓰는 게 방학에 좀 도움이 된 것 같아. 오후는 망치더라도 오전은 잘했으니까. 근데 ‘중꺾마’주의라서, 한 주 하고 망하고, 다시 시작하고, 서너 번은 다시 시작했어.
오순도순 나도 아침을 조리 있게 써보자 해서, 원래 밤에 하던 러닝을 아침에 해봤거든. 7시쯤에 일어나서 러닝하고 돌아와서 앉으니까 하루가 끝난 느낌이 들고, 너무 힘들어가지고 9시인데도 뭔가 읽히지 않고 힘든 거야.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다시 돌아오긴 했어. 이게 오전과 오후를 쓰는 방식이 다 다른 것 같아.
리모컨 나는 오전에 못 일어나. 아침을 잘 보내는 경우는 진짜 드물었던 것 같아. 아침에 하면 하루가 길게 느껴져서 좋긴 한데 그게 의도적으로 잘 안 되더라고.
라이언 나는 무계획적으로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는 방학을 보냈었어. 출근하듯 아침 일찍 제일 먼저 와서 카드 찍고 문을 여는 걸 좀 즐겼던 것 같아.
리모컨 경비원 루틴이네.
라이언 딱히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 뭔가를 계속 하게 되잖아. 책이라도 꺼내서 읽고, 뭔가를 쓰게 되고. 그러면서 학교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이번에 석사논문 세미나 끝날 때 교수님이 다음 학기 프로포절 전까지는 뭐라도 더 써서 가져와야 된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는 방학 동안에는 쓰겠지, 설마 처음 그대로 가져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대로인 상태여서 걱정이야 (웃음)
우산 최근에는 그런 것도 해. 집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랑 일주일에 한 번씩 줌으로 만나서 오늘 뭐 쓸 건지 공유하고, 2-3시간 동안 캠을 켜놓고 음소거 하고 써. 서로 조는 모습도 보고 간식 먹는 모습도 보는데, 어쨌든 화면이 있으니까 3시간 동안 집중을 하게 되잖아. 약간 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필요하니까. 그거 좀 괜찮던데.
라이언 나는 학기 중에 수업 따라가기가 너무 벅찼어서, 늘 못 읽는 텍스트들이 있었어. 방학 때 거대한 계획은 못 세웠던 것 같고, 그냥 내가 지금까지 못 읽은 것들을 다시 돌아가서 잘 읽자는 마음으로 학기 중에 읽어야 했던 것들을 모아놓고 차근차근 읽는 그런 계획을 위주로 세웠던 것 같고. 그것만 해도 되게 뿌듯한 느낌이었어. 뭔가 등록금을 낭비하지 않은 느낌도 들고, 죄책감을 좀 던 것 같아.

# 연구자들의 보상 회로는 망가져 있다?
아보카도 나는 박사논문을 쓰기 위한 사전 답사를 지난 학기부터 하고 있는데, 현장을 정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어가지고… 방학 때 목표했던 건 중국어를 좀 정기적으로 쓰자, 그리고 박논의 현장을 어디로 삼을 것인가를 정하자는 것이었는데. 중국어 공부는 전화 중국어를 해서 성공한 것 같아. 근데 현장은 왔다 갔다는 많이 했는데 거절을 많이 당하고, 그게 좀 막막한 상태로 있어. 남은 방학 동안은 그간의 자료를 정리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다시 짜야 되는데, 막 바쁘고 여러 사람 만나고 에너지를 쓰지만 계속 그 길을 뱅뱅 돌고 있다는 감각이 남은 방학이지 않나 생각이 들어.
오순도순 나는 내 작업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커리큘럼으로 세미나를 열거나 해서 바로 결과물을 내는 걸 선호하는 편인데, 사실 성공이라고 얘기하기는 없을 것 같고. 다 과정에 있고, 그냥 계획한 거를 실현했다 정도인 것 같아. 근데 또 한편으로는 늘 실패가 있잖아. 요즘 집중력이 너무 흐려져서, 뭔가 하는 시간은 많은데, 투입 대비 산출량이 없어. 그걸 ‘순공’(순수공부시간)이라고도 하잖아. 가령 30분 작업하다가 딴짓하고.
그러면 뭔가 자기혐오도 생기잖아.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아야 되는데, 어중간한 상태로 길어지면 찝찝한 느낌이 들어. 사실 안 한 건 아니거든. 근데 뭔가 했다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러고서 자려고 누우면 그런 날은 기분이 좀 안 좋아.
리모컨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한 3-4시간 딱 집중해서 하면 끝날 거를, 하루 종일 하고 있을 때… 좀 하다가 누워 있다가 딴짓하다가. 사실상 하루에 하나만 하는 거야.
우산 나는 생산성에 대해 최근에 생각을 많이 해봤어. 집중력 문제도 있겠지만, 석사하고 박사하면서 나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높아지는 것 같아. 생산성이 예전에 비해 적어진 건지, 내가 그걸로 만족을 못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같은 시간이어도 예전에 비해서 적게 쓰게 되는데, 그건 내가 더 잘 쓰고 싶으니까,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퀄리티를 높여서 가야 한다는 압박이 생기니까 생산성이 떨어지는데 그게 그렇게 나쁜 건가 생각도 하고 있어. 양도 중요하지만 질도 중요하잖아.
아보카도 직장 다니는 친구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메일을 쓰다가 전화받고 탕비실 가서 뭐 정리하고 하는 것 자체가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거라고 생각을 안하는 것 같더라고. 앉은 자리에서 그 책을 폈으면 책만 봐야 할 것 같고, 다른 거 부시럭대는 건 딴짓 같고 생각하는 게, 연구자는 이래야 한다는 어떤 이미지나 감각이 있나 생각도 했어. 당연히 책 펴놓고 인스타그램 하는 건 집중력이 깨진 게 맞는데… 도대체 뭐가 집중인가. 그 상상 속의 ‘집중하는 학자’ 이미지, 모든 세상 일에 떨어져서 글만 엄청나게 쓰고 이런 것에 대한 강박이 있는 걸까.
리모컨 애초에 뭐가 산출이라고 볼 수 있을까? 방학 동안 이것저것 한 것 같기는 한데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안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눈에 띄는 결과물이 없어서인 것 같아. 내가 논문이라도 하나 투고를 했으면, ‘나 방학 동안 논문 냈어!’ 이런 말이라도 할 텐데, 그게 아니라 다 그냥 준비 작업이거나 다른 사람들이랑 세미나를 했다 정도밖에 안 남으니까. 나 뭐 했지, 이런 느낌이 좀 드는 것 같아. 객관적인 지표가 없으니까 늘 답답해.
아보카도 과거에도 그랬는지 궁금해. 20-30살 정도 더 많은 선생님들이 이 대화를 들으면 어떻게 판단할까? 아니면 그냥 스마트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실지… 선생님들은 책 읽고 뭔가를 산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내가 느끼기엔 뭔가 사회가 변해서 그런 생각을 내가 하게 되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고.
오순도순 어떤 작업 방식이 더 많은 산출량을 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연구를 한다는 건 보상 회로가 다르잖아. 이게 인간에게 최적화된 루틴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보통은 어느 정도 하면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연구자들은 보상과 만족 회로가 적절하게 되어 있지 않아서. 보상이랄 게 사실 없으니까. 넓게 보면 논문도 사실 보상이 맞나? 싶고. (리모컨-우산: 논문은 내가 내 돈 내서 게재하는 거잖아… 속닥속닥) 그래서 약간 그런 회로를 어떻게 만들어야 될지 좀 고민이 들어.
리모컨 이게 참 나쁜 일이긴 한데, 그러다 보니까 약간 남들이랑 비교하는 게 있는 것 같아. 가시적인 보상이 별로 없잖아. 논문도 털어냈다에 가깝고. 그래서 남들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았는지를 비교하게 되더라고. 남들이 뭘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하면서도, 거기에 약간… 은밀한 욕망이, 나는 얼마나 잘 살았는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좀 죄책감이 들기는 해. 남들과 비교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라이언 이번 학기에는 종합시험을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외울 게 많은 거야. 그런데 오히려 정답이 있는 공부하니까 오랜만에 너무 즐거웠어. 뭔가 척척 뚜렷하게 답안 같은 것들이 있고. 또 이게 시험이니까 결과가 나오잖아. 애매모호한 평가가 아니라 명확히 합격을 받으면 뿌듯하고. 예상치도 못하게 종합시험에서 약간 즐거움을 찾았던 것 같아.
아보카도 마음이 좋고 슬프다… (일동 웃음)

# 나 지금 쉬어도 괜찮은 거지?
아보카도 방학이 그런 감정이 더 많이 드는 시기인 것 같아. 학기 중과 다르게 어쨌든 휴가를 가는 것도 중요한데. 연구자가 아닌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면 친구들은 잘 쉬었다고 말하는데 나는 너무 많이 쉬었나, 지금 쉬고만 있나 이런 생각이 드니까. 조금 보상회로 같은 게 고장 나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오순도순 엄청 공감돼. 학기 중엔 커리큘럼 쳐내는 것만 해도 너무 벅차거든. 근데 방학 땐 얼마나 쉬어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 직장인은 퇴근하면 그냥 쉬잖아. 방학은 없지만 휴가철은 있고. 근데 연구자들은 그런 게 딱히 없으니까 얼만큼 쉬어도 되는 거지, 동료 연구자들은 얼마나 쉬지, 그런 게 없어서 쉬어도 제대로 못 쉬고 일하는 것도 제대로 안 되고.
리모컨 나는 여행 자체를 잘 안 다니기는 하지만, 더더욱 쉼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네. 그러면은 다들 약간 어떤 식으로 좀 그러니까 쉴 때 어떤 식으로 쉬어?
우산 주로 휴양지만 가. 항상 똑같아. 진짜 쉬러 가는 거기 때문에 뭐 보러 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하고.
리모컨 그러면 휴양지 가서 계속 누워 있는 거야?
우산 그렇게 해야 쉬는 기분이 나지. 근데 저번에 휴가를 가자고 하고서 광주에 다녀 왔는데, 쉬기로 해놓고 전시를 보러 다녔어. 내 연구 주제 때문에 봤던 건데, 이거는 쉬는 게 아니지. 이건 휴가가 아님. 그래서 9월 초에 한 번 더 가려고 생각하고 있어.
리모컨 그렇게 쉬고 나면 뭔가 리프레시 되는 느낌이 들어?
우산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렇게 아무것도 안하려는 것도 노력인 것 같아. 이렇게 해야 좀 이완이 되니까.
오순도순 나는 진짜 아무것도 안 해. 취미가 없어서 그냥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누워 있고, 약간 의미 없는 인스타 릴스를 본다거나 그런. 진짜 내 활동을 멈추는 걸 많이 해. 유튜브를 본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근데 예술에는 조예가 전혀 없어서 봐도 잘 모르겠고, 미술관 몇 번 갔는데도 잘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 그냥 낮잠 자거나.
리모컨 늘 생산적으로 쉬고 싶은데, 다들 보면 취미 활동을 하거나, 그러니까 하물며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하면 얘깃거리라도 생기잖아. 근데 내가 릴스를 본다고 무슨 얘기거리가 생길 것이며… 그런데도 계속 봐. 보다 보면 봤던 게 또 나와. 또 봐. 생각 없이 그렇게 하다가 큰일 났다 하면서 일어나서 다시 일하고.
오순도순 나는 그래서 취미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조차도 뭔가 생산성을 챙기려고 하는… 취미는 되게 자연스럽게, 내가 진짜 애정을 가지고 애착을 가지고 뭔가 하는 건데. 그게 잘 안 생겨. 결국 뭔가를 해야지 하면 또 진입 비용이 있으니까. 뭘 배워야 하고, 뭘 해야 하고. 그런 것도 힘들더라고. 너무 무력하긴 한데… 넷플릭스 보고 이런 거, 제 동료들은 SNS도 다 자료다, SNS를 보지 않는 사회과학 연구자는 그냥 페이퍼에 갇혀 있는 거라고 하고. 근데 릴스 보다 보면 다 비슷하거든. 나는 그냥 그냥 재밌다 이러고 넘기는 거고.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것 같아. 이제는 뭔가 생산적으로 해야겠다, 취미를 만들겠다 이런 것도 없고. 그렇게 적당히 쉬고.
아보카도 근데 진짜 어르신들, 부모님 세대부터 해서 보면 진짜 쉴 때 힘 풀고 쉬는데, 그럴 때 항상 느껴. 내가 강박이 있구나. 예를 들면 엄마가 쉬는 거 보면 정말 이렇게 (몸에 늘어뜨리는 포즈를 취하며) 편하게 있는데.
리모컨 그냥 소파에 앉아서 TV 보고.
아보카도 아무것도 안 하잖아. 화분에 물 주거나.
오순도순 나도 좀 공감하는데, 예전에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주말에 늘어져 있는 걸 보면 뭐라도 해야 되지 않나 생각을 했었어. 보통 부모님들이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근데 그게 되게 천년의 지혜였다는 걸 느껴. 그게 필요해. 누구보다도 지혜롭게 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그렇게 쉬는 게 인류의 지혜가 녹아 있는 게 아닌가. 집에 가면 다 그러고 있어요. 뭔가 Chill하게. 밥 때면 밥 먹고. 좀 맛있는 거 먹고.
리모컨 근데 이러면서도 마음은 불편하니까. 맞아. 그러니까 휴가 가서 나는 쉴 거야, 나한테 아무도 연락하지 마, 셧다운 하고 쉬면 잘 모르겠는데, 쉬고 있어도 연락은 계속 오고 나는 움직이기 싫고. 쉬는 게 막 재충전을 한다는 느낌보다는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는 느낌. 그래서 쉬고 나서 ‘개운해, 이제 열심히 하자’가 아니라… 내가 게으름을 피운 만큼 스불재를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까, 아, 쉬는 게 뭐지 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아보카도 나는 스마트폰을 못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연결돼 있는 감각을 너무 좋아하거든. 사람들한테 맨날 카톡하고 인스타하고 이런 스타일인데, 스마트폰을 한두 시간이라도 안 하는 게 좀 리프레시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목욕이나 사우나나 찜질방을 많이 하러 가.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을 들고 갈 수 없으니까. 그런 데 있다가 오면, 확실히 스마트폰이 나한테 기쁨도 주지만 정말 정신 상하게 하는 요인이구나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라이언 나는 사람들 만나고 밥 먹고 술 먹고 하는 게, 약간 쉬면서 재충전하는 방식이야. (E였어요? 웅성웅성) 엄청 활발히 얘기하지 않아도 그렇게 같이 자리에서 좀 에너지를 많이 얻는 사람인 것 같은데, 문제는 학기 중에는 친구들이 보자고 하면 나가기 어렵잖아. 그래서 방학 때 보자고 하고 모든 약속으로 방학으로 미뤄서, 나에게 방학은 좀 약속들을 처리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 같아. 그래서 밀렸던 약속들, 오래 못 봤던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연락해서 보자고 하고. 어차피 학교에 매일 나오니까 하루종일 학교에 있다가 저녁 때쯤 나와서 밥 먹고 술 먹다가 들어가고. 혼자 충전하기보다는 사람들 만나서 충전하고 그래.
리모컨 나는 그냥 게으름인 줄 알았는데 또 잘 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 쉰다는 게 정말 뭘까? 그러면 다들 쉴 때는 어떻게 쉬는 편이야?
(2부에서 계속)

글. 리모컨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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