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뭘까저건] 청년 정치 연구에서 대표성 개념의 한계와 함정


ree


문화연구에서는 representation을 재현 혹은 표상이라고 번역하지만, 정치학에서 이것은 대표성을 뜻한다. 대표성은 대의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핵심 원리 그 자체로, 인민의 의지가 대표자를 통해 제도적 과정에서 어떻게 구성 및 반영되고 있는지를 의미한다. 대표자가 제도 정치 영역에서 자신의 실천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고 구성하면서 인민을 표상하는 주체라는 측면에서 대표성을 본다면 문화연구의 재현 개념과도 일정한 접점을 가진다.

 

정치학자 한나 피트킨(Hanna F. Pitkin)이 1967년 출판한 책 <대표성의 개념 The Concept of Representation>은 네 범주의 대표성 유형을 제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전히 많은 정치학 연구는 그의 대표성 개념을 그대로 인용하여 활용하고 있다. 특히 여성 정치와 청년 정치 등 정치와 정치인의 다양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기획과 관련한 연구나 담론에서  인기 있으며, 사실상 거의 유일한 개념적 자원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 청년 정치를 논의하는 맥락에서 이 개념의 불충분함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 한계를 몇 가지 지점에서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피트킨은 대표성 유형을 형식적 대표성(formal representation), 상징적 대표성(symbolic representation), 기술적 대표성(descriptive representation), 실질적 대표성(substantive representation), 이렇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형식적 대표성은 대표자가 정해지는 제도적 절차 차원에서의 정당성에 관한 것으로, 적어도 선거 절차의 민주성이 확립된 국가에서 선출직 정치인의 형식적 대표는 이미 갖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상징적 대표성은 인민이 대표자에게 정서적으로 동일시하는 정도와 관련된 개념으로, 유권자들의 주관적인 인식이 어떻게 구조화되는지와 관련있다.

 

여성・청년과 관련하여 주로 연구가 이루어지는 부분은 나머지 두 개념이다. 기술적 대표성은 대표자가 인민의 인구사회적 특성을 공유하는 정도와 관련된 개념으로, 주로 정치인들을 그들이 가진 속성에 따라 분류하여 숫자를 센다. 유권자 중 여성/청년/노동자 비율에 비해 선출 정치인 중 그  비율이 낮다는 것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상식이기도 하다. 이를 정치학 개념으로 바꾸어 말하면 여성/청년/노동자 등이 기술적으로 과소대표(under-represent)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숫자를 세어서 비교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이 개념을 아예 의역하여 인구사회적 대표성으로 번역해 본 적도 있다. 실질적 대표성은 피트킨이 특히 중요하게 본 유형으로, 대표자가 인민의 이익과 요구를 실제로 반영하고 있는지와 관련하여 도출되는 대표성이다.

 

ree

(출처: 대한민국 국회 홈페이지)


여성 정치나 청년 정치에 있어서 오래 다뤄진 주요한 연구 관심사 중 하나는, 기술적 대표성의 증가가 실질적 대표성의 증가로 이어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청년 정치인은 청년의 이해관계가 정치적으로 관철되도록 돕는지, 혹은 청년의 정치적 효능감(political efficacy)을 증진하는지의 상관성 내지는 인과성을 살피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 밑에는, 사실상 더 많은 청년・여성・노동자 등 마이너리티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정당성을, 실질적 대표성 증가라는 민주주의적인 이익에서 찾으려는 기획이 있다.

 

이 기획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다. 첫째, 실질적 대표성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 명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청년 정치를 예시로 들어 논의해 보자. 법이나 조례에 맞추어 청년을 만 19~34세 또는 19~39세 등으로 조작적 정의를 할 수 있고, 그 정의에 따라서 청년의 기술적 대표성을 도출할 수 있다. 정치인의 나이를 기준으로 숫자를 세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의 실질적 이익과 요구, 이해관계와 의지를 정의할 방법이 있을까? 우선 그 많고 다양한 청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이해관계나 청년에게 보편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치 행동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지부터 따져보아야 한다. (여성이나 노동자 등 다른 집합명사로 바꾸어 생각해 보아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 연구 사례에서는 최대한 논의를 단순화하여 청년 관련 법안 발의 건수 등을 실질적 대표성의 대리변수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은 꼭 청년 관련 법안의 발의를 원하는가? 이러한 접근은 청년 인민의 의지나 이해관계가 (매우 자의적인) 청년 범주의 바깥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다. 다른 사례로, 청년의 정치적 효능감을 드러내는 변수이자 실질적 대표성의 측정 도구를 투표 참여율(turnout)로 정의한 연구의 발표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인민의 이익과 요구, 이해관계를 정의로 하는 실질적 대표성을 투표 참여 여부와 등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크다.

 

둘째, 청년이라는 자의적인 범주 안에서 기술적 대표성과 실질적 대표성을 연결하려고 하다 보니 생겨나는 논리적 문제가 있다. 정치인이든 유권자든 모든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 범주만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은 노동자일 수도 자본가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여성일 수도, 기혼일 수도 미혼일 수도, 성소수자이거나 특별한 직업을 대표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 모든 대안적 가능성을 접어두고 청년 정치인이나 청년 유권자에게 청년으로서의 활동과 이해관계를 기대하는 일은 (50대 정치인에게 50대를 대표할 것을 기대하는 경우가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한 마디로 말해서 적당하지 않다. 이러한 구도 하에서 청년 정치인은 청년 관련 활동을 하면 모든 국민이 아닌 청년만을 대표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청년 관련 활동을 하지 않으면 청년 말고 자기 의제에만 집중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중적인 부담에 놓이게 된다.

 

앞서 살펴본 대로 다소 조악하게 정의된 실질적 대표성과 기술적 대표성의 관계를 경험적으로 확인해 볼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난감해진다. 이를테면 청년이 아닌 기성세대 정치인이 청년 관련 법안 발의에 더 적극적이라는 상관관계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투표율을 종속 변수로 본 연구 발표 사례에서는 청년 후보자의 숫자가 많을수록(기술적 대표성이 높아질수록) 청년 투표율이 오히려 감소한다(실질적 대표성이 낮아진다)는 통계적 상관관계를 발견하는 난감한 상황이 도출되었다. 청년의 실질적 대표성을 높이는 데에 청년 정치인보다 오히려 기성세대 정치인이 낫다는 함의로 이어질 수 있는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조차, 청년 정치인의 숫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논의를 전개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이는 결국 대표성 개념의 유용성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셋째, 기술적이든 실질적이든 대표성 개념이 결국 선출직 정치인들의 존재와 활동을 기준으로 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가 있다. 특히  양당제 정치 구조를 가진 한국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표성을 정의하면 결국 대표성의 증진을 위한 가장 확실하고 거의 유일한 방법은 양대 정당이 결단하여 청년을 더 많이 공천하는 것밖에 없다. 소수 정당에서 아무리 많은 청년이 공천되더라도, 제도 정치 바깥에서 청년 유권자들이 청년의 이익과 의지, 이해관계를 의제화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이들은 선출직 정치인의 당선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정치학적 대표성 측정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결국 이 관점에서 청년의 정치적 대표를 위한 핵심적인 행위자는 청년 유권자들 자신도, 청년 정치인도 아닌, 정당과 공천 권한을 가진 유력 정치인이 되어 버린다.


이는 실제로 한국의 청년 정치에서 벌어져 온 일이기도 하다. 청년 정치인이 청년을 위한 정치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잘못된 상상은, 주요 정당이 나이만 청년인 누군가를 청년 정치 주자로 공천하면 그 청년이 청년 대표성으로 곧바로 이어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반복되도록 해왔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준비가 덜 되어 있거나 청년 인민의 이해관계와 별 관계가 없는, 청년이 청년이라는 기호를 점유한 상태로 청년 인민의 이익보다는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한계들은 청년 정치인이 늘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유권자에 대한 대표성 논리와 섞을 때 생겨나는 난점을 보여준다. 나는 청년 정치인이 필요 없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이 난점을 해소하고 복잡하게 꼬인 논리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청년 정치의 필요성을 청년 대표성에서 찾는 이 연결 관계를 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강하게 든다. 누구나 대표자가 될 자격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기성세대 남성이나 몇몇 엘리트 전문직 출신이 더 많이 선출되고 청년세대나 여성・노동자 및 다양한 직업 출신은 잘 선출되지 않는 불평등은 대표성 개념 없이도 비판할 수 있고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대표성 개념 안에서라면, 오히려 지금까지는 덜 연구되어 온 상징적 대표성과 관련하여 무언가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 (청년) 유권자들이 자신들을 현재의 대표자에게 상징적으로 투사하고 있는지는 주관적 인식을 묻는 질문 등을 통해서 측정 가능하다. 청년이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 위에서 측정을 시도하는 실질적 대표성보다는 오히려 ‘실질적인’ 무언가를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ree

글. 김선기

편집. 김선우



사단법인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2019 by 김선기.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