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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 남성 뷰티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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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릴스를 보고 있던 내 시선을 단번에 빼앗은 장면이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남성이 쿠션을 꺼내어 열심히 화장하고 있었다. 남성 뷰티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내 옆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이 장면은 글이나 미디어 속 재현이 아닌 정말 ‘현장’ 그 자체였다. 나는 조심히 유튜브를 끄고 그분과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현대 사회 속 개인들은 타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화장하는 남성을 본 사람들도 잠시 흠칫 놀란 표정(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커졌기 때문이었다)을 짓다가 곧 다시 휴대폰 화면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무관심을 알고 있었는지, 그분의 화장은 더욱 단계를 넓혀갔다. 쿠션에서 쉐딩으로, 파우더 처리에서 색조 립밤까지. 지하철 좌석 위에서 풀코스 메이크업이 완성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건 유튜브 속 재현물을 분석하거나, 화장실에서 숨어 화장을 하던 20대 남성을 목격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공공 공간인 지하철에서 기초부터 디테일까지 이어지는 화장을 두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동시에 양가적인 감정도 밀려왔다. 나 역시 남성 뷰티 연구자라고 자칭하며 화장을 하고, 그것을 학회 발표나 타인에게 드러내 왔다. 하지만 정작 화장 행위 자체는 늘 집이라는 폐쇄적이고 다소 안전한 공간에서만 이루어졌다. 내가 직접 화장하면서도 그것을 집 안에서만 실천해왔다는 점은, 연구자로서 ‘일상 속 실천’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더 고민하게 했다. 그래서 오늘의 현장과 (예비) 인터뷰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난관에 봉착했다. 대상자가 언제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를 어떻게 소개하고 어떻게 인터뷰를 제안할 것인가? 나의 창피함과 민망함은 차치하더라도, 지하철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다른 남성에게 명함을 건네받을 때 대상자가 느낄 수 있는 당혹감과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 스스로의 선입견이 있기에…)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졌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전략을 짰다. 


전략 1) 명함과 소개 쪽지를 황급히 건네고 사라진다. 

전략 2) 대상자가 내리는 역에서 따라 내려, 사람들이 흩어진 뒤 의도를 설명한다.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사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는데 그 역은 나 역시 환승을 위해 내려야 하는 곳이었다. 같은 역에서 내린다고 해도, 지하철을 벗어난 이후 그분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기에 내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기왕 명함을 건네기로 마음먹은 이상 포기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황급히 뒤쫓았다. 마침내 ‘적당히 사람들이 있으면서도 거리를 둘 수 있고, 남자인 내가 남자에게 말을 걸어도 지나가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라고 판단한 공간을 찾았다. 나는 명함을 내밀며 “저 이상한 사람 아니구요”라는 말로 소개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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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식으로 말을 건 경험은 나에게도 처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이상하지 않다”라고 강조하는 순간 이미 어딘가 어색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명함에는 나의 관심사인 ‘K-뷰티’와 ‘남성성’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기에, 적어도 나는 이상한 사람보다는 흥미로운 사람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그는 (적어도 내 판단에) 명함을 건네는 나를 흥미롭게 여기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곱씹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미디어 문화연구를 하면서도 내가 얼마나 ‘미디어’ 연구에만 천착해 있었는지를. 미디어 속 재현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활세계에서 그 재현을 마주하고 감각할 때 연구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펼쳐진다. 현실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관계라는 점에서 일방향적일 수 없고, 미디어 속 이미지가 전달하는 것과는 다른 정동을 준다.


이런 깨달음과는 별개로 현실의 결과는 단순했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이 어렵지, 그 뒤로는 쉽다고 하지 않던가.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조금 덜 어색하게,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요청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번 경험은 연구 대상을 어떻게 ‘발견’해서 연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쉽게 찾을 수 있는(혹은 접근할 수 있는) 대상들을 연구하는 것도 그 안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나의 문제의식이 과연 그 대상들에 진정으로 천착해 있었을까. ‘연구의 꼴’이 필요하다는 핑계로만 대상들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변치 않는 점이 있다면 적어도 일상은 결코 연구와 유리된 별개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그런 일상으로 들어간 연구자의 발걸음은 어떠한 결론으로 이어지든 간에 새로운 성찰을 던져줄 것이다. 그러니 더 두 눈을 부릅뜨고 사는 연구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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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우빈

편집. 김선우



사단법인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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