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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뒤사] 안희제의 숨겨진 핵심어들(Keywords)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인터뷰를 누구에게 요청할지 떠올려보다가 안희제의 이름이 퍼뜩 떠올랐다. 얼마 전 내가 연구 발표를 했을 때 고맙게도 플로어 질문과 코멘트를 해준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게 희제였다.  ‘논문 뒤에 사람 있다’고 하려면 이야기의 매개가 될 논문이 필요한데, 마침 그가 얼마 전 석사논문을 제출했다는 소식도 주워들었던 터였다. 목례 정도만 했었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준비한답시고 그의 노션 블로그 곳곳을 누비며 여러 글을 읽으니 왠지 카페로 입장하는 그에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희제도 화답해 주었다. 작가로서가 아니고, 연구자로서 하는 인터뷰는 처음이라 이 만남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 그는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망설이는 사랑>, <증명과 변명> 등의 단행본을 발간한 ‘인문사회 분야’의 작가이기도 하다.


학위논문의 주제는 많은 경우 자기 삶에서 출발한다. 작가로서 계속해서 글을 쓰고 계약을 하고 마감을 맞추고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며 살아온 최근 희제의 인생은, 출판 시장에서 책이라는 상품을 만들고 또 작가 스스로가 상품이 되는 노동 과정 전반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만들었다. 1년이 넘는 현장연구 기간을 거쳐 세상에 나온 석사논문의 제목은 <좋은 책 만들기와 ‘작가’ 되기의 곤란: 인문사회 교양 출판 시장의 가치화 실천>이다. 모든 논문이 그렇듯 핵심어들이 태깅되어 있다. 가치화, 시장 장치, 정동노동, 정동 자본주의, 계산, 출판 시장, 출판 산업, 주체성, 작가, 인문사회. 10개의 단어는 이 논문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포괄하고 있지만, 희제가 논문을 통해 무슨 말을 세상에 내놓고 싶었는지를 파악하는 단계로 우리를 데리고 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첫 논뒤사에서 나는 ‘키뒤키’, 키워드 뒤의 키워드 전략으로 우리의 대화 내용을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초록의 핵심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사실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희제가 크게 고민했을 숨겨진 단어들을 전경으로 꺼내보고자 하는 것이다




희제의 논문을 읽을 때 가장 생소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곳곳에 소설이 창작되어 있다는 것이다. 본문의 곳곳, 특히 새로운 내용으로 도입하는 부분에 어김없이 이론이나 연구참여자의 발언 인용이 아닌 소설이 등장해 이해를 돕는다. 논문에서는 van Voorst의 논의를 따라 인류학적 픽션을 “현실 세계의 친숙한 구조와 물질성 안에서 설정된 허구적 내러티브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문화기술지는 현실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늘 창조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허구적인, 소설적인 특성을 갖게 되는데, 이를 더 인문학적인 형식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사회과학 글쓰기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과학, 특히 질적연구를 기반으로 한 사회과학에서조차도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과 달리 실제 논문을 통해 다양한 글쓰기가 잘 시도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눈에 들어왔다.


"연구 윤리가 아니었으면 안 했을 거긴 하거든요. 연구 현장이 인문사회 교양 출판이다 보니까 워낙 좁잖아요. 그래서 이를테면 질병과 장애를 다루는 90년대생 남성 작가라는 데까지 익명화하더라도, 업계 사람들은 세 손가락 안으로 실제 인물을 추려낼 수 있죠. 그게 되게 어렵잖아요. 완전한 익명화를 하면 연구참여자의 고유성이 많이 사라지게 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이건 확실히 픽션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한테는 픽션이 익명성을 유지하면서도 제가 분명히 목격한 어떤 고유한 장면들을 안전하게 담아내는 방식이었어요. 저 자신과 연구참여자들 모두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어요."

논문에도 연구 윤리 보호를 위해 선택한 방법임이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 입말로 설명을 들으니 더욱 명확히 이해되었다. 이전에 인류학 기반으로 학위를 하신 선생님의 대학원 수업을 들었을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익명화를 하면서도 최대한의 자료를 이용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하셨다. 이를테면 연구자 자기 자신을 인터뷰해서 (혹은 자기기술지를 써서) 인포먼트(정보제공자)의 한 사람으로 익명 배치하는 방법도 가능하고, 시도되고 있다고 했다. 이후에도 결국 전통적이고 안전한 방법으로만 인터뷰 연구를 해왔지만, 규범에 내 연구를 밀어 넣는 일보다는 내 연구를 위해 적당한 방법과 정당화를 창의적으로 고민하는 일이 내게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인류학적 픽션 작업은 희제에게도 "윤리적인 도전"이었다. 단순히 소설적 기법을 사회과학 논문에 넣어도 될까, 지도교수가 그걸 허용해 줄까의 문제는 아니었다. 좀 더 실질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사실 최종 수정 전 원고에서는 소설의 분량이 훨씬 길고 자세했어요. 본심사 때 큰 지적을 받고 고쳤습니다. 인류학적 지식의 핵심은 부분성, 파편성인데 소설을 쓰다 보니 '전지적 작가 시점'이 돼 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연구자가 그 인물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서술돼 버린 거예요. 너무 매끄럽게요. 인간과 현상은 여러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인물이 가진 모순에 대한 부분마저도 너무 매끄럽게 서술을 해버리니까. 그래서 그런 지점에서, 사실은 연구 윤리를 위해서 채택한 방식이었는데 서술 방식이 윤리적인 재현과는 거리가 먼 방식이 돼 버린 거죠. 그런 문제가 있었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물 중심의 긴 서술을 들어내고 장면으로 쪼갠 거예요."

보통 우리는 가장 매끈하게 정리된 논문의 최종본만 읽게 되니까, 수정 과정에서의 이슈와 뒷얘기를 들으니 흥미로웠다. 인류학적 픽션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는 일이 연구의 신뢰도와 타당도 문제만이 아니라 연구윤리에 해당하는 고민을 새롭게 추가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희제는 본심사 이후 최종 원고 제출 전까지 썼던 글을 지우는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족히 백 페이지는 되는 분량의 인류학적 소설이 그의 저장공간 안에 미간행인 채로 남아있게 되었다.







서사가 있는 인물 중심의 소설에서 장면 중심으로 픽션 기법을 대폭 축소한 최종적인 결정은, 내가 논문을 읽기에는 좋았다. 특히 새로운 내용이 시작되는 부분마다 나오는 하나의 장면이, 독자들을 논문의 내용으로 더 친절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읽기의 운동을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리듬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구 맞추는 일과 글자 수 맞추는 일을 좋아한다는 희제는 "개인적인 형식 실험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희제가 쓴 다른 단행본에서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받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증명과 변명>은 모든 장에 '장에 앞서'와 '장에 부쳐'가 함께 붙어 있다. 본문 서술의 불충분함이나 오해의 여지, 필자가 서술 대상인 친구를 단순하게 서술할 위험을 메우려는 목적이다. 희제가 쓴 책의 목차를 보면 형식이 실험적이면서도 뭔가 한눈에 보기 좋게 잘 정리가 되어 있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교양 수업에서 '내용과 형식이 서로를 호출한다'라는 표현을 들었고, 그게 깊이 기억에 남아 있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그 이야기에 맞는 형식을 찾아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다고도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실 <증명과 변명>에 그런 형식을 만들었던 거는 제가 저를 못 믿어서 그런 거기도 했거든요. 만약에 '앞서'와 '부쳐' 없이 그냥 본문만 있었다면 내가 정말 원래 하려고 했던, 어떤 윤리적인 방식의 서술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형식이 나를 구속하게 만들어야겠다'라는 게 되게 강했어요."

사실 이 형식에 관한 희제의 관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TMI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면 도움이 된다. 장애인권 활동을 하며 인류학을 만나 "나 인류학 대학원 갈래"를 시전하여 인류학자가 되어 가고 있지만, 그의 학부 전공은 무려 '경제학'이었다. 보통 전공 변경의 서사는 이전 전공에 대한 큰 불만족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희제는 그러한 접근의 한계를 감각하기는 했지만 경제학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계량적 경제학 연구를 위해 필요한) 수학을 좋아해서 수학과 집합론과 해석학 수업을 들으러 갈 정도였고, 지금도 "매몰 비용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삶의 신조"를 가지고 산다.


"이게 또 한편으로는 정말 경제학과적 사고방식인데 저는 '제약 하의 최적화'를 정말 중시하는 사람이라서요. 그래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무것도 못 한다'와 동의어처럼 보여요. '선택의 점이 무한하면은 아무것도 못한다', '계속 선택 가능한 영역을 제약으로 좁혀줘야 된다', '그래야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제약으로서의 형식이 제가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형식 실험을 하지만 그 결과물은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게 제 제약 만들기의 기준이에요. 구조적 안정성을 만들어낸다는 그 목적 안에서 실험적이어야 돼요."



분명 구조적 안정성을 중시한다고 했는데, 희제의 석사논문은 가장 덜 구조화된 연구 지침을 제공하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 Actor Network Theory)의 접근을 따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ANT의 아리송함에 이끌리면서도, 이 방식으로 실제 논문을 쓴다는 게 무엇인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아 ANT로의 접근을 미뤄두고만 있었다. 희제에게도 ANT의 관점으로 경험연구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연구할 때는 어려웠어요. ANT를 적용한다는 게 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 맨 뒤에 인터뷰가 실려 있잖아요. 거기서 라투르가 'ANT를 아는 것은 쉽다, 그런데 ANT를 하는 것은 악몽 같은 일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걸 연구하다가 체감한 거예요, 너무 뒤늦게. 연구계획서 쓰고 이럴 때 ANT 부분은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진짜 ANT를 하려니까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그게 좀 어렵긴 했거든요. 사물 하나하나를 볼 때 '어디까지 파헤쳐서 봐야 하지' 막 이런 생각을 되게 많이 하고 그랬었는데."

ANT로 연구하기의 또 다른 어려움은 피어 리뷰의 산을 넘어가는 일이다. 언제나 다들 'ANT가 유행'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ANT에 대한 이해도가 연구자 집단 내에서 고르게 퍼져 있지는 않다. 특히 사회과학 연구자 중에서 ANT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경우도 없지 않다. 내 경우, ANT 계열의 책을 읽는 스터디에서 늘 ANT를 의심하는 사람들과 ANT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기억이 있다. 희제도 그 산을 넘어야 했던 경험이 있다. 학위논문 심사자들은 ANT로 직접 연구를 하는 선배 연구자이니 그 문제는 없었는데, ANT의 렌즈로 팬덤을 살펴본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했을 때의 일이다.


"심사 의견 중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게 딱 하나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 논문의 목적과 주제 의식에 맞지 않는 이론과 방법론을 제안을 하는 거예요. ANT에 대한 이해 없이 다른 이론으로 해보시면 어떠냐 추천을 한 거죠. 저는 ANT에 대한 되게 많은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ANT를 잘 모르면서도 간단하게 기각하는, 그런 비판이 많다고 생각해요. ANT는 권력과 위계를 다루지 않는다? ANT를 탈정치적으로 사용하는 사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요. <실험실 생활>이나 <젊은 과학의 전선>만 보아도 알 수 있듯, ANT는 기본적으로 권력과 위계가 만들어지고 실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최적화된 방법입니다. 구조를 다루지 않는다? ANT는 구조를 구조가 아니라 구조화에 대한 이야기로 다룹니다. 이미 주어져 있는 특정한 분석 틀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권력을 다루지 않는 건 아닙니다. ANT를 하는 입장에서는 제일 근본적인 부분에서 독자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선험적인 이론과 분석 틀을 단순 적용하는 게 아니라, 연구 대상과 관련된 여행을 계속해 나가는 ANT의 특징은 '출현하는 분석 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질적 연구의 전통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희제는 ANT가 선행 이론에 기대지 않기 때문에, 각자의 연구 주제와 관련해 "내 가까이에 있는 어떤 사람의 말 하나, 얼굴 하나, 경험 하나에서 소위 '빅네임' 이론가들에게 반기를 들 수 있다"고, 그런 "반학문적 성격"이 ANT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또한, 들뢰즈나 시몽동 등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회과학 연구자가 질적 연구를 하려 할 때 생기는 막막함을 해소해 주는, ANT는 철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좋은 매개자가 될 수 있다.




ANT 연구들을 읽을 때면, 섣부르게 설명(explain)함으로써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는 실용적 주장으로 이어지기보다는, 현상의 치밀한 기술과 묘사(describe)에 집중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희제의 논문에도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전면에 제시되지 않고, 출판 시장 내에서 가치화(valuation) 작업이 작가의 SNS로 대표되는 사적 영역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기술하는 데 집중한다. 그렇다 보니 연구의 결론이 비관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제시해 주지 않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희제가 쓴 논문의 흥미로운 점은 저항에 대한 얘기를 연구자가 자꾸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학위논문을 쓴 연구자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제약 없이 쏟아낼 수 있는 지면이 '감사의 글'이다. 감사의 글에서 희제는 "우리의 글과 책이 당장 무언가를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항의 물질적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라고 썼다.


"가치화가 아닌 다른 키워드로, 제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기는 해요."

꿈이라는 단어는 분명 논문의 핵심어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다. 희제는 꿈, 그것도 '꿈속의 꿈'이라는 알쏭달쏭한 단어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저항이라는 게 무엇인지, 가치화 실천에 포섭된 것처럼 스스로 묘사한 그 출판시장에서 어떻게 저항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지를 소상히 이야기해 주었다.


"저는 모두가 꿈을 꾸고 있다, 모두가 꿈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꿈 속에 있는 누군가가 꿈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너 꿈 깨!'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꿈속의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겠죠. 하지만 발화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어요. 꿈속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너 꿈 깨'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대로 '네가 각성하라'고 외칠 수 있어요. 이 방향으로 꿈의 안팎이 뒤집히죠.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는 위상수학에 나오는 ‘구면 뒤집기’예요. 위상수학적인 공간에서 구(球, sphere)는 그 구면이 찢어지지 않으면서 수학적으로 안과 밖이 뒤집힐 수 있거든요. 지금 상황에서 가능한 저항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인문사회 출판이 행위자들에게 만들어내는 '꿈'이라는 것이 우리를 열악한 조건에 계속 묶어두고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드는 잔인한 상황으로 우리를 내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드는 책과 글과 고민과 몸이,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꿈속의 꿈'들을 꾸게 해주지 않나. 그런 조금은 낙관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 희제가 인터뷰 뒤에 이해를 돕게 해 주는 짧은 글을 보내주었다. 그는 이것이 어찌 보면 극도로 비관적이고, 어찌 보면 극도로 낙관적이어서, 스스로도 여전히 고민이 되는 이미지라고 밝혔다.


구면 뒤집기, 혹은 위상동형의 저항
꿈 없이 살아갈 수 없게 되어 버린 우리는 꿈의 구멍을 찾기보다 꿈 안에서 나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안락해 보이지만 자세가 불편한 그 자리에 앉아, 몸 어딘가가 꺾인 채 꿈속에서 꿈을 꾼다. 낡은 꿈이 내게 주지 못한 새로운 희열과 안락함, 그것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 이것들의 동시성이 지속될 때 느끼는 막연함. 입버릇 혹은 습관이 되어버린 꿈 안에서 느끼는 막연한 감각은 이미 존재하는 새로운 꿈을 암시한다.
꿈속의 꿈을 통한 저항은 무언가를 파괴하거나 갈아엎는 것이 아니다. 불편한 자세로 선잠에 들었다 깼을 때마다 남는,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부적절한 소망의 매력 사이에서, 때로는 희미하게 때로는 생생하게 남아 있는 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이를 찾는 것이다. 지금의 언어를 다른 관점에서 사유함으로써, 혹은 지금의 언어에 안 맞는 말들을 욱여넣음으로써 서로의 꿈을 나눌 수 있는 이를. 새로운 꿈은 낡은 꿈의 문법을 통해 서술되고 말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꿈을 말할 때면 오탈자와 비문이 생긴다. 많은 이의 습관이 된 잘못된 띄어쓰기 혹은 이중피동, 혹은 방언이 표준어로 등록되는 것처럼, 오류가 전염되고 반복되면 문법이 된다. 오류가 문법에 포섭되는 것과 문법이 오류에 의해 변형되는 것은 같은 사건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진부한 일상 안에서, 그 어떤 체제의 허점이나 흠도 발견하지 못할 때조차, 우리가 단지 낡은 꿈에 몰입(immersion)하는 것만으로도 낡은 꿈의 내피에는 주름이 잡히면서 그 안에 파묻힌(embedded) 새로운 꿈이 우리에게 닿는다. 새로운 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자리에서 낡은 꿈에는 주름이 자글자글 접힌다. 꿈들이 교차한다. 뒤집힌다. 꿈속의 꿈은 앞선 꿈을 안으로부터 집어삼켜 소유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오탈자로 가득한 새로운 꿈의 비문(非文)은 낡은 꿈의 비문(碑文)이 된다.
어떤 구멍도 틈도 새롭게 생기지 않았지만, 안은 밖이 되고 밖은 안이 된다. 위상동형의 꿈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주름이 잡히고 안과 밖이 뒤집히며 계속해서 피어오른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상상력일 것이다.

최종 논문을 내기 전 논문의 가제에는 ‘꿈’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출판계가 만들어내는 특정한 방식의 꿈, 그리고 그 꿈이 시장을 유지하는 동력이 되는 메커니즘, 하지만 꿈이 ‘꿈속의 꿈’으로 이어지면서 생겨나는 변화의 가능성까지. 일단 마무리한 논문이지만, 희제가 한동안 계속해서 품고 있을 질문이기도 하다. 감사의 말을 마무리하는 문장이 인상 깊었다. “논문은 썼지만, 풀지 못한 질문이 너무 많다. 정말 중요한 질문이라면, 이곳이 아닌 어디서라도 다시 마주칠 테다.” 연구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같기도 했다. 마지막 저장 버튼을 누른 지 한 달 반 정도 뒤에 이루어진 이 인터뷰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희제에게도 좋은 마주침의 경험이었기를 바랐다.




글. 김선기

편집.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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