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나도 대학원 선배가 있었으면 좋겠다

ree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세간의 말들과 달리, 대학원에서는 연구만큼이나 '관계'가 무척 중요하다. 지난 부산에서의 탁상공론이 보여주었듯 연구자의 형성과 성장에는 선후배와 동료간 상호작용이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요즘 대학원에서는 이 관계를 학습할 기회조차 점점 줄어들고 있다. 평등한 연구 문화를 지향하기 위해 대학원에서 사라진 위계가 각자도생의 연구문화와 결합하면, 역설적으로 서로에 대한 책임과 상호 돌봄의 감각을 흔들기도 한다.


이번 대담의 참여자들은 우연찮게도 대부분 석사에서 박사로 가며 소속 학교가 변동되었거나 학교 변동을 고민 중인 상태에 있다. 전공이나 연구관심사의 마이너함 등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학교에서 '깊은 관계를 맺기 힘들다'는 문제도 있었다. 대학원에서 사람이 사라지니 학교의 연구문화를 전승해 줄 선배도 없고, ‘동료됨’의 감각을 얻기도 힘들다. 선배 없음, 즉 ‘참조점 없음’이 주는 막막함과 동료/선배에 대한 이중적인 갈망들은 한국 학계에서 암묵지를 전승하고 관계를 매개하는 제도의 문화적 시스템이 약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ree

#참여자 소개


주드 석사 졸업생. 이론과 실천, 공부와 현실 사이에서 종종 길을 잃지만, 언제나 학교 안팎의 공동체에서 다른 길을 모색하는 데 관심을 둔다. 


반지 박사수료생. 대학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동료 그리고 친구와 함께 공부하는 게 즐겁다.


미키 박사과정생. 석사 때 같이 공부할 사람이 없어 외로웠고 박사과정 대학원은 원생이 적지 않은 학교인가를 전공 핏만큼이나 중요하게 알아보고 선택했다.


박사과정생. 대학원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평등하고 활발한 관계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불만은 그보다 더 많다.


리앙 박사수료생. 석사 시절부터 동료의 중요성을 체감했고 고립되지 않기 위해 대학 밖을 모색했다. 학계의 각자도생 문화, 상냥한 무관심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다.


ree

#1 학교마다 호칭 문화도 달라요


리앙 예전 탁상공론은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주제였는데, 이번엔 교수 얘기는 빼고 선후배 동료 친구들 얘기를 해보고 싶어. 대학원 호칭 문화부터 얘기해 볼까?


반지 나는 석박이 다른데 대학원마다 선후배 호칭 문화가 다르더라고? 석사 때 어떤 선배가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서로 부르면 안 돼. 우리는 학생이지 선생이 아니야' 하더라. 그래서 처음엔 서로 00님 정도로 하고 친해지면 언니라고 했어. 웃긴 건 언니는 가능하지만, 오빠라는 호칭은 없어. 그래서 남자 선배는 친해지면 그냥 이름을 불렀어. 근데 박사 가니까 또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길래 여기는 그런가 보다 했지.


주드 그렇구나. 우리 학교는 사실 연구실 문화라는 게 거의 없어서 호칭 문화랄 것도 없어. 각자 알아서 부르거나 OO님, OO씨 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내가 오히려 신촌에서 OO샘이라고 부르는 걸 배워와서 우리 과에 '문익점' 했어(웃음)


반지 신기하다. 그럼 수업 시간에는 동료를 뭐라고 불러?


주드 '저쪽'이라고 불렀어. (일동 탄식) 1학년 때는 정말 '저분' '저쪽' 이런 식으로 했어. 상대를 어떻게 불러야 되는지 전혀 모르니까. 호칭 문화 있는 학교가 오히려 부러웠어.


리앙 나도 박사 가고 학교가 바뀌니까 새로운 호칭 문화가 있더라. 처음엔 생소했어. 나중에 편해지면 말 놓고 이름 부르지만, 기본적으로 언니 오빠라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 느낌? 그래서 석사 때 오빠라고 부르다가 박사 오면서 말 놓은 사람도 있어(웃음) 오빠라고 불렀을 때보다 훨씬 관계가 더 평등해진 느낌이야. 간단한 호칭 하나가 관계를 많이 변화시키는구나 그런 느낌.


난 학부 때부터 학교 밖을 기웃거리면서 세미나 들었는데. 대학원생들끼리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지도 여기서 학습을 했어. 호칭 체계는 그냥 학교마다 다르다고 들었어. 우리도 지도 교수님이 '니들은 아직 석사도 안 땄는데 무슨 선생님이냐? 여기도 10년 전만 해도 다 언니 동생으로 불렀다' 하시거든. 우린 꿋꿋하게 그래도 샘이라고 부르지만.


미키 아니 우리 교수님도 개강총회 때 '너네끼리는 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니?' 하면서 뜨악해하시더라. 그래서 샘이라고 부르는 게 막 오래된 전통은 아닌가 보다 싶었어. 사실 학교 바꿔서 박사 입학하니까 다들 너무 깍듯하게 선생님이라 불러서 당황스럽긴 했어. 물론 학회 같은 데 가면 '진짜 선생님'들이 우리한테 존중의 의미로 선생님 선생님 하시잖아. 그래서 낯설지는 않았는데 대학원에 처음 오는 신입생들은 낯설었을 것 같아. 


주드 워낙 대학원은 나이대가 다양하니까 '샘'이라고 부르는 게 커버 범위가 넓은 것 같아. 예를 들어 뭐 한두 살 위 언니는 언니라고 하는데 10살 위 언니한테는 이모라고 할 수가 없잖아. 우리끼리 샘이라고 부를 때는 정말 '선생'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OO님'처럼 부르는 거니까.


반지 맞아. 어른들이 생각하는 샘이라는 호칭과 우리가 생각하는 샘이 뉘앙스가 정말 다른 것 같아. 샘은 일종의 그냥 뭐랄까 가벼운 호칭?


거의 추임새 같은 느낌이지.


ree

#2 이제 지도교수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반지 대학원 환경에 따라서도 관계 맺기나 네트워킹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다들 어땠어?


주드 우리 학교는 학과 재학생 전체가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없다 보니 소규모 랩끼리 친분이 더 강한 것 같아. 연구실 사람들끼리 뭉쳐서 뭘 하는 거를 체험해 보고 싶었어서 그런 데가 참 부러웠어. 근데 나는 학과에서도 지도 학생이 굉장히 많은 교수님의 학생이거든. 우리 연구실은 동료들 연구하는 주제도 그렇고 하는 것도 너무 달라서...


리앙 지금 제자가 몇 명이나 있는 거야?


주드 아마 10명 넘을 거야. 처음에 입학했을 땐 연구실 단위로 워크숍이나 세미나도 했는데 그걸 리드하는 사람이 졸업하니까 그런 문화 자체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더라. 사실 그런 건 지도교수가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되는 것도 있는데… 솔직히 우리 교수님은 재학생 제자보다도 졸업생들에게 관심이 많아. 난 사실 아쉬워. 솔직히 학과 사람들 서로 무슨 연구하는지 너무 궁금하잖아. 그러려면 총대 메는 역할을 계속 누군가가 해야만 해. 이건 대학원 자체의 문제이기도 해. 계속 누군가 기획하는 일을 해야만 하니까.


반지 대학원 내에서 뭔가 교류라는 걸 할 만한 공간이 많이 없었나 봐.


주드 정말 그래. 우리 학교 사람들 모여서 하는 얘기 중에 불평불만으로 제일 먼저 나오는 게 그거야. 우리는 너무 네트워크가 없다. 네트워킹할 기회도 없고. 그나마 내가 제일 열심히 밖에 다니면서 친구를 사귀는 축이라서… 그래서 우리 학과 사람들은 나를 굉장히 부러워해.


반지 그런 관계도 사실 네가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만드는 거잖아.


주드 그니까. 집에서 여기까지 매번 길게 지하철 타고 와가지고...


솔직히 학교 안에서 교수님들끼리 교류도 많지가 않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어.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교수들도 있고... 이게 진짜 문제인 게 다른 교수님 제자가 누군지도 모르게 돼. 수업에서 만난 어떤 분이 노동에 관련된 연구를 한다고 하면 '아 노동 연구자니까 어떤 교수님 밑에 있겠지' 이런 식이야. 일 대 일로 대화를 많이 해봐야 서로 친밀감이 생기는 건데… 사실 나는 동료 선후배 간 연구 주제 공유가 안 돼서 너무 답답하다고 생각해. 우리도 예전엔 교수님이랑 제자들이 다 모여서 밥을 먹는 자리가 많이 있었는데 요즘은 교수님이 바빠지면서 드물어졌어. 다 같이 모이는 자리는 있더라도 지도교수 화법의 문제도 있는 게 기본적으로 제자들 있을 때 대화를 일 대 일이 아니라 일 대 다 수준에서 말을 하시거든.


주드 일 대 다 대화? 그거 전반적으로 교수 특이지.


반지 참 그래. 그러니까 그때 학생들은 그냥 청중인 거고, 교수님 얘기만 하게 되는 거구나.


아… 우리 대담 다시 지도교수 특집으로 바꾸면 안 될까? 교수 얘기 안 하기로 했는데(웃음) 웹툰 〈대학원 탈출일지〉 알지? 거긴 이공계 대학원이지만 주기적으로 모여서 뭘 공부했는지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잖아. 나도 대학원 들어가면 저런 걸 하는 줄 알았고 대학원 와서도 그게 되게 필요하다고 느꼈거든. 근데 우리 옆 학교 교수님이 그런 걸 진행한대서 그 제자한테 물어봤더니 생각보다 형식적인 자리라 개개인의 친밀한 관계를 쌓는 느낌은 아니었다고도 하더라고.


주드 코로나 영향이 참 큰거 같아. 입학했을 때 학생들끼리 만날 수 있는 공식적인 자리가 있으면 좋은데 그런 게 많이 없어졌어. 그런데 내가 이중 전공은 아니지만 지금 두 분의 지도 교수님께 공동 지도를 받고 있거든? 다른 교수님 계신 전공 가서 도움받을 때도 있어. 거기 전공은 소규모고 연구 주제도 훨씬 통일성이 있다 보니 정말 분위기가 끈끈하더라고. 같이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당연히 같이 밥 먹고. 동료 선후배 누가 무슨 수업 듣고 누가 요즘 뭐 하는지 계속 업데이트하고. 뭐가 어렵다고 하면 선배들이 와서 설명해 주고 도와주고 책도 추천해 줘. 그러다 보니 학생들끼리 만드는 행사나 리딩 그룹도 많아. 참 부럽지. 거기에 너무 끼고 싶어서 친화력으로 몇 번 꼈는데(웃음) 나는 학교 밖 네트워크랑 같이 그쪽 전공 네트워크 수혜도 많이 받았어.


리앙 동료 관계 얘기하려면 교수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 너무 공감이다. 큰 학부 안에 소수 전공에 있거나 교수들끼리 알력 관계가 있으면 동료 관계가 다 안 좋아져. 그럼 전공생들끼리 대학원 안에서 협소한 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데 내 경우엔 그 관계가 평등하지도 않았어. 학부에서 넘어오다 보니 선배들이 동기인 상황이었는데 원래의 서열 관계가 그대로 정착돼서 절대 동료가 되지 않더라. 그럼 사실상 대학원에서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전부인 건데. 처음 대학원 들어가면 나의 지도교수가 나의 하늘이잖아? 만약에 거기서 내가 우리 학교를 벗어나서 만들 수 있는 관계가 딱 하나라도 더 있었다면, 석사과정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네트워크를 정말 만들고 싶었는데 지금은 학교 밖에서 활동하면서 쌓은 관계가 있으니 나아졌어.


반지 다행이다. 독려라는 게, 동기든 선후배든 내 동료들이 '나랑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는 감각을 가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


ree

#3 대학원에 ‘지박령’ 선배가 필요한 이유


이어서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이 사람들이 나의 동료다' 이런 느낌이 잘 안 생기는 것 같아. 다 같은 지도제자로 묶여 있지만 이게 ‘네트워크’인가 하면 애매하달까? 이 사람은 이 사람이랑, 저 사람은 저 사람이랑 개인적으로 엮인 느낌이고. 대학원에 왔으니 학술적인 공유가 이루어져야 '우리가 같은 걸 공부하고 있고 같은 거에 관심이 있다'는 생각이 들 텐데 그거 자체가 잘 안돼. 오히려 학교 밖의 단체들은 같은 주제에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이 그때그때 모이는 거니까 조금 더 학술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느낌은 여기서 받은 것 같고.


미키 내가 나왔던 학교는 박사과정 자체가 없는 학교야. 그리고 1년에 한 번씩만 신입생을 뽑아서 석사과정 학생 수가 많지도 않은데, 코스워크가 끝나면 졸업을 하건 안 하건 간에 학교에서 일단 사라져 버려. 학교에 박사 과정이 없다는 게 굉장히 치명적인 게, 어떤 학교에도 뭔가 지박령처럼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그 사람을 중심으로 뭔가 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1-2년 지나고 사라지면 동기들끼리는 친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의 어떤 커뮤니티가 전혀 만들어지지 못해.


반지 지박령 선배들 중요하지. 맨날 학교 가면 있는 사람들.


미키 그리고 보통 석논에 기대되는 수준이나 속도가 있잖아. 예를 들면 퀄리티가 박사에는 준하지 않아도 일단 기세로 빠르게 끝내야 된다든가 하는 거? 근데 교수님들이 그런 걸 안 알려주는 거야. 방임형이었어. 그냥 계획 세우고 논문 써와라야. 학교에 박사과정이 없다 보니 석사논문 완성시키는 노하우를 따로 전수해 줄 만한 선배들도 없어. 너무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거야. 어떤 수준으로 얼마큼 논문을 써야 되는지를 전혀 모르니까 다들 졸업 기간이 3년, 4년 이랬었어. 나는 그래서 박사과정을 선택할 때도 일단 사람이 많은 학교인가도 중요하게 생각했어. 너무 고립감이 심했거든.


주드 대학원 관계를 위해서는, 박사 과정생들의 역할이 생각보다 진짜 중요한 것 같아. 지박령 얘기도 했지만, 교수가 지도학생 개개인한테 쏟을 수 있는 케어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 지도교수처럼 대외 활동 좋아하고 바쁜 사람이라면 더. 그래서 박사과정들이 나서서 세미나 추천이나, 논문 쓸 때는 뭐부터 어떻게 해라, 교수님한테 몇 주에 한 번씩 가서 얘기해라 이런 걸 석사과정생들에게 조언해 주는 역할을 좀 해야 된다고 느껴. 나는 입학할 때부터 지도교수님 은퇴가 얼마 안 남아서 박사과정 선배가 없었거든? 그건 굉장히 치명적이었어. 게다가 나는 관심사가 퀴어 연구인데 우리 학교에서는 완전 ‘이중 찐따’란 말이야(웃음) 학부 안에서도 우리 전공이 마이너인데 그 안에서도 퀴어 연구자는 엄청나게 고립돼. 그래서 나는 어떤 학과에 누가 퀴어 연구를 한다면 막 찾아가서 독서 모임 제안을 해. 그렇게 학제 간 세미나를 몇 번 정도 기획해 봤는데 진짜... 너무너무 피곤한 거거든 그게.


반지 거의 '강제 학제성'인데 그거? (웃음) 학과에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다른 동료를 찾으려면 다른 과로 갈 수밖에 없네.


주드 정말 박사과정 지원하던 중에도 우리 학과에 단 한 명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다른 학교 사람 막 찾아가서 물어보고. 물론 이런 위치가 장점이 있긴 해. 생각보다 학교 생활을 편하게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나를 경쟁 상대로도 생각하지 않고 방해꾼으로도 생각하지 않으니까(웃음) 그러니까 관계 문제도 없지. 관계는 오로지 내가 창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난 다시 사람들 긁어모으고, 인스타에 올려서 사람 모집해서 세미나 열고.


나도 독서 모임이나 공부 모임은 그런 식으로 만들었어. 그렇게 해야만 해. 솔직히 말하면 학교 안에서 딱히 안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 학교 안에서는 지도교수 중심으로 위계가 있으니까 내가 별로 평등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세미나를 하면 뭔가 불편하단 말이야. 게다가 학생들 한 명 한 명은 잘 봐줘도 다 같이 모이는 건 안 좋아하는 교수들도 있고. 그러면 박사생이 있든 없든 도움을 받을 수가 없고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반지 비슷한 마음에 나는 코스워크때는 스스로 '지박령'을 자처했었어.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연구실에 있고 항상 만나면 요즘 무슨 공부 하냐 물어보고. 그러다 보니 나 입학 후로 만난 재학생들의 주제는 대부분 오지랖을 부려서 모르는 게 없었어.


주드 이런 훌륭한 박사과정생이 있어야 되는데.


반지 근데 수료하고 연구실 자리를 빼니 이제는 그런 것도 안 되겠다 싶어. 코스워크를 같이 하면서 생기는 친밀도가 없는 상황에서 대뜸 연구 주제랑 논문 뭐 쓰냐고 물어보는 게 스스로 좀 안 좋게 생각이 되더라. 개강 총회랑 종강 총회 때만 나타나서 '연구 주제가 뭐예요' 하는 거, 너무 명절 때 만나는 친척 어르신 같잖아? 지박령 자리도 빠질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


ree

#4 ‘위계 없는’ 대학원 문화의 뒷면


반지 이런 얘기도 하고 싶어. 앞서서 우리가 호칭 문화 얘기했잖아? 지금은 서로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지만, 예전에 내가 선배로 부르던 사람이 있었어. 그런데 선배 선배, 하니까 선배가 진짜로 선배 노릇을 해주는 거야.


리앙 ‘호명’됐구나…!


반지 그런 게 진짜 있어. 거기는 서로 선배라고 부르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는 아니더라도 몇몇 사람들이 실제로 선배 역할을 해줬어. 지금 내가 학교 밖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그 선배가 나를 이끌고 세미나도 가고 하면서야. 어쨌든 이런 인연도 선배가 만들어준 거잖아? 근데 내가 다른 학교를 들어갔더니 여기는 선배라고 안 불러, 위계 없는 평등을 지향해. 그러니까 선배 노릇도 안 해. 물론 소위 박사과정생이 석사들을 자기가 이끌어줘야 할 사람으로 보는 것도 되게 하대하는 거지만, 여기서 간혹 어떤 인상도 받았냐면 '난 초딩과 싸울 때도 진심을 다해서 맞짱을 깐다' 약간 이런 느낌인 거야. 정말 동등한 위치에서 한다기보다는 동등한 위치를 지향한다는 표피만을 두는 느낌도 있단 말이야. 초반에는 이런 대학원 연구 문화가 호칭이랑도 연결되어 있나, 이런 생각을 되게 많이 했던 것 같아.


주드 결국 훌륭한 선배의 존재에 우리는 영원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걸까?


반지 나는 되게 중요하다고 봐. 교수와의 대화법부터 교수님 대화에 대한 해석법, 발제나 토론은 어떻게 준비하고 프로포절은 어떻게 하며 등등은 사실 교수가 일일이 알려줄 수가 없고 정말 전승되는 거기도 하잖아. 그게 어떤 선배의 역할이 없으면 힘들다고 생각해. 위계라는 게 생각해 보면 위계의 위아래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일종의 역할을 부여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요구하는 면이 있어. 근데 ‘위계 없음’을 겉으로만 지향하는 분위기는 그런 책임만 없애버렸다는 생각도 해.


이거 진짜 맞는 것 같은 게, 대학원에서도 서로 간섭 안 하려고 하는 게 느껴져. 박사과정들도 뭔가를 알려주려고 하다가도 ‘너무 꼰대짓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게 느껴지고. 석사과정들도 당연히 ‘박사과정들 바쁠 텐데 귀찮게 하는 거 아닐까?’ 해서 안 물어보게 되고.


리앙 나도 나를 챙겨주고 내가 챙겨줄 수 있는 돈독한 선후배 관계를 원했고, 특히 나의 참조점이 될 수 있는 선배에 대한 기대가 있었어. 근데 학교 밖 학술단체에서 활동하니까 우리 학교는 아니어도 대충 대학 밖이라는 장을 아우르는 선배급 연구자들을 만나잖아. 그러니까 선배의 폭이 좀 넓어진다고 해야 되나? 그런 분들과는 어떤 학교나 학제에 묶인 관계가 아니다 보니 좀 더 편하게 막 물어보고 같이 일도 하게 되고. 그렇게 학교 밖 선배들을 알게 되면서 나름의 참조점을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됐어. 하지만 학교에 있는 한, 주드의 말대로 훌륭한 선배들을 그냥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을까 고민도 돼.


주드 원래는 지도 교수가 해야 될 일을 어쩔 수 없이 선배들이 나눠야 하는 구조가 있는 것 같아. 나도 학교 밖에서 지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거든. 독서 모임, 세미나, 파티, 문화 기획하면서 오히려 동료를 더 많이 만나게 돼. 활동가들이나 아니면 활동가나 연구자도 아닌데 책 많이 보는 그런 분들. 학교 밖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니 드디어 이제야 좀 혼자가 아닌 느낌이 들어. 사실 너무 오랫동안 대학원에만 있다 보면 고인물 되잖아. 그럴수록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야 되는데, 그게 꼭 당장 누굴 만나서 뭘 하는 게 아니어도 자기 네트워크를 찾아갈 수 있는 기회가 좀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게 없어서 아쉬워.


ree

주드 그래서 우린 뭘 만들어야 할까, 문화 관련 연구 비슷한 거 하는 사람들 단톡방을 만들어야 하나?


얼마 전에 그런 얘기도 했었어. 전국에 있는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들 이메일 주소를 싹 크롤링해서 전체 메일로 자기 관심 있는 주제 보내고 같이 관심 있는 사람을 찾고 싶은 마음이라고. 관심 있는 연구 주제가 있어도 이걸 하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고 스스로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란 말이야. 대화할 수 있는 창구가 너무너무 필요해.


미키 이런 거 사실 학회가 해줘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 않아?



(11월 1일, 2부에서 계속됩니다!)


ree




글. 리앙

편집. 김선우



사단법인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2019 by 김선기.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