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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동향] ‘팬’과 ‘사랑’에 대한 짧은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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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 지수

 

나는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아스날 FC의 팬이 된 지 1년이 좀 넘은 햇병아리 ‘구너’야. 시작은 아마존 프라임에서 방영한 어느 축구 다큐를 보면서부터였어. 한창 암흑기에 빠진 팀에, 열정적이고 젊고 고집쟁이지만 카리스마를 가진 감독이 부임하면서 선수들에게 믿음을 주고 팀을 천천히 일으키는 내용이야. 구단은 경력도 없는 초짜 감독을 꿋꿋이 믿어주고, 선수들은 점차 협업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내. 청춘 드라마 같지만 명백히 현실에서 벌어지는 그런 모습들은 나를 사로잡았어.


‘덕통사고’라는 말처럼, 팬이 되는 순간은 돌연히 찾아왔어. 이 경험이 생소했던 이유는 내가 스스로 살면서 무언가의 팬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야. 나는 축구는커녕 애초에 스포츠 자체에도 흥미가 없었고, 낭만이니 청춘이니 하는 것은 늘 냉소하고 경계해 왔어. 어떤 작품이나 작가를 좋아하는 정도의 ‘덕질’은 해본 적 있었어도 오래 가지 않았고. 그런데 우연히 본 다큐 하나가 나와는 인연도 없는 이역만리 서양인들의 ‘그깟 공놀이’에 빠져들게 만든 거야. 내가 열정낭만충 남미새라니. 그것도 외국남미새(?)가 되어버리다니...


해축 팬이 되면서 내 삶은 꽤 달라졌어. 우선, 일상 자체가 재구성되었어. 시즌이 시작되면, 유럽 축구는 대부분 한국 시간으로 새벽에 시작하기에 아예 새벽에 하루를 시작해. 매일같이 팬 카페에 가서 선수들과 이적시장 소식을 점검하며 일희일비해. 유튜브에서 온갖 축덕들이 올리는 EPL 소식과 전술 영상까지 공부하게 됐어. <블랙 아스날>의 저자가 <검은 대서양>의 폴 길로이라는 걸 알고나니 괜히 신나더라. 나중에 돈을 모아 영국에 간다면 들러보고 싶은 곳이 생겼어. 누군가의 계정 프로필에 축구선수 사진이 있으면 괜히 거부감이 들었는데, 지금은 도대체 왜 그랬나 싶어.


스스로의 감정의 스펙트럼도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졌어. 팬이란 무조건 어떤 상황에서라도 응원하고 보듬기만 하는 것인 줄 알았어. 그런데 스포츠 팬의 감정에는 긍정과 열광 이상의 온갖 것들이 들어 있더라. 지난 1년간 터졌던 도파민만큼이나 분노와 슬픔도 대폭 늘어버렸어. 특히 누군가를 창의적으로 욕하는 법(!)을 정말 많이 배웠어. 원래도 과격한 편이었지만 이제 더욱 대놓고 과격한 인간이 되고야 만 것이야. 경기에 몰입한 나머지 경기가 안 풀리거나 선수가 부상이나 퇴장을 당하면 마음이 힘들어서 관전을 그만둘 때도 많아졌어.


그런데 팬질을 안 하던 사람이 팬이 되다보니 한편으로 이런 감정들이 자연스럽지가 않아. 이게 도대체 뭘까? 가족도 애인도 아닌 대상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고,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원망하는 이 감정은? 갓 입문한 자의 과도한 몰입일까? 그게 아니라면, 스포츠 팬이 분출하는 사랑의 뒷면에는 언제나 소유욕이나 통제욕이 있는 것일까? 팬이 된다는 건, 이런 식으로 매일매일 기쁨과 분노를 가로지르는 통제가 안 되는 스펙트럼 속에 자신을 놓아두는 일상의 연속인 걸까? 평소의 나라면 진즉 피로해서 그만두었을텐데 나는 왜 그만두지 않는 것인가? 팬으로서의 나는 날마다 충실해지고 그만큼 낯설어지는 자신을 보며 참 놀라고 있어.


희한한 것은, 응원하는 팀이 매 시즌 보여주는 서사나 선수들의 이야기가 가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준다는 거야. 그건 즐거움과 기쁨이 될 때도 있지만 간혹 생의 교훈처럼 다가올 때도 있어. 기묘하게도 곧잘 지금의 힘들거나 무기력한 삶에 살아갈 동력을 주는 듯한 느낌까지 줄 때가 있다니까(최근 ‘팬질이 나를 살린다’는 말의 뜻을 비로소 깊이 체감한 적 있어). 리얼타임의 스포츠에는 예상 가능한 뻔한 서사도 많지만, 신기하게도 역전극이라던가 인간승리와 같은 사이다 서사들도 종종 생겨. 이 모든 것들이 영화나 드라마처럼 처음부터 연출된 결과가 아니라는 점 또한 나를 열광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한 것 같아. 내가 은연중에 스포츠를 모종의 삶의 축소판처럼 보고 있기 때문인 걸까? 그것의 다른 한편에는, 내가 사랑하는 선수들이 구단과 업계의 엄연한 상품이라는 사실이나 스포츠 장 또한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라는 생각들도 피어올라.


이런 복잡성은 결국 팬으로서의 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며, 팬이 가질 수 있는 다종다양한 윤리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줘. 온갖 ‘팬질’과 함께 살아온 윤희에게. 사랑하는 대상들을 어떤 거리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삶의 대부분의 순간에 팬으로서 함께 살아 있었던 너의 결론은 어떤 형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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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질문은, 어떻게 ‘사랑’할까? - 윤희

 

지수 말대로 나는 온갖 ‘팬질’을 하고 살아온, 그야말로 ‘본투비덕후’ 야. 어린이 시절부터 아이돌, 해외 드라마, 영화 시리즈, 해외 밴드, 해외 배우, 스포츠팀 등 덕질 대상은 계속 바뀌더라도 덕질 자체는 쉰 적이 없었지. 그 과정에서 수많은 다양한 이른바 ‘팬실천’도 해봤어. 앨범을 사고 스밍을 돌리고 콘서트에 가고 영화를 보고 팬픽을 읽고... 거기다가 영한/한영 번역 및 자막 작업, 각종 촬영 서포트까지. 돌이켜보면 그건 사실상 덕질 대상이 아니라 함께 덕질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던 것 같아. 한국 방송에 영어 자막을 달고 촬영장에 커피차를 보내는 일로 아이돌이나 배우가 받아봤자 얼마나 큰 이득을 받고 느껴봤자 얼마나 큰 감사함을 느끼겠어. 사실 그런 일에 가장 큰 효용을 느끼며 만족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팬들 자신일 거야.


아무튼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쓴다는 것은 여러모로 나의 삶을 바꿔놓는 것 같아. 상대가 궁금해지고, 더 알고 싶어지고, 더 이해하고 싶어지고. 타인의 세계를 내 안으로 가지고 오면서 나의 세계도 넓어지는 경험은 짜릿해. 게다가 나와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떠들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즐거운지! 덕질을 통해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동시에 실시간으로 같이 할 수 있다는 건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가 준 축복 같아. 나는 주로 각종 정보를 검색해 번역하고 업로드하는 역할을 자처했거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같이 덕질 대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경험이 언제나 행복했어.


그런데 그렇게 각종 인터뷰와 노래와 영화와 드라마 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공개되는 ‘공적 사생활’까지 섭렵하고 나면 일종의 ‘권능’ 같은 걸 갖게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돼. 그러니까, 뭐라고 계속 말을 얹고 오지랖을 부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거? 더 심해지면, 덕질 대상 자신보다 팬인 내가 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게 되기까지 하지. 너에게는 이런 의상보다는 저런 의상이 더 어울리는데 코디를 당장 바꿔라, 너의 배우 커리어를 위해서는 이런 필모 보다는 저런 필모가 더 나은 선택인데 이번 선택은 실망스럽다, 이미지를 관리하고 팬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애는 참거나 잘 숨겨라, 초구는 치지마라 등등. 다양한 덕질을 해보면서 익숙하게 봐왔던 말들이지.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라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팬들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들일 거야 (하지만 진짜 초구만큼은 좀 두고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긴 해.) 더 구체적으로 쓰자면, ‘내가 너를 계속 좋아할 수 있게 해줘’, 에 가까울 거고.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너무 즐거운데 왜 나를 실망시키려고 하니? 너를 계속 사랑할 수 있도록 너도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 라는 마음이지 않을까.


솔직히 그런 마음은 폭력적이고 유해하긴 해. 아이돌이든, 배우든, 스포츠든, 각종 영역에서 팬덤의 힘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계속해서 회자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 그 힘이란 좋게 말하면 역량이고 나쁘게 말하면 파괴력이야. 팬의 이름으로 수많은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나쁜 일들이 일어나잖아. 개인적 차원에서 팬이 된다는 건 삶의 활력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빼앗기도 하고, 사회적 차원에서 팬심은 봉사와 기부 같은 이타적 행위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폭력적 일탈의 원인이 되기도 하니 말이야.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랑이란 게 다 그렇지 않아? 그 모든 좋고 나쁜 일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으로 사랑만한 게 없어. 서로 침범하고 어떠한 힘을 행사하는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해내지. 그 상대가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내가 마음을 쓰는 건 단지 그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그것이 속해있으면서도 담고 있는 세계야. 그게 단지 덕질 대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뜻만은 아니야. 그 세계엔 어느새 내가 있고 다른 이들이 있거든. 팬이 된다는 건 다른 팬들 그리고 팬이 된 나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팬질은 일종의 폴리아모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어. 참 깔끔하지가 않고 감정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설명 못할 잔여가 생겨나고 복잡하지.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야. 그런데 사실, 관계 맺기라는 게 다 그런게 아니겠나 싶기도 하고. ‘덕질은 특별해!’ 와 ‘덕질도 다른 관계와 똑같아!’라고 동시에 말하고 싶은 마음이야.


어쨌든, 팬이 된다는 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려워. 사랑에 대한 질문이 그러하듯 말이야. 누구도 사랑이나 관계에 대한 일반론을 내세울 수는 없을 거야. 다만 인생 전체를 덕질에 힘써온, 그야말로 덕질 자체를 사랑해온 사람으로서 공감가는 말을 빌려올 수는 있을 것 같아.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에서 한 인물은 자신에게 실망을 준 인물에게 이렇게 말해. “틀림없이 일시적일 거예요.” 이 말이 좋은 이유는, 맘껏 실망해도 된다는 것 같아서. 왜냐하면 내가 실망한다고 해서 그게 관계의 끝, 사랑의 끝, 덕질의 끝은 아닐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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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지수, 조윤희

편집.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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