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먹] 그래서 일루지오가 뭔데, 이 오타쿠야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3일 전
- 4분 분량

가끔 나는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자질이 없는데 어거지로 여기 있는 걸까 싶을 때가 있다. 그 '가끔'은 바로 리딩 중 한 페이지를 다 읽었는데도 이해되는 게 한 문장도 없을 때. 이해되지 않음 자체보다도 저자에게 화가 치밀 때가 그렇다. "이해가 안 되는구나!" 다음이 "그럼 다시 제대로 읽어야지"가 아니라 "글을 왜 이렇게 썼지?"로 귀결되어 저자를 욕하게 될 때 ‘나는 배우는 태도가 안 된 걸까?’ 라고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본 이후에도 결론은 ‘역시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에 가닿을 때, ‘나는 자세가 글러먹었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하고 생각한다.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가끔은 실제로 화가 날 때도 있다. 저자가 글 안에서 전혀 독자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질 때 답답해진다. 대부분의 논문, 학술서의 경우 대체로 괜찮은 편이다. 애초에 그들의 독자는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을 가진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아간 지식을 얻으려는 학생임이 상정되어 있다. 하지만 명시적으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또는 “대학(원) 초년생을 대상으로” 썼다고 서문에서 밝혀놓고는, 해당 분과 내에서만 통용되는 용어들을 각주도 없이, 현학적인 표현들 안에 끝없이 나열해놓은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건 정말로 정당한 짜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가장 답답한 것은 대중들에게도 A라는 개념이 소개/이해되기를 바라며 책을 썼다고 서문에 밝히면서, 자신이 출간했던 논문을 목차만 떼어내고 그대로 나열한 책들을 볼 때다. 이제는 사장된 문화인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꺼내들고 싶다. “정말로 대중에게 가닿길 바라셨던 거… 맞나요?”
이런 글들은 단순히 저자의 원맨쇼 무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무대 위 저자는 독자라는 이름의 관객이 당황하든, 겁에 질리든, 종내 객석 밖으로 나가버리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또다른 비유를 시도하자면 이것은 관객이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나 마찬가지이다. 전혀 재밌지 않다는 소리다. 하나도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에는 두 가지 문제적 상황이 혼재되어 있다. 첫째, 지식 장 내부와 외부 사이에는 전문용어라는, 문장 문장마다 뛰어넘어야 하는 허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물론 전문용어의 사용 자체를 문제시 삼고 싶지는 않다. 삼을 필요도 없다. 분명히 어떤 현상들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말로 적어야만 온당하게 표현될 수 있다. 더군다나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포착하려고 하는 대다수의 현상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기에, 용어 설정과 개념 정의를 통해 그 의미를 한정 짓는 과정을 거쳐야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이만큼 가지 않아도, “일루지오(illusio)”라는 말을 매번 “장 내의 행위자들이 공유하는 장의 규칙에 관한 집단적 오인의 총체”라고 풀어 쓰는 일은 저자와 독자 모두에게 악몽 같은 일이 될 것이다.
한 층위 더 들어가 지식 장에서는 언어 자체가 지식 장과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이자 상징자본 자체로 기능한다. 어떤 것에 대한 앎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특별할 것도, 그렇기에 연구될 필요도, 내가 그것을 연구하고 있음이 의미 있을 이유도 없어져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용어 사용의 문제는 지식 장이 장의 자율성 유지를 위해 절대 버릴 수 없는 문제로 남으면서, 지식 장 외부와의 원활한 소통을 어렵게 하는 태생적 딜레마로 남게 된다.
이 딜레마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정하면서도 가끔은 언어가 벽으로 느껴졌던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아직 대학원에 들어가지도 않고 연구자 정체성을 찾기도 이전 여기저기 세미나를 들으러 다니면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아직은 나에게 모호한 표현들 (침투, 전략, 정동, 포박, 네트워크, 인식론적 등의 정확히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는 말들)과 어디서 들어는 봤지만 정확히 무슨 주장을 했는지는 모르는 학자들의 이름들(데리다적, 알튀세르적, 푸코적 등등의 함축어로 작동하는 수식어들)에 어쩔 줄을 몰랐던 기억. 하지만 동시에 “그게 무슨 의민지 모르겠어요”하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시침 뚝 떼고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어렴풋이 내지는 명확하게 이해하고 나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 지금, 이제서야 나도 학술 장의 내부자가 되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험은 언어가 경계가 됨을 목도한 순간이기도 해서, 어쩌면 누군가는 학술 장의 창문에 고개를 내밀어 슬쩍 의미 있는 것들을 구경하려 하다가도 과거의 나처럼 어쩔 줄을 몰라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까 걱정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돌고 돌아 두 번째 문제적 상황은 문체의 문제이다. 현학과 수사는 멋지지만, 그것이 지나치다고 느껴질 때는 일단 경계하게 된다. 표현 방식이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적절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것으로 기능하면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멀고 더 멀어진다. 물론 적확하게 사용된 수사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안의 메시지를 더 강력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적하고 싶은 대다수의 경우는 말을 거는 대상, 다시 말해 독자의 존재와 표현방식 관계를 고민해보았나? 하는 질문이 떠오르게 하는 글들이다. 앞서 이야기한,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글들은 대개 이런 글들이다. 어떤 용어와 표현을 내가 말하고픈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사용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학술 장 안에서 으레 쓰이기 때문에, 모두가 이렇게 적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쓰고 있을 뿐이고 그 안의 알맹이는 공허하다면, 이것이 한자어와 외래어의 사용 비율이 높은 ‘밈적 발화’와 다를 바가 어디 있는지 의문이 든다.
어려운 지점은 연구자들이 의도적으로 지식 장 안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배제하고자 어려운 문장을 쓰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모두 알고 있듯이, 그리고 신진에서도 빈번히 이야기되었듯이 일명 “논문체” 또는 “학술체”로 통용되는 학술 장의 글쓰기 방식이 명확하게 정해져있고, 이와 같은 글쓰기 방식을 따르지 않은 글은 ‘학술적이지 않다’거나 ‘전문적이지 않다’는 평을 받는다. 내가 쓰는 글이 단순 칼럼이 아니라 학술 장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문법을 따라야 한다. 그 문법의 규칙 밖으로 용감하게 나가는 것도, 문법의 규칙을 충분히 따르는 글을 써놓고서 그 글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를 하는 것도 매우 피로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우리가 어떻게 글을 쓸 것이고 어떻게 말을 쓸 것인가, 학술 장 내부의 글쓰기만큼이나 학술 장 외부와 연결되는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회에 대해 말한다 하면서 그 말이 사회와 전혀 ‘통(通)’하고 있지 않다면 이 상황은 분명히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고백 겸 자기반성으로 이 성토문을 끝내려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도, 가끔 원치 않는 이와의 원치 않는 대화를 1초라도 빨리 끝맺으려 외국학자들의 이름과 용어로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곤 한 적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어려운 용어와 수사들 뒤에 명료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나의 생각을 감추고 “뭔가”가 있는 것처럼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장 이 글에서도 부르디외 이론의 몇 가지 개념을 각주나 사전 설명 없이, 대다수가 알고 있을 것이라 상정하고 사용했다. 그러므로 고민은 지속된다. 우리는 자기모순을 넘어서 세계와 적극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까?

글. 눈(신문연 회원)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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