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먹] 천편일률의 학술지에 다양성 한 스푼이 필요해!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6월 14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월 18일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여름 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
「DOC와 춤을」, DJ DOC
1997년 발매된 ‘DOC와 춤을’은 30년 지난 오늘날 꽤나 용기가 되는 노래다. 그때는 어려웠기에 상상을 통해 부르던 가사가 시간을 건너 대강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청바지 입고 회사에 가는 사람도, 여름에 반바지 입고 등교하는 학생도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도 안 된다’라고 누가 비웃건 말건, 지금의 불편함, 그리고 현재의 제도에 맞서는 대안을 계속해서 중얼거릴 필요가 있다. 상상이든, 망상이든 상관없다.
학술지의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매우 겹겹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① 표준화된 IMRaD(서론-방법-결과-논의) 글쓰기, 초록과 키워드 형식 등을 준수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 같은 정형화된 글쓰기의 효용은 사실, 논문을 읽지 않고서도 인용할 수 있도록 하여 학계의 속력을 증진하는 데에만 있는 듯하다.
② 학술지가 요구하는 논문 분량이 점점 줄어들고, 많은 학술지에서는 기준 분량이 초과하면 초과분에 대한 추가 게재료를 받거나 어떤 경우에는 아예 게재를 거부하는 정책까지도 등장하고 있다. 단행본의 가치도 연구실적으로 인정이 안 되는 한국 학계에서, 논문 분량조차 제한하면, ‘긴 시간’이나 복합적인 맥락을 탐구하는 등의 커다란 야심을 가진 연구는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 질적 연구에서, 연구참여자들의 발화나 텍스트 자료 등을 충분하게 인용하여 독자들이 직접 연구자의 해석을 검증하고 또 연구자료를 느껴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이제 하지 말라는 말일까?
③ 각주를 줄이는 게 글로벌 스탠다드이니까 각주 숫자를 줄이라는 심사평을 여러 번 받은 일이 있다. 물론 본문의 흐름에는 지장이 없거나 오히려 거슬려서 각주로 빼는 것이라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본문보다 곁다리에서 인사이트를 얻게 되는 일도 잦다. 왜 하지 말라는 것일까?
④ 꼭 연구방법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그러니까 ‘체계화된’ 방법을 통해 도출된 ‘반복 검증 가능한’ 연구 결과에 대한 강조는 많은 연구자가 거짓과 참의 경계에서 구구절절 연구방법을 서술하도록 이끌고 있다. 꼭 그래야 할까?
⑤ 심사자는 저자를 결국에는 알 수 있다. 학위논문의 개작 투고나 학술대회에서 이미 발표된 논문인 경우가 많아, 검색하면 충분히 누가 쓴 논문인지 알 수 있고, 글 안에 자기 인용이나 문체 형태로 ‘지문’이 묻어 있는 경우가 많아 익명 심사라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이기도 하다. 반면 저자는 심사자를 모른 채로 끝난다. 추측이야 해 볼 수 있을 테지만, 오히려 엉뚱한 데 꽂혀 잘못된 사람을 심사자로 오인할 수도. 그냥 평등하게 서로 공개하면 안 되는 것일까?
⑥ 연관해서 ‘이의 제기’는 투고자에게 충분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이지만, (육아 휴직이 권리여도 못 쓰는 것 마냥) 잘 이용되지 않는다. 일단 이의 제기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 라기보다 이의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캐주얼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편집위원회가 이의 제기를 싫어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또 심사자가 누군지는 끝까지 알 수 없지만, 이의 제기를 누가 했다는 정보는 결국 편집위원회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알려지게 되어 있다. 빡빡한 논문 심사 일정에 이의 제기가 오갈 시간은 충분히 고려되어 있지 않아, 차라리 투고를 철회하고 다른 학술지에 투고하는 것이 투고자에게도 냉정하게 말해 이득이다.
⑦ 심사자는 평가하며, 심사자와 투고자 사이의 토론은 오가지 않는다. 심사자도 독자로서 충분히 오해를 할 수도 있고, 그런 부분은 대화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대화의 절차가 심사 과정에 전혀 없으니 그냥 오해를 기반으로 평가해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반론과 토론, 논쟁은 없고 게재 가능(accept) 아니면 게재 불가(reject)라는 결과만 남는다.
⑧ 익명 3인의 심사는 매우 공정한 느낌을 주지만, 사실 학계의 주류를 더욱 키우고 주변부를 더욱 주변화시키는 메커니즘이 될 수 있다. 심사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분야나 문제의식은 게재 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주류적인 정치적 지향과 배치되는 논문의 경우에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 배척될 수 있다.
⑨ 500시간을 들여 쓴 논문이든, 50시간을 들여 쓴 논문이든 똑같이 논문 1편으로만 카운트된다. 논문의 평가 기준이 질적으로가 아니라 아니라 수량적으로 된다는 얘기다. 다수의 연구자는 똑같은 500시간이면 논문 10편을 만드는 데 쓰고 싶어 할 개연성이 크다. 이 결과 학술 활동 전체가 수량적으로는 풍성해진 느낌이 생기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빈약해질 수 있다.
⑩ 내가 이상 쓰지 않은 문제들도 이미 많이 지적됐고, 연구자마다 느끼는 불편함이 무한히 다양하게 존재할 것이다.

나는 현재 학계의 학술지 제도와 문화에서 발생하는 여러 어려움이 결국 학술지의 천편일률화와 관련 있는 것이라 보며, 다양성 한 스푼을 더한다면 약간이나마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논문 분량 제한이 심해서 문제다? 충분한 분량으로 써도 취급해 주는, 또 추가 게재료 받지 않는 학술지가 일정 비율로 존재해 준다면 괜찮다. 익명의 심사자가 너무 내 논문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만 심사서에 써 놓는다? 지금은 모든 학술지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심사위원을 정하는 일의 전권을 편집위원회에서 갖는다. 만약 몇몇 학술지에서 심사위원 풀의 카테고리를 정해놓고, 어떤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심사위원에게 평가받을지에 한해서라도 저자의 결정을 따른다면 어떨까? 혹은 심사위원 3명 중 1명은 조금 더 학술지 발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이름이 공개된 편집위원 중 1명에게 저자가 요청할 수 있는 형태를 실험해 보는 건 어떨까? 심사자는 저자의 정보를 결국 알게 되고, 저자는 끝까지 심사자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정보와 권력의 불평등이 문제다? 심사자 정보를 심사가 종료된 이후에는 공개하는 방식의 실험을 하는 학술지가 몇 개쯤 나타난다면, 새로운 바람이 불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선배 연구자들이 악의를 가지고 학술지를 천편일률로 만들어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학술지의 많은 편집위원이 기존 학술지의 문제를 파악하고 지적하고, 또 개선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왔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그 시도들이 여러 이유로 가로막혀 왔을 것이다. 편집위원회 내의 발언권 차이도 있을 것이고, 끝판왕으로는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평가 기준에 따를 수밖에 없는 문제가 컸을 것이다. ‘탈락용 가짜 투고 논문’ 같은 것들을 젊은 연구자들이 쓰고 있으며, 어차피 게재될 생각도 없는 원고를 정성 들여 심사해야 하는 심사자가 있는 것과 같은 다양한 코미디들이 벌어지고 있는 원인이다.
다양성이라는 것이 오늘날 학술지에서 실현되고 있는 방식도 전혀 없지는 않다. 다만 그 맥락을 생각하면 좀 회의적이다. ‘이번 호 재심사’를 도입하거나, 돈을 더 내면 빨리 심사를 해 준다는 ‘패스트 트랙’을 운영하는 학술지들이 있고, 분명히 상호주관적으로 품질이 낮은 논문으로 평가될 글이 잔뜩 실리는 학술지들도 있다. 주로 심사료와 게재료로 장사를 해 보려는 손익 계산의 목적, 아니면 연구자들의 긴급한 입장을 고려해서, 가능하면 빨리 논문을 게재할 수 있게 해주려는 목적 정도에서만 학술지 제도가 변화하는 것 같은 인상이다. ‘약탈적 학술지’라는 이름으로 지적되고 있기도 한 어떤 흐름에 있는 사람들이, ‘학술 문화의 다양성’을 언급하고 선취해 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자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제도의 빈틈을 찾아내고, 규정과 규범을 적극적으로 구부리는 일은 사실 ‘비-학술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끝내주게 잘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잘할까? 잘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한다고? 그 귀찮은 일을?’ 하는 경외심이 ‘가짜 학회’를 운영하는 그들에게 들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제도고 문화고, 뭐든 바꾸는 일은 어렵고,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조금 냉정하게 말해, 변화를 만들기 위해 귀찮고 ‘더러운’(‘손에 물 묻히는’) 일은 하고 싶지 않으면서 툴툴거리기만 하는 상태로 남는 것이다. ‘학술적 목적’을 위해 학술지 제도를 바꾸려 하고 구부리려 하고, ‘다양성’이라는 레토릭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일, 그 실천(praxis)을 하는 게 결국 다양성 한 스푼을 끼얹자는 말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물론 말하고 떠드는 것도, 상상하는 일조차도 실천이다. 일단 ‘신진’에서 할 수 있고, 하고 있고, 하려 하는 일이기도 하다.

글. 김선기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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