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열린 계엄 심포지엄 참여기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4월 5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일 전

12.3 비상계엄과 그 이후의 내란 정국은 한국사회 바깥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한국 바깥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얼굴의 사람들은 지금의 정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한 가지 방식은 아시아에서 사회운동 레퍼토리의 순환을 추적해보는 것이다. 가령 2024년 12월 21일, 여소야대 상황인 대만 입법원(의회)에서 야당은 공직자소환법과 헌법재판소절차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여당인 민진당 의원들은 입법원을 점거하고 몸싸움을 벌였으며, 의회 밖에는 1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여 개정안 반대를 외치며 응원봉을 들었다.1) 12월 3일 이후 광장에 등장한 응원봉은 금새 바다를 건너 대만으로 이어진 것이다. 현재 비상행동 집회에서 사회자가 트럭에 올라 DJ 역할을 하고 시위대가 춤을 추며 행진하는 방식은 한국의 퀴어문화축제가 오랫동안 해오던 퍼레이드인 동시에, 2000년대 일본에서 나타난 시위의 형식이기도 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번안되어 아시아 각지로 퍼져나갔듯, 저항의 수단으로서 언어와 표상, 문화적 형식은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다.
1) 해당 법안들의 개정안의 골자는 ① 선출직 공무원의 소환 청원을 위한 서명에서 서명자의 신분증 사본 제출 의무화, ② 헌법재판소 결정 조건을 재판관 과반 동의에서 2/3 동의로 상향 조정 등이다. “대만서 법 개정 놓고 여야 난투극…반대시위에 'K응원봉'도 등장(종합)”, 연합뉴스, 2024.12.21.
물론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자주 운위되는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식민지 역사의 유산이다. ‘계엄’은 대통령령을 통해 긴급입법으로 제정되는 것이 아니라, 1948년 7월 제정된 제헌헌법의 제64조(계엄선포권)과 1949년 11월 제정된 계엄법에서부터 법률로 규정된 것이다. ‘계엄령의 발포’가 아니라 계엄의 선포 또는 실시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하지만 지금도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공적인 지면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는 일본의 계엄령의 역사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헌법과 의회가 성립되기 이전인 1882년 8월, 태정관 포고 제36호를 통해 ‘계엄령’으로서 계엄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1949년 제정된 한국의 계엄법의 기본 골격이 일본 계엄령의 구조를 본 뜬 것이기도 하다. 1949년의 계엄법은 1980년대 두 차례 부분 수정이 이뤄졌을 뿐 근본적인 문제가 전혀 수정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포스트콜로니얼한 유산으로서 계엄의 역사는 한국에서는 흐릿한 흔적으로 기억되는 반면, 일본에서는 좀 더 쉽게 망각되는 듯하다. 올해 3월 8일 내가 참석했던 국제심포지엄 <한국 계엄·내란 사태와 그 이후: 동아시아의 위기를 생각하다>2)에서 받은 인상이 그랬다. 1948년 12월 제정된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1925년 제정된 일본의 치안유지법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대한민국 법률 제69호(계엄법)가 태정관 포고 제36호(계엄령)의 계보 속에 있다는 사실은 잘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아무래도 전후 일본에 ‘계엄’이 존재하지 않는 탓이 아닐까 싶다.
2) 장소는 도쿄외국어대학교 해외사정연구소. 도쿄외국어대학교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특정비영리활동법인 문화센터·아리랑 공동주최.

1945년 8월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본의 ‘탈군사화 및 민주화’라는 기조 아래 일본의 파시즘적 구조에 대한 전후 개혁을 추진했고, 전쟁과 군대 보유를 포기한 전후 평화헌법은 그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계엄은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하는 군에 의한 사회의 통치를 의미하는 만큼 (공식적으로는) 군대가 없는 일본에 계엄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계엄의 역사는 전전 일본의 파시즘 유산은 식민지인 한국에서 더 고약한 형태로 존속했던 반면 전후 일본에서는 일정하게 제도적 청산을 거쳤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다만 한국과 일본의 극우세력이 서로 공명하고 연대하고 있는 오늘날, 아이러니하게도 윤석열이 쏘아올린 12.3 비상계엄은 일본의 극우정치가들에게 계엄의 입법을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3) 저항의 레퍼토리가 국경을 넘듯 극우세력의 연대도 국경을 넘어 이어지면서 오늘날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위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3) “"한국 보니 '긴급사태' 필요"… 尹 비상계엄에 일본서도 개헌론 재점화”, 한국일보, 2024.12.5.
일본사회는 12.3 비상계엄을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토론자였던 기타노 류이치(北野 隆一) 아사히신문 편집위원은 12월 3일 밤 국회로 달려갔던 일본 기자들이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국회의 소식을 일본으로 전달했다고 언급했다. X(트위터)에서 아사히신문의 오타 나루미(太田成美) 기자의 영상은 조회수 89만회를, 구사카베 모토미(日下部元美) 마이니치신문 기자의 영상은 118만회를 기록했다. 하지만 내 사견으로는, 일본의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탈정치적인 대중은 대체로 잠시의 충격 이상으로 진지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듯하다. 보수적인 성향이 다수인 일본의 정치권과 미디어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실시에 충격을 토로했지만, 정작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기반한 한국 시민들과의 연대보다는 한미일 동맹의 유지 및 강화라는 이해관계에 좀 더 관심을 두는 걸로 보인다.
당연한 얘기지만, 일본사회는 한국 내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맥락과 위치에서 사태를 관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지적도 있었다. 토론자로 참석한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윤석열 정부가 북한을 도발해서 국지전을 일으키려 했던 사실과 관련해, 남한 정부가 북한 정부에 사과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 역시 반공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한 한국사회 바깥에서 있어야 보이는 쟁점일 것이다.
나는 일본사회와 여러 접점을 가지고 교류를 하면서 일본 사회 내에 리버럴 또는 진보적인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한국사회에 대해 대체로 민주화 세대가 공유하는 한국사회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고는 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그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기에, 현재 나타나고 있는 광장의 양상을 면밀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최대연합’을 실현했던 연대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와 현재의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차이, 현재 나타나는 광장과 민주당 사이의 간극, 광장 내부의 차별과 혐오를 둘러싼 갈등 등을 설명하면서, 구조적인 보수세력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12.3 친위쿠데타를 계기로 1987년 체제의 순환이 마무리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흥미를 표하는 참석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한국사회 내에서는 이런 시각이 드물거나 특이한 것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일본사회에는 잘 전해지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심포지엄에 참석한 연구자들은 일본사회 내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드물고 귀한) 분들이었고, 그렇기에 심포지엄은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발흥하는 극우포퓰리즘 또는 파시즘에 대해 위기감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였다. 향후의 시대가 낙관보다는 비관으로 예견된다는 점에서, 앞으로 더욱 국경을 넘어선 연대와 공조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정리해준 토모츠네 츠토무(友常勉) 도코외국어대학 교수의 폐회사 발언을 공유하는 걸로 글을 맺어본다.
“2024년 트럼프 정권 성립이라는 ‘위협’을 앞에 두고,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는가>는 바티칸, 대만, 홍콩, 한국에서 공유되고 있는 우파 및 우파 개신교의 반젠더, 반퀴어의 담론과 파시즘으로 향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위기감을 가지고 서술된 것이었다. 젠더를 표적으로 반젠더, 반퀴어, 반LGBTQ의 담론을 동원하는 신자유주의의 국가주의적인 공격은 적어도 트럼프정권의 미국과 윤석열의 한국 계엄에서 먼저 구체화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 시기의 관동 계엄사령부에 의한 계엄체제를 경험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일본 제국 식민지주의의 정치문화를 근원으로 하는 12.3 사태는 윤석열의 피해자론에서도 보여지는 것처럼 inflammatory한, 즉 염증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과 같은 통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포퓰리즘의 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그 inflammatory의 정동이 어떻게 계엄의 정치문화를 지탱해왔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사태는 낡으면서도 새롭다. 또한 계엄·내란에 대항해 조직된 assembly로서 광장의 운동은 염증 반응적인 정동에 대하여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세력이 어떻게 그에 대항하며 그것을 전유하는 게 가능한지 보여주고 있다. 반젠더의 담론을 돌파구로 삼아 진행된 신자유주의의 국가주의적 공격에서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즉, 급진 민주주의의 추진 이외에 선택지는 없다는 것이다.”

글. 최성용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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