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동향] 멋진 고양이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6월 13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월 15일

동동
일본에 차(茶) 문화가 처음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때는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 초기 사이인 8-9세기 즈음이라고 한다. 이때 당나라 유학 승려들이 주로 즐긴 것은 잎차(葉茶)였는데, 일반에까지 전파될 수는 없었다. 차 문화의 본격적 확산은 12세기에 이르러 선불교 승려 에이사이(榮西)에 의해 송나라로부터 차 씨앗과 가루차(抹茶) 음용법이 수입되면서 이루어졌다. 무사계급 사이에 가루차가 유행하면서 14세기 중반경부터 일본의 독특한 차도(茶道)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치스러운 취미로 취급받았던 것이 노아미(能阿彌)에 의해 예술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얻은 후, 16세기에 이르러 센노 리큐(千利休)에 의해 상류층의 고급문화로 완성된다. 한편, 불교를 통해 명맥이 계승된 잎차 문화는 18세기에 부활하면서 비로소 무사계급의 고급문화가 아닌 대중문화로서의 차문화가 뿌리를 내린다. 오늘날 일본의 차문화에는 8세기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문화적 의미와 배경이 혼종적으로 녹아 있다. 차 문화에서의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고 할까?
‘찻잔 속에 찻잎이 서면 길조’라는 속설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민간에 유행하게 된 데에는 잎차 문화의 대중적 확산이 기여했을 것이다. 이 속설은 찻잎이 서는 게 일상에 흔한 예삿일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나아가, 찻잎이 ‘선’다는 것이 흉조가 아닌 길조와 연관되는 것으로부터 수직과 상승의 이미지가 민중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미지는 인간이 세계로부터 주어진다고 여기는 신호를 해석할 때 사용하는 코드 중 하나다. 미국의 TV쇼 ‘지옥에서 온 고양이(My Cat From Hell)’를 통해 캣대디(Cat Daddy)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갤럭시(Jackson Galaxy)는 고양이와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고양이의 모조(Mozo) 즉 의기양양함을 존중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모조란, 바이킹이나 고대 그리스 무사들이 용감함을 위해 때론 생존마저 도외시했듯, 고양이에게는 좋은 삶(Well-being)을 위한 핵심적 요소다. 모조가 상처받지 않은 걸 어떻게 아냐고? 꼬리를 보세요! 하늘에서 실로 잡아당긴 것처럼 빳빳하게 세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꼬리를 치켜든 채 핑크빛 항문을 드러내는 그를 나는 어찌해야 하나. 동동. 2023년 여름 광주 출생. 생후 2개월경 생모와 이별. 10월 구조. 12월 서울로 입양. 이듬해 2월 성별 재지정. 비범하게도 1년 만에 ‘손!’ 터득. 츄르 외 간식은 사절. 공놀이광. 인간의 고통과 갈등에 무관심. 내 글쓰기의 장애와 장벽. 나를 못살게 굶. 겁쟁이. 에어컨 청소 기사 방문 땐 변기 뒷구석에서 바들바들 떠는 작은 털 뭉치. 슬픔의 원인. 함께 침대에 누워, 내 두 개의 다리 사이에서 잘 때는 천사. 새벽 네시엔 향락에 미친 폭군. 인간들의 찻잔 속 폭풍 따윈 알 바가 아니라서. 나는 사소해지고, “사소해질 때만 해방되는 거야”라고 말 건네는(진짜?), 내 일상의 부표. 길조. 동동. 동동은 지금 키보드 자판을 산책로 삼아 발바닥 지압 중. 혹은 동동어(語)를 한글 변환 중. 나는 조심스레 의자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린다. 기다리는 사이 크레마가 올라온다.

동(動)/동이(同異)
동동과 나는 생활공간을 공유한다. 집 곳곳에 설치했던 방묘문과 울타리는 용도를 잃거나 철거됐다. 밖과 연결되는 창문에만 방묘창이 남아있을 뿐이다. 어느샌가, 정신을 차리니, 나는 동동의 활동을 통제하려다 그와 셀프 감금된 셈이다(비상 탈출용 창문을 몰래 남겼는데, 열어달라 떼쓸 테니 비밀로 두어야 한다. 다행히도 그가 글 읽기에 흥미를 보였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변명하자면, 치즈 태비(Cheese-tabby)인 그의 혈통을 거슬러 가면 야생 벵갈고양이가 발견될 것이다. 동동은 달린다. 수평만이 아니라 수직으로. 쌀알만 한 발톱으로 어떻게 저기까지 갔을까? ‘우다다’는 그의 무수한 자랑거리 중에서도 윗줄을 차지한다. 동동은 종종 나를 울음소리로 부르고, 따라오는지 연거푸 고개를 돌려 감시하고, 방묘문 아래 고양이 문을 지나 달음질친다(고양이에겐 발성언어가 아닌 몸짓언어가 주된 소통수단이기에, 울음소리는 몸짓언어 교양(literacy)이 저열한 인간에 대한 배려다. 혹은, 그만큼 애가 탔다는 뜻이다). DC코믹스 세계 속 아캄 형무소에서 마냥 나는 철망을 붙잡고 동동을 부르짖는다. 그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돌아왔을 때, 나와 동동은 창살을 끼고 마주한 배트맨과 조커다. 물론 내가 배트맨이다. 사악한 장난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한 번은 방묘문을 열어젖힌 적이 있다. 동동의 얼굴을 봤을 때, 나는 복수는 상처만 남긴다는 교훈이 진리임을 인정했다.
말을 바꾸자면, 동동과 내가 공유하는 것은 생활공간이 아니다. 윅스퀼(Jakob von Uexkull)은 모든 생물 및 사물이 기거하는 보편적 층을 가리키는 ‘세계(Welt)’와, 그들이 의미작용을 통해 형성하는 ‘환세계(Umwelt)’를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주체들은 세계가 아닌 환세계 속에서 생활하며, 이러한 세계‘들’ 사이에 공통의 장을 만드는 것은 부조리하다. 라투르(Bruno Latour)는 이를 계승하여, 모든 ‘생명체들’을 포괄할 수 있는 ‘메타-수프라-슈퍼-움벨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공통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동세계가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생태학적인 공동세계를 가능케 하는 건 공통세계가 아닌 협상과 번역이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단일-우주(Universe)가 아닌 다중-우주(Multiverse)의 가능성이다. 나는 동동과 WWE, 짜고 치는 레슬링을 하고, 하게 될 것이다. 그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에.
나는 동동과 같은 침대에서 잠들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인가, 동동이 침대 매트리스와 벽이 함께 만든(Co-production) 틈새를 파고들었다. 나는 호기심이 들어 그 옆에 엎드려, 그곳을 파보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기대하는 것,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어서, 즐거워버렸다.

글. 김대진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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