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영주먹] 나는 나에 관해 쓰고 싶지 않다


ree

대학원에 왔을 때, 나의 삶은 아직 쓰여지지 않은 각본 같았다. 내 삶의 어떤 면들은 아직 쓰여지지 않은 내러티브이며, 재현되지 않아온 조각들로 가득해 보였다. 내 삶과 주변에 관한 정의는 부당하고 ‘나는 반대한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제곱한 뒤에 버무려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한 연구계획서를 작성했다. 나는 나의 세계에 관해 쓰거나 말하고 싶었다. 내가 만나고 지나쳐온 사람들과 통과해온 시간들에 관해 쓰리라. 연구자의 일상과 삶에 기반한 연구, 서로를 비추어보는(re-flect) 연구와 삶의 관계, 나의 삶에 기반한 나의 연구, 나의 삶을 객관화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연구. 그것은 도덕적으로도 옳은 일로 여겨지곤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저 개인적 욕심일 뿐 아니라, 사회과학 장 내에서 연구자의 ‘옳은’ 태도로도 간주되곤 했다.


특히 학술 장의 신참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더욱 자주 마주한다. 너는 어떤 삶을 지나왔는가, 너는 지금 어떤 상황에서 공부를 하는 중인가, 너는 왜 이 주제를 연구하는가, 너는 누구인가.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가 구직자의 지난 삶을 재구성하게 요청하는 것처럼, 학술 장의 신참자들은 세미나, 수업, 논문 심사 등의 자리에서 자신의 연구 관심사와 그들의 삶 간의 관계에 관한 은근한 질문을 끊임없이 요청받는다. 사회과학 장의 경우 과학 장과 권력 장의 논리라는 양쪽의 영향력을 받기에, 그들의 답은 그저 ‘과학적 호기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정치적 당위 또한 포함해야 한다. 너의 어떤 삶의 궤적이 이 연구 주제를 이끌었는가, 너의 어떤 주변화된 경험의 상흔이 또는 특권화된 경험에 대한 성찰이, 이 주제로 너를 이끌었는가. ‘너의 삶은 너의 연구로 발아되어야 한다!’


ree

그러나, 나는 이제 내 삶과 내 연구 사이의 관계에 관해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너무나도 어렵다. 나는 내 연구에 관해 말하고 싶은데 상대방은 그 주제를 통해 내 삶을 연역해내는 데에 더욱 관심이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 나는 그 대화에서 종종 피로감을 느낀다. 삶을 통해 ‘기계적으로’ 연구를 연역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는 서로에 관한 대화가, 나는 즐겁지 않다. 상응적인 기계적 유물론을 비판하면서도, 나 스스로도 타인의 삶과 연구의 관계에 관해서는 조야한 방식의 결정론적 태도를 취하곤 한다. 어떤 연구자에 관한 이해를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고 지나치고 싶은데, 그때 그이의 삶을 통한 거친 정의야말로 가장 손쉬운 선택지다. 세상과 삶에 관해 빠르게 비평하고, 또 그 인상을 강한 자기 확신에 기반해 진실로 에스컬레이팅하는 이에게는 (그것은 아마 내 자신일지도 모른다) 내 자신에 관한 어떤 정보도 주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삶과 연구 사이의 관계에 관한 신실한 대화들에 잘 동화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삶과 연구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말하는 과정에서 삶과 일상의 영역을 제한되게 정의하는 상황을 마주하기에 나는 그 대화가 즐겁지 않다. 예컨대 오래전 과거에 관해 말하거나 지리적으로 먼 공간에 관한 연구할 경우 ‘현실과는 동떨어진 주제나 이야기’로 갈음되기 십상이다. 일상과 삶이란 것은 항상 물리적으로 가깝고 시기적으로 임박한 제한된 ‘오늘-여기’로 간주되니 말이다. ‘오늘-여기’가 연구가 놓인 시공간적 자리를 다시 되짚어야 한다는 수사로 자주 쓰이는 만큼이나, 나는 ‘오늘-여기’라는 짧은 구절로 갈음하며 지나치곤 하는 가능한 연구와 삶 사이의 연결 사이의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들이 아쉽다.


초두에 제시된 정보값은 타인에 관한 이해 전반을 지배하는 경우가 잦다. ‘첫인상’이란 것을 깨고, 타인에 관한 이해를 갱신해가는 일은 분명 발생하지만 그리 빈번하지는 않다. 신참자로서 이따금 받게 되는 그 질문들에, 나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또는 보다 정확히 아직은 정리하고 싶지 않은 내 삶과 연구의 관계에 관한 잠정적 인과 또는 상관 관계에 관해, 눈을 질끈 감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방아쇠를 당기듯 말을 뱉는다. 성별, 거주지, 인종, 계급적 배경, 학위 과정에서의 궤적 등 나에 관해 알려줄 수 있는 어떤 정보들과 내 연구에 관한, 분명한 연관을 지닌 그러나 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정리되지 않은, 답을 내놓는다. 그것이 나와 나의 연구에 관한 출입문 보다는 적당한 결론이 될 것임을 미리 가정하고, 질문자를 냉소하며 결국 적당한 대화를 연기하곤 한다. 나는 그 대화 안에서 새로운 발견을 마주하거나, 연구자들이 서로에 관해 더욱 이해하게 되는 순간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 가정한다. 그 대화는 그저 ‘무엇이 당대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가’를 재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며, 주어진 학술 장 내의 ‘정치적인 것’에 관한 각본의 현 상태를 점검하는 순간일 것이라는 식으로 기대를 접는다.


ree

무엇보다 삶과 연구에 관한 대화가 그저 즐겁지 않고, 괴로운 이유는 이 대화를 나눈 뒤 내가 다시 그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부러 연구주제와 연결시켜 구부러뜨린 일상이라는 것에 면구스러운 순간을 마주한다. 내 스스로 내 삶의 주변과 중심을 이루는 성원들에게 강도 높은 상징폭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연구 주제에 관해 말하며, 질문자에게 결국 듣고 싶은 답을 하고 그것은 일상과 삶에 관한 해석의 혁신 보다는 선재하는 상징과 각본을 재생산한다. 삶과 일상을 잡아먹는 상징생산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런가 하면, 삶의 세계에서 나는 다시 대화를 돌아보고, 삶에서의 특권은 내려놓고 삶에서의 주변화에 대한 경험만을 표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지닌 특권에 관해서는 입 다물고, 내가 지닌 취약함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내 얼굴을 발견할 때에 나는 스스로를 견딜 수 없다.


요새 나는 연구자들과 내 삶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것과 연구의 관계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특히, 내게 소중한 경험과 삶에 관해서 나는 어떤 상징생산자의 해석도 용납하고 싶지 않고, 그리고 그것에 관한 나의 해석조차 포기하고 싶기에 입을 다문다. 어떤 대상, 어떤 사람, 어떤 사례에 관한 해석공동체 내에서 특권적인 위치가 되고 싶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나름대로 어떤 경험을 남겨두는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 역시 자주 한다. 나는 모순적이게도 연구자가 되고 싶지만, 연구자와 거리를 두고 싶다. 나의 연구도 결국 내 삶의 결과물일 게다. 내가 취하는 딜레탕티즘 또한 내 삶의 결과물일 게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관해 즐겁게 대화하는 순간을 점차적으로 잃어간 것 같다.


ree

글. 미미

편집. 김선기




Commentaires


사단법인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2019 by 김선기.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