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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저건] 정창손을 좋아하세요?



정창손을 좋아하세요?


정창손(鄭昌孫)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아마 대부분 생소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아마 멍청한 질문일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기성 유학자들의 거세게 반발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당신이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지라도, 단연코 정창손은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군주의 역린을 들쑤시는 그의 탁월함은 오직 그만이 파직을 선고받는 기록을 세웠다. 

극적 갈등의 각별한 애호가인 작가들이 그를 놓칠 리 없다.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에서 세종은 정창손을 모티브 삼은 인물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네 놈이 선비냐? 네 놈이 유학자야? 유학의 근본은 끊임없는 수양으로 인간 본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자질이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유학에서 어찌 교화를 임금의 책무로 말할 수 있다는 말이냐!”

더욱 유명한 것은 KBS 드라마 『대왕 세종』(2008)에서의 다음과 같은 대사이다.


"감히 어디서 과인의 백성을 능멸하고 나와? 백성의 성품이 교화될 수 없다면 네 놈이 정치는 왜 해? 단지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선가!"

위 대사는 2016년 이후 ‘개돼지론’이라는 별칭과 함께 누리꾼들 사이에 유행한다. 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당시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나향욱의 명백한 기여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 내부자들(2015)의 대사를 인용한,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고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국민적 공분을 초래하기에 마땅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인사혁신처의 파면 결정에 불복했을 뿐만 아니라 끝내 승소한다. 박근혜 파면 이후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높은 기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지만, 고스란히 실망으로 전도되었다. 20만을 돌파한 청와대 국민청원은 파면 취소를 돌이키는 데 무력했다. 

사정이 이렇다면, 정창손의 파직과 나향욱의 파면이 유비(Analogy)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유비는 강력한 민본주의적 통치자에 대한 선망 또한 함축한다. 여기서 고전적 군주정과 삼권분립에 기반한 근대 헌정의 차이는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부재(不在)로써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정치적 무의식(Political Unconscious)이라 칭하기에 족하다. 이야말로 대왕 세종이라는 지나간 미래(Futures Past)를 호출하기 위한 필수적 절차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대체 어떤 말이었길래 세종의 ‘극대노’를 불러왔을까?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확실히 정창손은 사람의 ‘자질’을 언급한다. 그러나 세종–정창손 갈등에 대한 대중적 판본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자질이 태생적으로 고정불변한다고 단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혹스럽다. 그가 실제 문제 삼은 것은 『삼강행실도』(1434)가 백성의 자질 변화에 미친 효용이기 때문이다. 1428(세종 10)년 진주에서 아들이 부친을 살해하는 패륜이 일어나자, 세종은 백성 교화를 위해 효(孝), 충(忠), 열(烈)의 모범적 일화를 그림으로 반포한다. 쟁점이 삼강행실이라는 규범의 보급이었음은 세종의 반응으로도 확인된다. 그는 정창손을 ‘용속(庸俗)한 선비’라고 비난한 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고 반론한다. 1444(세종 26)년이면 세종의 통치자로서의 철학 및 경륜이 완숙에 이르렀을 시기이다. 그러한 군주의 정책 실패를 직설적으로 지적했다는 면에서 가히 정창손은 용감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는 차치하고, 백성을 도덕화하는 것은 선비의 책무가 아닌가? 물론, 유교 전통은 이에 관해서라면 다툼이 없다. 전장은 ‘무엇’이 아닌 ‘어떻게’의 영역에서 펼쳐진다. 새삼 떠올릴 것은, 조선은 단순한 유교 국가가 아니라, 성리학(性理學) 혹은 후대 용어로는 신유학(Neo-Confucianism)의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눈여겨 볼 점은 교(敎, Teaching)와 학(學, Learning)의 구별이다. 자율적인 수기(修己)를 타율적인 치인(治人)보다 우선했던 점이야말로 성리학의 새로움을 대변한다. 

다음은 공자를 얘기해야지. 고리타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새것을 말하려면 옛것을 말해야 하니까. 




마치 그러한 것처럼


허버트 핑가레트(Herbert Fingarette)의 전공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과 오스틴(J. L. Austin)에게서 유래하는 영미 분석철학의 정통에 속한다. 만약 그의 직장에 동양철학 전공자가 있었더라면, 그가 강의를 위해 『논어』 번역본을 섭렵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1972년, 핑가레트는 공자에게 내면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영미권 동양학계에 충격을 가했다. 엄밀히 말해, 그의 접근은 새롭지 않았다. 내면성의 신화(Myth of the Inner)에 대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비판 이래 앤스콤(G. E. M. Anscombe)에서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에 이르는 덕(Virtue)의 부활은 물신화된 근대 개인주의적 자아를 전복하고 대안 발견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 맥락은 핑가레트의 도발이 지닌 강렬함을 희석하지 않는다. 

문제는 근대화였다. ‘탈주술화’, ‘축의 시대’와 같은 개념은 인류의 신화시대로부터 인본주의로의 이행을 정당화했다. 특히 베버(Max Weber)는 유교의 철저한 세속화가 청교도가 나타낸 이상–현실 간의 변혁적 긴장을 거세했다고 봄으로써, 문명의 조숙이 역설적으로 정체(停滯)를 초래한다는 ‘고수준 평형의 덫(High-level Equilibrium Trap)’의 발상을 선취했다. 오리엔탈리즘이 수정-오리엔탈리즘과 역(逆)-오리엔탈리즘이라는 반작용을 낳듯, 선량한 서구 학자들이 유교 합리성을 긍정하는 동안, 야심 찬 중화권 학자들은 서구를 능가하는 유교 형이상학 발굴에 몰두했다. 첨예한 도덕적・정치적 쟁점에 핑가레트는 그저 무지했다. 수행성(performativity) 이론만이 그의 무기였다. 

1993년부터 2008년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은 혁명이었다. 일례로, 『주역』 초기 판본은 후대에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된 구절들이 동물 몸짓의 모방(Mimesis)이었음을 입증했다. 즉, 『주역』은 우주적 교설이 아닌 제사 지침서였다. 약 20년 전, 핑가레트는 예(禮)란 공연(performance)이라고 주장했다. 덕(德)은 관중을 매료하는 주술적(magic) 힘이다. 당나라 때의 문헌은 소리(聲)에 거동(容)이 더해져야만 크나큰 즐거움(大樂)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관객 소통 없이 신발에 코를 박고 연주하는 슈게이즈(Shoegaze) 밴드는 군자(君子)가 아니다. 

제사는 용(龍)과 함께 복잡해졌다. 리쩌허우(李澤厚)는 ‘사람 얼굴을 한 뱀’ 부족(華夏)의 정복 활동으로 온갖 동물 토템이 뒤섞인 데서 용의 기원을 찾는다. 용 부족은 마지막으로 새 부족(東夷)에 승리하지만, 갈등을 봉합할 제사는 이미 원시 신앙의 누더기이다. 이로써 제사에 일관성을 확보하는 제사장 개인의 카리스마가 더욱 돋보인다. 여기서 리쩌허우는 서양의 기하학적 선과 동양의 꿈틀대는 획 사이의 미감 차이를 도출한다. 그건 봉황의 몸부림을 용이 제압하는 구도일 것이다(龍飛鳳舞).

공자의 혁명성은 신정국가에서 귀신(鬼)과 하늘(天)에게 귀속되었던 카리스마의 원천을 행위 자체에서 발견한 데 있다. 이로써 폭력을 쓰지 않고 타인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의미의 덕은 세속화된다. 주나라의 귀족 교육체계인 육예(六藝)가 이를 뒷받침했다. 제사, 연주, 활쏘기, 전차 몰기, 글쓰기, 셈하기는 모두 고도의 몰입(Flow)을 요구하지만, 사물 또는 환경과의 협연(collaboration)이라는 점에서 집중(concentration)과 다르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다투지 않지만, 활쏘기만은 예외이다. 사심이 깃들면 화살은 빗나간다. 연주가 끊어지고, 전차에서 떨어지며, 붓질을 망치고, 셈은 엉킨다. 도(道)는 외줄타기이다(A Way without a Crossroads). 

공자 말하기를, “개나 말도 (부모를) 봉양하는데 경(敬)이 없다면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경을 ‘마음을 흐트러짐 없이 한군데 모음(主一無適)’으로 풀이했다. 예의 세속화라는 혁명은 일상의 의례화(ritualization)로 이어진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마음의 변덕스러움은 골칫거리였다. “시로 촉발(興)하고 예로 정립(立)하며 악으로 지속(成)한다.” 무언가에 이끌려 선(善)을 동경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는 예라는 실천을 구체화한다. 문제는 그것이 일회적인가, 지속적인가이다. 행위의 연속성은 마음의 일관성을 담보한다. 여기서 예악은 일체가 된다. 

핑가레트로부터 자극받은 서구 진정성 신화의 비판자들은 이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공자의 기획을 가상 의식(As-if Ritual)이라 명명하며, 사회적 매너를 단순한 규범이 아닌, ‘마치 그러한 것처럼’ 작동하는 질서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재정립할 것을 촉구한다. 

이 지점에서 코제브(Alexandre Kojève)를 소환하는 것은 흥미롭다. 헤겔을 프랑스에 이입한 주역으로서, 그는 『헤겔 독해 입문』 초판(1947)에서 동물적 욕구와 인간적 이상(ideal)의 대립을 통해 역사의 종말로서의 미국화 혹은 동물화를 선언했다. 그러나 1959년 일본 방문 이후 그는 욕구도 이상도 아닌, ‘순수한 형식’을 위해 목숨을 거는 태도, 즉 스노비즘(Snobbism)을 발견한다. 할복이 대표적인 예이다. 비록 코제브 헤겔 독해는 불성실하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그 단순화 덕분에 이분법을 넘어선 제3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일각에서는 스노비즘을 긍정적 가능성이 아닌 극복해야 할 한계로 파악했지만... 형식주의는 서구 사회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더구나 나치즘이라는 ‘정치의 예술화’를 경험한 이후에? 어쨌든, 기원전부터 오늘날까지, 순수한 형식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계보는 이어진다. 



형식에서 정신으로


김용(金庸)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은 북송의 종언을 고한 정강의 변(靖康之變, 1127년)에서 이름을 따온 곽정과 양강이라는 두 인물을 대비시킨다. 남송과 금이 80여 년간 양분해 온 대륙이 몽골의 침략으로 새로운 전란에 휩싸이는 시기를 배경 삼아, 김용은 이 소설에서 ‘한족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이처럼 송나라 때 성리학이 유교 혁신을 기치 삼아 발흥한 배경에는 제국의 붕괴라는 현실이 놓여 있었다. 상기할 것은 이것이 첫 번째 경험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후한의 붕괴에 이은 위・촉・오 시대는 『삼국지연의』를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중국 역사에서는 이후 170년간 이어진 남북조 시대가 더욱 중요하다.

제국의 붕괴는 문화적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말미암은 북부의 군사적 문화와 강남의 비옥한 자원에 토대한 남부의 상업적 문화를 갈라놓았다. 이는 다시 지성적 측면에서도 차이를 빚어냈다. 북부의 명망가들이 자위(自衛)의 규율・조직화를 위해 경전에서 예교(禮敎)의 근거를 찾는 훈고학(訓詁學)을 발달시켰다면, 남부의 명망가들은 돈과 무력만을 지닌 비속한 존재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세련된 품격과 사교적 토론을 강조하는 청담(淸談)을 발달시켰다. 청담은 당시 입신출세가 천거(薦擧) 즉 추천에 기반했기 때문에 엘리트적 자의식 이상의 실용적 기술을 의미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처럼, 유교 지식인들은 청담 문화를 통해 도교와 불교의 형이상학을 흡수하고 문학 및 수사학을 세련화했다. 『사조영웅전』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구처기(丘處機)라는 실존 인물로, 그가 속한 전진파(全眞派)는 유・불・도 통합의 경향을 상징한다.

송나라 때 성리학 혹은 도학(道學)의 주창자들은 대부분 남부 출신으로서 남북조 이래 전통을 계승한 한편, 앞 세대와의 차별점도 주장했다. 결정적인 것은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천거에 의존하던 기존 귀족층이 몰락하고 과거(科擧)가 제도화된 것이다. 새로운 사대부들은 가문이 아닌 능력으로 출사했다는 데 자부심을 가졌다. 동시에 사대부의 정체성이 신분의 구속에서 풀려나자, 서민과의 구별짓기는 더욱 미묘한 곳에서 발견된다. 범중엄(范仲淹)은 이를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先憂後樂)”고 표명한다. 이제 선비의 선비다움은 가문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교정된 품행이 아닌 개인적 심리에 자리 잡는다. 물론 그들이 실질적으로는 지방 지주 등 유력가 자제로서 경제・문화・사회적 자본의 특권을 누렸다는 사실은 자의식에서 쉽게 무시되었다.

이런 자의식의 발로가 고문(古文) 운동의 부활이었다. 당나라 때 한유(韓愈) 등의, 옛사람의 ‘형식’이 아닌 성인의 도(聖人之道)라는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당시에는 일부의 일탈적 운동이었으나 송나라 때 왕안석(王安石)에 의해 과거시험 평가의 기준으로 확립된다. 더욱이 왕안석은 이를 과감한 제도 개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추구했던 것은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일종의 복지국가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행정 시스템은 관료의 부패를 억제할 수 없었다. 신법의 파국과 북송의 멸망은 도학의 실패를 의미했을까? 오히려 남송의 지식인들은 국가 주도의 제도적 시스템을 불신하고 형식이 아닌 내면의 정신으로 더욱 철저히 파고들었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이룩한 혁신은 특기할 만하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발견이 아닌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성인의 도를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검증할 수 있을까? 결정적으로 그들은 유교를 우주론(Cosmology)으로 확장함으로써 교의 학으로서의 전환, 혹은 내면화를 완성했다. 유학의 일반 원리를 수립했다고 해도 좋다.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답지를 베끼는 게 중요해? 원리를 이해해야지!” 

혹시 오늘날 소위 ‘일타강사’들의 슬로건이 떠오른다면, 정확하다. 암기에서 논술로의 교육체계 전환은 당시 사교육 시장을 활성화했는데, 주로 서원(書院)에서 이루어졌다. 지방 곳곳에 자리 잡은 서원의 활성화는 명문가들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했는데, 과거제도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관직의 수는 줄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낙오하거나 관직에서 밀려난 선비들은 고향의 서원으로 돌아와 생계와 명망을 부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학연을 통해 명문가들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확립했다. 널리 알려진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이라는 조목은 사대부가 공적 직위 없이도 내면의 수양에서 가문의 결속으로, 그리고 향촌 사회의 통치로 이행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예로부터 유교 전통에서 진나라의 군현제와 대립하며 이상화된 요순시대의 봉건제는 학을 매개로 삼아 비로소 실현된 셈이다. 



되돌아와서


따라서 '교'란 답지를 베끼는 것, '학'은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라 해도 좋다. 더욱이 교와 학의 대립은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과 지방자치의 대립을 의미한다. 

이상의 맥락에서 정창손과 세종의 대립을 다시 이해한다면? 세종의 『삼강행실도』는 국가에 의한 교의 확립을, 정창손은 지방 사회에 의한 학의 육성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조선 중기 이후 사림(士林)에 의해 지방자치 조직으로서의 향약(鄕約)이 널리 형성된다. 향약은 촌락의 자치적 규약에서 출발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향촌 사회에서 사대부들이 평민들을 통제하고 기득권을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 또한 내포했다.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은 그 자체로는 선악으로 구별할 수 없을뿐더러, 앞서 살펴보았듯 사대부들의 지방분권론은 명문가의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있었다. 궁극적으로, 성리학의 발달 과정은 귀족 문화에서 벗어난 유교 능력주의가 능력의 기준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다시금 경제・문화・사회적 자본에 토대한 주류 문화의 확립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다시 질문해 보자.


어때요? 정창손을 좋아하세요? 




글. 김대진

편집.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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