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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 특별한 것은 없고요...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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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에서는 매주 월요일, 각자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 한 주 동안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이나 감정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월요수다’라는 명칭으로 만들어진 모임에서 각각의 구성원들은 각자 일상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떠한 감정과 생각이 들었는지를 허심탄회하게 공유하곤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시간에 꽤나 빈번하게 “특별한 일은 없고요” 내지, “별 일은 없고요”로 말문을 열었었다. 물론 간간히 (내가 생각하기에) 다소 이례적인 경험이 있었을 때 그것을 이야기 하곤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그랬던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특별한 일은 없고요”라는 여는 말은 동료들에게 다소간의 '밈'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었다. 어떤 동료들은 내가 그 말을 꺼내기 전에, “특별한 일은 없고요”라는 말을 선취하여 얘기하기도 했고, 드물게는 내가 항상 특별한 일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월요수다’라는 시간을 내가 꺼려하여 별 말 없이 지나가려는 하나의 전략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무언가를 말 할 것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진짜로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것이 맞긴 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는 것에 이유를 달아 그것을 굳이 특별한 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나에게 특별한 일이 없다는 것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다. 아니, 생각해보니 각자의 ‘일상’을 나누는 자리에서 꼭 ‘특별한 것만’ 말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특별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다시금 생각해 볼 때, 나에게 반복적 일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타인에게 특별한 것으로 감각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대충’ 말하고 넘어가는 것은 일종의 자기검열이 아닐까?


   이는 어쩌면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말하기의 윤리와 관련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재귀적으로 돌아볼 때, 관계에 대한 윤리랑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기라는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의 어원이 함의하듯이 공통의 것을 나눈다(communis-communicare)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단순히 메시지의 화자와 수신자 사이에 발생하는 일방적 의미 전달이 아닌,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참여한 당사자 간 ‘의미를 공유’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규모와는 상관 없이) 사람과 사람들이 모여서 의미를 형성하는 공동체의 형성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동료와 일상을 ‘나눌 때’ 대체 무엇을 위해 ‘특별한 일이 없다’며 나의 턴을 넘겼을까?


   고백하건대,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침체된 상태로 삶을 유예하고 있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겠다는 의지도 에너지도 고갈된 지 오래다. 그 연유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어느덧 멈춰버렸다. 나에게 남은 것은 ‘특별한 일 없이’ 루틴화된 일상뿐. 그래서일까? 나는 나의 일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렵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겠다. 이런 상황이 몇 년 째 반복되다 보니, 나에게 일상은 늘 별일 없이 사는 것 이상은 되지 못했다. 사실 별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별일인지 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일상을 타인과 나눌만한 무엇이라 느끼지 못한다.


   이는 내 일상이 나에게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나름의 판단과 더불어, 타인에게도 흥미로운 대화의 주제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끔 한다.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보니 이는 나 스스로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지만, 타인에 대한 나의 판단이기도 할 터. 나는 내가 어떠한 말을 하기도 전에, 내 말이 타인에게 가닿지 못할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타인에 대한 자의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어떠한 경험을 말할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이러한 일상의 형태 속에서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것이 타인에게 어떠한 가치가 있을까라는 타인에 대한 의심이 교차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특별한 일은 없고요” 내지는 “별 일은 없고요”라고 눙치며, 나의 일상을 나누는 것을 주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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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체된 삶과 그것의 반복. 이는 박사과정 도중 어느 순간 도둑처럼 찾아왔다. 팬데믹 시기, 대면접촉이 죄악시되던 시기 코스워크를 밟아서일까? 아니면 내뱉는 말과 그 이면의 경험을 통해 육고기처럼 암묵적인 등급이 매겨지는 학계 이면의 분위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꽤 오랫동안 동거동락하는 우울 때문일까? 왜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말할 수 있는 언어는 나에게 애당초 없었던 것처럼, 가라앉은 일상의 반복은 내 입을 막아버렸다. 그나마 내가 입을 열 때는, 세미나에서 어떤 이론이나 문헌에 대해 앵무새처럼 읊조리거나 수업에서 들어오는 질문에 기계적으로 답하는 것 이외에 나의 일상과 하등 관계 없는 것을 말할 때로 국한되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곱씹어 생각하면, 요 몇 년 간의 시간들은 나에게 꽤 치명적인 시간들이었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지기도 한다. 이는 다름아닌 ‘내가 더 이상 어떠한 생각도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라는 위기감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기실 나에게 돌아온 질문은 다시금 바깥으로 향하게 된다. 나에 대한 질문에 관한 생각이 멈추고, 그를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 역시 사그라들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상의 나눔과 나와 타인에 대한 질문과 말하기가 이루어질 리 없다. 물론 나는 당위적으로 나의 일상을 나누거나, 나에 대해 언급해야 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퇴행적인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나와 대화하는 상대방에게 나 자신에 대한 전시적 태도로 말미암은 피로감을 줄 수 있기에,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절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나에 대해 묻거나, 나의 일상을 나눠야 하는 자리에서까지 그래야 할까? 물론 이 경우에도 자기 연민과 자기 전시는 지양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늪 같은 상황 속에서 가라앉아 일상을 나누는 것을 외면하는 지금의 상황은 윤리적인 삶의 양태로 보기 힘들 것이다. 특히나 일상적인 삶의 주제를 나누고, 그로 인해 타인의 일상을 접하고, 나아가 타인의 말 걸기에 화답하며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고 관점을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던 그간의 내 입장을 고려하면, 이런 상황은 나 스스로를 기만하게끔 만드는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다소 기계적이고, 제도화된 형태로 보일 수 있겠으나, 동료들과 일상을 나누는 시간이 이따금씩 피로하고 힘들지만, 그 시간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말문을 잃은 상태에서 주억거릴 동력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이 늪 같은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데도, 나는 늘 ‘별 일 없는’ 일상 속으로 침잠하고 만다.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는 일상. 그럼에도 신진팀의 원고 청탁을 통해서나 월요일 밤의 작은 수다 시간을 통해서나 조금씩 타인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펴보고, 일상에 대한 언어를 찾아보려 한다. 이는 몇 년 전 혼자 책을 읽고 혼자 무언가를 끄적그렸던 시간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학술장이든 제도 바깥의 어딘가든 주변에 자리한 동료들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끔 한다. ‘나’라는 것은 불가분적 존재가 아닌, 여러 관계성이 얽히고 설켜 구성된 존재이기에. 그러기에 나의 바깥은 나와 구분되는, 나를 규정하는 무엇이기도 하지만, 나와 연결됨으로써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무언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별 일 없이 산다’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되기를 바란다. 이전에는 나 이외의 타인이 없는, 그렇기에 나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었던 침체된 상황의 반영이었지만. 이제는 ‘안녕’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다. 사실 늘 ‘별 일 없이 산다’, ‘특별한 것은 없다’를 입에 달고 사는 나에 대한 주변의 질문으로 인한 청탁글에 가깝다. 그렇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니 이 청탁은 나로 인해 다시금 일상을 돌아보고, 내가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의 필요성을 느끼게끔 하는, 일종의 ‘말 걸기’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건 내 과잉 해석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특별한 것은 아직까지 없지만, 특별한 것이 없는 일상을 맞는 곳이 동굴이 아닌 여러 관계망 속에서의 안녕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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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구승우

편집.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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