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할 닉네임을 입력하세요: <게임 토크 클럽> 운영기
2시간 전
4분 분량

모임에 가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독서 모임, 영화 모임, 운동 모임… 세미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동안 젠더, 퀴어, 장애, 노동, 방법론 등 온갖 주제로 세미나에 참여해왔다. 세미나에서 만난 동료들과 또 다른 세미나를 여는 재미가 있었고, 비슷한 결의 다른 전공, 다른 학교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 재미에 직접 세미나를 기획해 이끌어보기도 했었다.
세미나의 큰 틀은 대부분 비슷하다. 함께 책이나 논문을 읽고, 필요하면 돌아가며 발제를 하고, 그러다 친해지면 끝날 때마다 함께 모였단 핑계로 술을 마셨다. 공부든 자기개발이든 시작은 제법 거창했지만, 세미나 끝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건 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세미나는 지식을 얻는 자리라기보다 관심사가 겹치는 새로운 사람을 얻는 자리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데 세미나 장소가 학교 바깥으로 넘어가면서부터 나는 종종 불편함을 느꼈다. 학교 바깥인데도 사람들은 꽤 자주 서로의 학교, 전공, 지도교수, 연구 주제를 물었다. 악의가 없다는 건 잘 안다. 학회에서는 흔한 인사이기도 하고. 그런데도 그렇게 오가는 질문들이 묘하게 불편했다. 모두가 대학원생도 아닌데도 학계의 문법을 그대로 가져와 서로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거다.
사실 이런 질문은 세미나가 아니어도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거의 모든 자리에서 반복된다. 어디서든 나이와 직업, 출신 지역과 학교를 묻는다. 친해지고 싶어서 묻는 거라고 해도, 나는 나의 대답들을 토대로 내가 재단 당할 것만 같았다. 물론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나 역시 남을 그렇게 판단하는 데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누군가가 나보다 좋은 조건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괜히 그 앞에서 말하기가 꺼려지곤 했다. 사람들에게 평가받을 것 같았고, 무시당할 것 같았다. 사실 세미나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지도처럼 펼쳐 놓고 이 사람은 어디쯤 있는지 가늠하느라, 정작 하려던 이야기는 한 박자씩 늦어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모였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두려움이 앞선다는 건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끔이가 되었을 때 기존의 문화를 완전히 벗어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진짜’ 함께하는 경험을 해 보고 싶었다.

이번 여름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에서 연 <게임 토크 클럽>이 그 실험의 무대였다. 게임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잘 이야기하는 것을 목표로, 함께 게임을 비평해 보는 세미나로,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시간까지 넣었다. 같이 게임을 하려면 사람 사이가 편해야 하니, 이 세미나는 유독 관계가 중요했다. 게임 속에서든 밖에서든, 같이 노는 사이에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서로 편하게 말을 걸 수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더더욱 내 지난 경험을 토대로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방식으로 이끌어 보고 싶었고, 그에 맞게 몇 가지 규칙을 마련해 보았다.
그 시작인 안내부터 신경을 썼다. 보통은 이끔이가 구성원들의 연락처를 모아 단체 카톡방을 만드는데, 나는 오픈카톡방을 열고 각자 한글 1~4자로 된 닉네임으로 입장해 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게임 세미나이니 서로 닉네임으로 부르면 오히려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메일에도 “만날 때마다 게임 정모하는 기분일 것 같죠?”라고 슬쩍 적어 두었다.
세미나에서는 다이소에서 산 라벨 스티커를 하나씩 나눠 주고 각자 닉네임을 써서 가슴팍에 붙이게 했다. 세미나가 끝날 때까지 서로 그 닉네임으로 불러 달라는 부탁도 함께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홍보 포스터에 이미 본명이 나가 있긴 했지만, 나 역시 ‘주디사’라는 닉네임으로 참여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 달라고 했다. 이끔이도 같은 규칙 안에 있어야 이 규칙이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다 같이 하는 놀이가 될 것 같았다.
이어진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전반적인 설명을 마친 뒤 돌아가며 1분 자기소개를 했다. 다만, 준비된 자기소개 틀에 맞춰서 말이다. 나는 우리가 함께 대화를 하고 게임을 하기 위해 미리 알면 좋을 정보가 뭘까 생각했고, 우리 세미나에 딱 필요한 정보들만 요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 닉네임 ] 입니다.
저는 [ 장르/키워드 ] 게임을 좋아합니다.
요즘 가장 많이/자주 하는 게임은 [ 게임 이름 ] 이고,
인생게임을 하나 꼽자면 [ 게임 이름 ] 입니다.
여러분들과 [ 기대하는 점/궁금한 점 ] 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내심 사람들이 당황하진 않을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다들 재미있어했다. 빈칸이 정해져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부담이 줄기도 했다. 좋아하는 장르나 인생게임 같은 건 그 자체로 이야깃거리가 되니, 소개가 곧 대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규칙, 세미나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각자의 신상 정보(?)를 밝히지 말 것. 대신 마지막 주차가 끝나면 그때는 말해도 된다고 했다. 돌아보면 이 약속이 세미나의 핵심이었다. 닉네임도, 라벨 스티커도, 자기소개 틀도 결국 이 약속을 지키기 쉽게 만들어 주는 장치던 셈이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사람들은 처음엔 어색해하더니 어느새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는 게 익숙해졌다. 마지막 주차 세미나가 끝나고 우리는 영락없이(?) 함께 술을 마셨고, 약속대로 신상을 밝혀도 되는 시간이 왔다. 돌아가면서 이번에는 ‘진짜’ 자기소개를 했다. 본명은 뭔지, 지금 어떤 일을 하는지, 나이는 어떻고 어디에 사는지…
당연하게도, 서로 비슷한 배경의 사람도 있었지만 상당히 다른 배경의 사람도 꽤 있었다. 나처럼 대학원을 다니거나 졸업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절반이나 됐다. 게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게임하는 게 좋아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임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도 꽁꽁 잘 숨겨져서, 심지어 이끔이인 나도 그제야 안 사실들이 많았다. 만약 이런 이야기가 첫 주차부터 오갔다면 어쩌면 누군가는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더 기억에 남는 건 그 다음이었다. 소개가 한 바퀴 돌고 나자 사람들은 이런 게 뭐가 중요하냐며 머쓱하게 웃었다. 방금 들은 직업이나 소속도 기억이 안 난다고. 그냥 OO님은 나에게 OO님이라고. 두 달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이미 그 사람을 충분히 알려 주고 있었던 거다. 더 재미있는 건 이제 서로의 본명을 알게 되었지만, 세미나 끝난 지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OO님 하며 닉네임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틀을 이제는 갖고 놀기까지 한다.
나는 나의 기이한 실험이 성공했다고 느낀다. 사실 내가 바란 건 위계를 없애는 게 아니었다. 이름을 가린다고 서로의 차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부터가 그런 차이 앞에서 위축되고, 남을 판단하는 데서 자유롭지 않은데 말이다. 다만 두 달 동안 그런 정보 없이 쌓인 시간이 있었고, 그래서 뒤늦게 알게 된 정보가 이미 만들어진 관계를 뒤집지 못했다. 위계를 없애지는 못해도 줄일 수는 있다는 것, 그게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전부였는지도 모르겠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 방식은 서로의 정보를 영영 감추자는 게 아니라 나중으로 미루자는 쪽에 가깝다. 마지막 주가 끝나면 말해도 된다는 약속이 있었고, 공개도 다 같이 돌아가며 같은 방식으로 했다. 이 방식은 결국 대단한 건 아니다. 서로를 판단할 정보가 없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시간만으로도 사람들은 서로를 직함이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으로 기억했다.
소개란 원래 서로를 알아 가려고 하는 건데, 어느새 서로의 자리를 정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곤 한다는 걸 이번에 새삼 느꼈다. 물론 모든 모임에 맞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게임 세미나였기에 닉네임이 자연스러웠던 면도 분명 있다. 그래도 나와 비슷한 불편함을 느껴 본 사람이 있다면, 입을 열기 전에 서열부터 정해지는 모임이 조금은 덜 불편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방식을 적어 둔다. 주제에 맞춰 조금씩 바꿔 따라 해 봐도 좋겠다.
세미나(seminar)는 ‘씨앗을 심는 못자리’라는 뜻의 라틴어 ‘세미나리움(seminarium)’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씨앗을 키워내듯 지식을 심고 기른다는 뜻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심을지 고민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아주 멋지고 튼튼한 나무가 자라난 것 같아서 기쁘다.
무엇보다 이런 낯선 방식에도 함께 해준 우리 토크 클럽 멤버들 다채 님, 멜리 님, 뽀송 님, 서늘해 님, 선인 님, 스트로드 님, 아이온 님, 엠제이 님, 헤론 님에게 고마움을 남긴다. 우리 또 놀아요!

글. 이주원
편집.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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