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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저건]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점처럼 흩어져 있어서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메아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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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의 경계를 넘어, 각자 다양한 위치에서 청(소)년의 삶을 (비판적으로) 고민하는 이들과 함께 사부작거리는 작은 장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 장을 향한 아주 작은 시도이자 고민의 일부다. 사실 청소년 연구가 중요한 이유를 남겨보려 했지만, 그보다 청소년 이야기에 고민하는 나의 질문에서 먼저 머뭇거려진다. 

‘청소년은 사회에서 어떻게 재현되는가. 어떤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침묵되거나 주변화되는가.’

‘그래서 이 질문들은 청소년에게, 그리고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모두 어느 시절을 통과한다. 그 시기에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들이 있고 우리는 그와 어울리는 이름으로 호명된다. 청소년기에는 그것이 ‘학생’이다(누구나, 아주 잠시라도 호명되었을..).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자세히 들여야 봐야 한다는 것!’) 어떤 이들은 학교를 벗어나 자신만의 배움을 이어가기도 하고, 혹은 원하든 원치 않든 학교 밖으로 밀려나 버린 거리의 누군가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그 경계에서 흔들린다. ‘학생’이라 불리지만, 그 이름에 자신을 온전히 담지 못하는 청소년들도 있는 것이다. 끝내 ‘버티지 못하고’ ‘학생다움’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존재는 모호하고 불분명해진다. 즉 나를 가장 편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소속과 이름이 흐려지면, 학교 밖 청소년, 비진학 청소년, 비행 청소년, 노동하는 청소년 등으로 호명되며 사회적 상상 속에서 이들은 ‘예외적인 존재’로 재현된다.


  그렇다면 버티거나, 떠나는, 또는 그 안과 밖의 경계를 아슬하게 타는 청소년에게 ‘학교’는 어떤 공간일까. 


  폭력적인 공간이었을 수도 있고,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의 공간일 수 있다. 혹은 친구들과 즐거웠던 추억의 공간일 수도 있지만, 그런 관계조차 맺기 어려웠던 고군분투의 장소이었을 수도 있다. 얼마 전 만난 청소년은 집을 나왔어도 학교는 빠지지 않고 가던 이유가 ‘급식을 먹기 위해’라고 했다. 그에게 학교는 공부보다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주로 입시 경쟁의 공간으로 상정되고, 그것이 교육의 본질인 양 여겨진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학교는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무대이자 살아남기 위한 경기장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망치고 싶은 감시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친구‧교사들과의 관계, 갈등, 폭력적인 문화, 저항하는 행동, 끼니를 고민하는 상황은 각자 개인의 문제이고 부수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학교’, ‘학생’이라는 범주 밖, 혹은 이를 넘나드는 청소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회와 교육이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자연스레 주변화하는지가 드러난다. 그러면 어렴풋했던 ‘경계’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그 경계를 그려보는 일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당연하게 생각하는 방식을 비틀고 어떤 존재를 자꾸만 주변으로 밀어내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 경계 앞에서 늘 조심스러움과 고민이 맴돈다. 이 경계를 글로 (영상으로 그림으로 ○○으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에게 마음을 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의 삶을 살피고 이를 어딘가에 남겨둔다는 것은 결국 나의 시선과 언어로 그 경계를 더 선명하게 만들거나 누구에게 상처주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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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고민은 매주 만나는 청소년들과 독서 수업을 하던 중에 더 팽창되었다. 책을 읽다가 대학원생이라고 소개한 나에게 갑자기 누군가 물었다.


  “샘, 대학원생이면 우리 연구 대상으로 만나러 온 거에요?”


  그의 기억 속 대학원생은 자신들을 연구하러 온 ‘관찰자’이자 ‘기록자’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하는 걱정이 번쩍 들면서 ‘아닌데, 샘은 너네가 좋아서 오는 건데. 그리고 너네랑 같이 책 읽고 싶어서 온거야. 그냥 그거야.’라고 답했다. 


  쿵 떨어진 솔직한 질문은 지금까지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 대답이 그 물음을 납작하게 만든 것 같아서, 그러나 ‘좋아서, 같이 읽고 싶어서’라는 진심이 그들에게 온전히 닿았으면 좋았겠다는 (욕심과도 같은) 바람이 커서, 또 한편으로는 ‘연구 대상’이라는 단어가 입 안에 모래를 한가득 문 것만 같은 답답함이 들면서도 그러한 표현은 쓰지 않을 뿐 우린 ‘연구 참여자’라는 말을 쓰기도 하니까. (상대방은 ‘대상’으로 느낄 수도 있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리저리 흔들리는 감정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고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청소년의 삶이 마음에 남으면서도 혹여나 내 존재가, 언어가 그들을 대상화하는 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움이 늘 머뭇거리게 한다. 하지만 그 흔들림을 지워버리는 순간, 어쩌면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만 바라보고 그들을 설명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청(소)년 이야기를, 그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을 찾고 만나고 나누고 머무는 일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 조심스러움과 흔들림을 공유하면서. 나 역시 그 경계에 함께 서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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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민정
편집. 김선우


댓글 1개


rping Zhuang
rping Zhuang
1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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