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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저건] 우리에겐 새로운 팬덤 언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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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수업에서였다. 그날은 ‘재현에서 대상화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날이었고, 누군가 쪽글에 여성 아이돌의 의상과 ‘팬덤’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팬이자 팬덤 연구자였던 나는 이내 손을 번쩍 들고 그건 팬보다는 대중의 욕망에 가까운 것 같다며, ‘대중’과 ‘팬덤’의 욕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감사하게도(?) 동료 몇몇이 나의 논의에 공감해주며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을 마무리하던 선생님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사실 일반 ‘머글’들은 대중과 팬덤을 잘 구분하진 않아요.” 머리를 띵- 맞은 것 같았다. 내가 ‘당사자성’에 매몰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앞서 쪽글에 나온 ‘욕망’은 팬덤보다는 일반 대중의 것에 가까웠기에 이것은 중요한 차이이자, 팬덤 연구가 말해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묘한 불편함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컨대, 팬이 아닌 누군가가 팬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건 팬덤이 아니에요” 혹은 “그건 팬덤을 잘 모르셔서 하는 말이에요”라고 고쳐 말하는 방식이 유발할 수 있는 불편감이다. 누군가에겐 비당사자라는 위치에서 용기를 낸 순간이었을 수도 있었던 것을 ‘정확성’의 언어로 문제 삼는 순간 그것은 연구자의 경계 짓기가 될 수 있다. 팬이자 연구자인 나(의 언어)는 ‘당사자로서 말하는 자’이자, 동시에 ‘팬이 아닌 타인의 말하기를 제약’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요컨대, 나는 당사자성이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팬이라는 ‘일상’적 영역에서도 적용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이내 다른 장면도 떠오른다. 그날은 ‘젠더/섹슈얼리티-퀴어’에 대해 공부하는 날이었고, 나는 쉽사리 토론에 끼어들지 못했다. 잘 모르는 세계를 엄밀성 없이 섣불리 이야기하는 게 두려웠다. 나는 그 침묵이 무지함에 대한 윤리라고 생각했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두려움도 더했다. 이 두 장면은 정확히 반대 방향에서 나를 멈춰 세운다. 하나는 너무 잘 안다고 믿을 때의 불편함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의 불편함이다. 그리고 이 둘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누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돌이켜보면, 후자의 침묵은 그 침묵조차도 내가 언제든 말할 수 있는 자리-다수자-에 있다는 위치성에서 기반했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는 말할 수 있는 자의 특권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경계는 생각보다 늘 불안정하다. 당사자로서 ‘과잉된 앎의 확신’은 타인의 발화를 위축시킬 수 있고, 비당사자로서의 무지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만이 말할 수 있다’는 원칙 또한 또 다른 침묵을 만들어낸다. 결국 말하는 자의 윤리는 누가 당사자인가를 구분하거나, 불편함을 회피하려는 거리두기의 기술이 아니라, 그 경계가 만들어내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견디는 일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망설이게 된다.


팬덤이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주목받은 것은 그들이 집단적 현상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에서 시작된 즐거움이 집단을 이룰 때, 팬들은 정치적‧경제적 차원에서 행동주의를 만들어낸다. 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불가능해지는 시대적 상황에서 강한 유대감과 결집력의 근원을 팬덤에게서 찾고 싶어 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개개인의 팬은 모두 다르다. 집단적 실천은 그러한 팬들의 다양성을 종종 지워버린다. 예컨대, 팬덤의 욕망은 유성애적(특히 이성애적 규범에 따른) 상상 속에 포획되며, 다른 차원의 욕망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팬의 특성으로 일컬어지는 것들 또한 어느 정도 보편성을 확보한 것 같다. 그 보편성은 ‘진정한 팬’이라는 담론 안에 포섭되고, 진정한 팬이 되기 위한 조건 또한 매일 갱신된다. 그렇다면 그 바깥에 있는 행위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결국 연구자의 언어는 경계를 그을 수 있다. ‘팬덤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순간, 그 정의 바깥의 팬들은 침묵하게 된다. 그래서 팬덤연구는 대상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말하는 자의 윤리여야 한다.


그런데 이 불편함은 단지 연구자의 윤리 문제에 머물지 않는 ‘언어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감각은 팬덤을 설명하는 언어가 그들의 실천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팬을 정의하고 분류하려는 욕망은 이러한 ‘언어의 한계’에서 비롯된 불안의 반영일 수 있다. 그러나 언어를 경계한다고 해서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불완전한 언어를 감수하면서라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필요하다. 이 불완전함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순이야말로 어쩌면 연구자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확성을 따지고, 범주를 정의하는 데 몰두하는 태도는 결국 팬덤연구를 ‘사례주의’(사례의 나열이나 개별 현상의 묘사에 치중하다 보니, 다양한 이론화를 시도하지 못하는 경향)에 머물게 한다. ‘네가 이해하는 팬은 틀렸어’라는 말에 방어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이야기되는 팬’이 누구인지 정의하고 범주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팬이 아니에요”라는 말은 이미 ‘진정한 팬’이라는 정의가 고정되어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 순간 팬은 장르별로 쪼개지고, 학술적 언어는 그 경계를 강화한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정의를 더 정교히 다듬는 일이 아니라, 개개인 팬의 차이와 모순을 함께 말할 수 있는 언어, 다시 말해 기존의 팬 이론을 확장하는 새로운 사유의 틀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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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팬덤의 언어가 필요한 게 아닐까?”


어느 날 팬덤 분과의 분과원이자 동료인 여찬이 그렇게 말했다. 십분 동의한다. 팬덤 연구는 다소간에 사례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경향이 있다. 집단적 실천에 주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들이 왜 그런지’를 설명하게 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각 집단의 팬 실천에 대한 사유에 집중하게 한다. 그렇게 케이팝, 정치, 게임, 영화의 팬덤을 구분하고 그들의 특성을 이야기할 순 있지만, 팬덤 연구 분야에서 그 차이를 설명할 공통의 이론적 언어는 아직 충분히 다양하지 않다. 이는 결국 서로의 연구를 향해 “그건 팬덤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미세한 균열 지점만을 찾게 할지도 모른다. 팬덤의 실천이 수행적이라고 할 때, 팬덤은 정형화될 수 없다. 오늘날 이뤄지고 있는 모든 ‘진정한’ 팬 실천이 담론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어떤 담론이 실천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피고 비판하는 게 연구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결국 이 차원은 “누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로 되돌아간다. 다시 말해, 이론의 언어, 즉 주체와 실천을 함께 사유할 틀로서 팬덤 이론을 성찰하게 한다. 요컨대, 팬덤의 수행적 실천과 정동적 실천을 모두 포착할 수 있는 다양한 이론적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를 세우는 일은 개인이 아닌, 함께 사유하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불편함을 연구의 시작점으로 가져가고자 한다. 내가 누군가의 말을 대신하거나 누군가를 규정하지 않으려는 윤리 속에서, 다시 말해 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언어를 만들어가는 실험의 장을 지향하고 싶다. 그 언어는 이론이자 윤리이며, 무엇보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팬덤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대화의 형식으로 다른 연구자들과 이어가고 싶다. 그것은 이론을 세우는 일이자, 서로의 경험을 번역하는 실험일 것이다. 우리가 이 불편함을 함께 견디며 언어를 만들어간다면, 팬덤연구는 또 한번 살아 있는 사유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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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윤희(신문연 회원, 성찰적 팬덤 연구 분과장)

편집.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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