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최애동향] 연구실



박사과정을 수료하면서 가지게 된 가장 큰 두려움은 내 스스로 짜임새 있는 하루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듣는 강의는 그 자체로 나의 일주일을 짤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끊임없는 발제문, 토론문, 쪽글 등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 주어지고 정해진 시간에는 학교로 가야 한다. 학교에 간 김에, 연구실에 늦은 시간까지 남아 공부를 하는 건 자동으로 따라오는 일정이었다. 굳이 내가 나서서 일주일을 그리고 하루를 분할하지 않아도 이미 분할된 채로 나에게 주어지니까, 그 흐름에 나를 맡기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박사과정을 수료하게 되니 갑자기 텅 빈 일주일이 내게 주어졌다. 물론 계속해서 해야 할 일들은 존재했지만, 그러한 일들을 어디서 어떻게 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고, 딱히 그게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선택지가 많아진다는 건, 다르게 말해서 선택지 그 자체를 만들 자유가 주어진다는 건 그다지 편안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막연한 걱정을 갖던 중, 신문연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신문연 연구실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갖는 만남으로부터 비롯되는 긴장감 그리고 일종의 작은 ‘단절’로 의미화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면서,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낼 마음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오전 10시쯤 연구실에 도착해 밤 10시쯤 연구실에서 나가는 하루로 매일의 쳇바퀴를 돌린 지 5개월 정도가 되었다. 공휴일이나 주말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일정이 있는 날에도 일단 연구실에 나와 단 몇십 분이라도 있다가 다시 출발하는 일이 잦다. 책상 앞 창가에는 식물 화분을 하나 데려왔다. 물을 주는 일정한 주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잎이 쳐지면 물을 듬뿍 주어야 한다는 운카리나. 연구실에 잠깐이라도 나와 살펴볼 대상이 하나 더 생겼다. 겨울에는 해가 뜨면 창가에 화분을 둬서 햇빛을 쬘 수 있도록 하고, 해가 지면 창틈으로 들어오는 찬 기운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연구실 안쪽으로 다시 화분을 데려와야 했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연구실에 나가야만 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래야만 했던 것’은 아니고, 내 스스로에게 그러한 책임감을 부여했다. 연구실에 나와야 하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낸 것이다.


운카리나 그리고 유민 작가님의 그림, “백년가약”
운카리나 그리고 유민 작가님의 그림, “백년가약”

다소 강박적으로 연구실에 나오는 것 치고는 딱히 공부나 일을 강박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연구실에 나와 핸드폰이나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다른 연구원들과 수다를 떨고,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낮잠을 잔다. 심지어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한 켠에 놓인 소파에서 쪽잠을 청한 적도 많다. 이럴거면 집에 가서 자라, 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그러기는 너무 싫었다. 사실 나의 진짜 ‘최애’ 공간은 내 방 침대인데도 말이다.


하루종일 그리고 하염없이 침잠하는 기분을 알고 있다. 이미 그렇게 해본 적은 많다. 어차피 잘 거면 집에 가서 자지, 굳이 연구실에 꾸역꾸역 나와서 잠을 자는 이유. 집에서 자면 정말 일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내 침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있으면 정말 아무 걱정 없이 바깥의 일은 다 머리 한 구석으로 밀어넣고 외면한 채로 잘 수 있다. 그래서 내 방 침대에서는 잘 수 없다. 적어도 밤 외의 시간에는 말이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나를 위해 안전 거리가 필요하다.



연구실은 내 방 침대와의 안전 거리 말고도 또 다른 꽤나 적절한 거리를 제공한다. 바로 사람과의 거리이다.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에너지 소모도 큰 편이다. 그래서 혼자서 힘을 충전할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내 스스로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도 원치 않는다. 연구실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이지 적절한 공간이다. 오전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점차 한 명씩 연구실에 오기 시작하면 사회성의 ‘일일 최소섭취량’도 채울 수 있다. 틈틈이 주워먹을 과자가 있고, 내가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다는 걸 아는 동료들이 가져다 준 티백도 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도 딱히 이상하지 않다. 이야기는 이어질듯 끊어진다. 어느 순간에는 서로에게 무관심해도 그것이 우호적임을 안다. 사실 ‘우호적 무관심’은 신문연 워크샵으로 부산을 갔을 때 마주친 한 카페의 이름이다. 해변열차를 타다가 창 밖으로 보인 그 카페의 간판을 사진으로 찍어놓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 찍을 당시에는 같이 기차를 탔는데도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어서 몰랐다 - 다른 연구원들도 동시에 그 간판을 찍었더랬다. 어쩌면 우리의 ‘추구미’ 같은 거였을까?



당연하게도, 연구실이 그저 무해한 공간은 아니다. 연구실의 공기는 따뜻할 때도, 무거울 때도 있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오지랖과 잔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서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면, 게다가 오랜 시간 같이 붙어있다 보면 서로 간의 접촉면이 커지고 그만큼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물리력은 온기를 만들 수도 생채기를 만들 수도 있다. 때로는 친구라서 편하다가도, 때로는 친구라서 더 불편하고. 때로는 동료라서 의지가 되다가도, 때로는 동료라서 더 선뜻 나를 내보이기 어렵다. 하지만 그러한 마찰로 인해 마모되는 경험은 분명 소중하다. 그 결과물이 더 뾰족해진 나일지, 더 둥글어진 나일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저 어떤 부분은 거칠어졌고 어떤 부분은 매끄러워졌다는 걸, 짐작할 뿐이다. 다만 적어도 그들의 호의와 선의를 믿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낙관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글. 조윤희

편집. 김지수



Comments


사단법인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2019 by 김선기.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