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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동향] 더블디와 함께하는 특별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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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 A.K.A. Dong-Dong

 

인류의 펜 끝에서 처음 새겨졌을 법한 양피지의 물성은 온데간데없지만, 0과 1로 직조된 그물에 매인 한 문헌이 전하고 있듯, 새벽 네 시에 추락하는 천사에 대한 목격담은 유서가 깊다(〈신진〉 6호를 참조하라). 그는 내려간다. 모르페우스(Morpheus)가 주재하는 꿈의 영토에서 침대 위에 놓인 인간의 가랑이 사이로, 다시 훌쩍 뛰어서 침대 밑 마루로. 성대가 불안하게 울리면 인간은 그가 군림하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으로 내팽개쳐진다. 나는 비몽사몽 중에 소리를 더듬고, 이윽고 황금빛 형체를 발견한다. 턱을 치켜드는 고양이. 손가락이 턱을 긁으니, 음조가 변한다. 우리는 안심을 공유할 수 있다.


많은 집사들이 고양이의 새벽 행동에 따른 고충을 호소한다. 언뜻 고양이가 야행성이라는 세간의 인식에 비추어봤을 때 이는 본성상 피할 수 없는 갈등인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일 뿐이다. 고양이가 야행성이 아닌 박명박모성(薄明薄暮性)이라는 사실은 일단 무시하자. 요점은 고통의 진짜 원인이 행동 자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물론 행동은 소음 등 사소한 불편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나를 못 견디게 하는 건, 동동이 내 관심을 끌기 위해 작은 오장육부가 담긴 튜브 같은 몸뚱이를 비틀 때다. 그럴 때 고양이 행동 전문가인 존슨-베넷(Pam Johnson-Bennett)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라고 조언한다. 체벌은 물론이고 “안 돼”라는 말조차 금물이다. 존슨-베넷이 집사 면허 시험 감독관이라면 나는 실기에서 낙제할 것이다.


동동이 관심을 요구하는 것을 알아챘다고 해서 곧장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의사소통 의도’의 파악이 ‘의미 의도’의 파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률이나 학문의 영역에서 시각적 증언이 청각적 증언보다 공신력을 얻는 데 비해, 대체로 인간과 고양이의 교감은 촉각, 청각, 시각의 순으로 보증된다. 인간의 몸짓언어 교양(literacy)이 저열한 탓에 고양이는 음성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다양할 수 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고양이의 소리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고 있을 가능성을 유쾌하게 인정하며 말한다. “나는 고양이를, 특히 가르릉거리는 고양이를 절대 뿌리칠 수 없다. 고양이는 내가 아는 동물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가장 영악하며 가장 똑똑하다.” 한편, 집사에게 머리를 비비거나 쓰다듬도록 내어주는 행동은 애정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과학자들에 따르면 이는 단순히 체취를 묻히기 위한 것이지만, 브래드쇼(John Bradshaw)는 취선이 분포한 다른 부위에 대한 접촉을 꺼린다는 점, 반복해서 냄새를 맡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부정한다.


동동이 턱을 들면 내가 긁는 것은 둘 사이의 의례(ritual)이다. 여전히 나는 그가 나를 부를 때, 진정 애정을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둘의 관계는 촉각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종종 서로를 오해하고, 때로는 간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내가 네 곁에 있기를. 네가 전하려는 의미를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의미를 전하려는 너를 알아채는 내가 있기를. 동물 행동 전문가들은 이런 보호자의 태도가 반려동물의 분리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건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는 시쳇말에 대한 패러프레이징(paraphrasing) 같기도 하다. 불안은 확실함의 징표를 요구한다. 때론 그 징표는 또 다른 불안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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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Dream

 

밤이 불안과 깊은 관계를 맺어온 것은 행위가 배제되는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 행해지는 행위들은 무의식적인 암묵지에 의존한다. 문고리를 돌리는 사소한 행위조차 생각대로 손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며, 걸음걸이는 지면이 체중을 지탱하리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행위는 그 자체로 의식의 수면 아래 놓인 수많은 믿음을 확신시킨다. 성공만이 아닌 실패도 마찬가지다. 문고리가 잠겨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더라도, 손을 움직여 문고리를 잡고 비틀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무의식적 앎은 생물학적이거나 물리적인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화적 또는 제도적인 사실들 역시 암묵적 지식에 해당한다. 가령, 동양권에서 인사하기 위해 허리를 굽힐 때는 상대가 해당 동작을 인사로 받아들이라는 문화적 약속이 전제된다. 언어행위이론(Speech Act Theory)을 주창한 오스틴(J. L. Austin)은 행위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 의도(Intention)와 관습(Convention)을 제시한다. 친밀감을 표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 성취가 기대되는 문화적 관례와 결합할 때만 행위가 된다. 설(John Searle)은 이를 정신의 작동 방식으로 확장하여 배경이론(Background Theory)을 제시한다. 그는 우리의 정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두 가지 대표적인 형식인 믿음과 바람 의식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배경 위에서만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낮이야말로 무의식이 활개를 치는 영역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꿈, 백일몽, 공상의 영역에서는 우리의 기본적인 믿음들이 의심스러워진다. 자명한 전제들의 상실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인간이 지상에 발 딛고 거주한다는 사실이 도외시될 때 우리는 창공을 가로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우리는 수렁 같은 땅 밑으로 침몰하기도 한다. 만일 백일몽이 현실이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영화 〈썬더볼츠〉에는 행위의 의도가 결정적으로 실패한 인물의 사례가 등장한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자신에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 저항했지만, 되려 어머니에게 “넌 상황만 악화시킨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 경우 그를 좌절시킨 것은 성인 남성을 힘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아닌 어머니로부터의 선고이다. 원초적 기대의 배반은 그에게 양가적인 성격을 형성한다. 그는 한편으로 행위가 의도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회의하는 소극적 면모를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무모함에 탐닉한다. 그의 자기파괴적 행위는 때론 약물에 중독된 상태로, 때론 의식적으로 행해진다. 이런 양가성은 그가 초인적 능력을 얻자, 센트리(Sentry)와 보이드(Void)라는 인격으로 분열한다. 각각 신과 허무를 자처하는 두 인격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양자는 대자적(對自的)이지 않은 즉자적(卽自的) 존재의 두 형상이다. 타자와의 매개가 없는 그의 백일몽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은 무의미로 전락한다.


손을 들거나 걸음을 옮기는 단순한 ‘행위 의도’와 달리, 의미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의사소통 의도’의 경우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더욱 복잡한 믿음들이 관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믿음들은 가끔 언어를 통해 명시화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상징으로 표현된다. 동동이 내게 머리를 맡길 때, 나는 촉각에 의지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다. 어쩌면 이건 내 믿음이 연약하다는 고백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이에는 더 많은 의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더 많은 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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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대진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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