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리 불효자의 말걸기
- 6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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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엄마와 디디에 에리봉의 최근 출간된 저작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에 관해 이야기 나눴다. 바로 앞의 문장은 여러모로 내게 놀랍고, 어색하다. 나의 엄마는 '어느 서민 여성'이고 '노년'에 가까운 나이다. 특히 최근에는 그녀와 '삶, 노년,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갑작스레 치매 진단을 받게 된 둘째 이모로 인해서였다. 사실 삶이니, 노년이니, 죽음이니, 거창한 이야기보다는 ‘갑자기 내가 아파지면 너 인간 구실은 하고 살겠냐?’라는, 자신의 건강에 관한 걱정과 자식에 대한 불신이 범벅된, 잔소리에 가까웠다.
요 며칠 우리의 대화는 분명 에리봉의 책 제목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그 책은 결국 디디에 에리봉이라는 프랑스인의 저작이고, 사회적 전기 형식의 학술서라는 점에서, 맨 앞의 문장은 여전히 내게 놀랍고 어색하다. 그녀는 여느 1960년대생 서민 여성이 그랬듯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고, 중학교 시절부터 오늘날 불안정노동이라 불리는 일자리를 오갔다. 삶은 고단했고, 책은 멀었다. 물론, 그날 아침 디디에 에리봉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내 쪽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대화 앞에 있던 전조에 관해서 적어 보자면, 내가 아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첫째, 그녀는 몇 해 전부터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 이 부부가 드디어 각방을 쓰게 된 것인데, 비로소 그녀는 가족 성원들의 시선 바깥에서 쉼을 청할 수 있었고, 그들의 소음으로부터 다소간 단절될 수 있었으며, 그 안에서 그녀 나름으로, 여러 활동으로 하루의 리듬을 만들 수 있었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녀는 평생 그녀만의 방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엄마와 함께, 언니들과 함께, 언니 가족과 함께, 남편과 함께, 자식과 함께, 말고 진정한 자기만의 방을 너무나도 늦게, 하지만 갖게 되었다.
두 번째 전조는 미디어다. 그녀는 방을 갖게 된 이후 가장 먼저 두 가전을 선택해 그 공간을 채웠다. 10만 원 대의 스마트TV와 내가 쓰던 노트북이었다. 자기만의 방에서 그녀는 숏폼 시절에 남은 마지막 롱폼의 수호자다. 그녀의 저녁을 채우는 것은 넷플릭스다. 방 안의 그녀는 여러 TV 드라마 애호가들과 마찬가지로 지나간 장면과 현재의 장면, 맞이할 장면의 연속체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하나의 긴 이야기로 소화하려 분투 중이다. 몇 해가 지나고 그녀와 서로가 본 드라마에 관한 몇 곱절의 대화를 거친 뒤, 내가 그녀에게서 보았다고 적을 수 있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드라마는 그녀가 그녀의 삶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도왔다. 그녀는 삶을 드라마로 말미암아 복기하고, 해원하여, 소화했다.
내가 쓰던 낡은 노트북도 그녀를 바꿨다. 그녀는 그 노트북을 방송통신대학교 수업을 듣기 위해서만 쓴다. 공교롭게도 그녀만의 방과 함께 그녀의 ‘대학’ 생활도 시작되었다. 여느 늦깎이 학생에게 방통대 수업이 그렇듯, 그것은 노년의 여가로서 성격을 지닌다. 그녀는 때론 세간의 말과 상식을 토대로 자신의 공부를 절하한다. '강의를 틀어놓고 조는 나이롱 대학생'이라는 것인데, 겸양은 자긍심을 지닌 자의 특권이다. 그녀의 겸양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늦은 저녁까지 조리실 안에서 고된 노동을 마친 뒤, 전과는 달리 '자기 자신을 위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담겨있다. 그녀가 생각해 온 대학생들처럼 그녀도 교양을 위해 책을 가까이하기 시작했는데, 외려 이 오인이야말로 그녀가 대학과 얼마나 먼 삶을 살아왔는지를 내게 보여주었다. 대학생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녀는 탁월한 이야기꾼이기에, 나는 오래도록 그녀가 소설을 읽어보길 바랐다. 신이 나서 또는 분에 겨워서 (외할머니 식으로 말하자면) ‘천지굿’하듯 말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결국 길을 찾아 이어지고, 개연성을 잃지 않았다. ‘글이 별거냐, 소설이 별 거냐’ 낮잡는 그녀의 하비투스를 나는 오래도록 퍽 멋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그녀가 좋은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좁은 조리실과 창문 하나 없는 휴게실에서 고된 하루를 보내느라 종일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날이 파다했다는 그녀의 푸념 또한, 그녀가 소설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글이 무어라고, 소설이 무어라고, 그것은 가방끈만 긴 샌님 자식의 시건방임을 나는 안다. 하지만, 글의 세계에 지지 않기 위한 방법이란 역설적으로 글의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어떻게 소설만 보고 사나. 엄마에겐 드라마가 여전히 최고여도 좋다. 나부터도 드라마를 더 본다. 환상을 깨기 위한 전략 중 하나는 흠뻑 그 세계에 취해보는 것이다. 마침내 그녀의 리딩리스트는 이 시대의 ‘멘토’를 자임하는 스님들을 지나왔고, 지금은 박정민 출판사에서 출간된 김금희의 소설에 도착했다. 이게 다 방통대 덕이다. 아니, 박정민 배우 덕이다. 박정민 만세! 박정민의 팬이 된 여사님 만세! 그녀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들 앞에서 어깨를 꼿꼿이 펼 수 있길 나는 언제나 바랬다.

여기까지가 그날 아침 대화의 전조다.
그날 식사를 마친 뒤, 엄마는 얼마 전 엄마는 주말 동안 언니들—그녀는 8자매의 막내이다—과 다녀온 여행에 관해 들려줬다. 당일치기의 짧은 여행이었고, 여행보다는 요양원에 있는 사촌오빠를 보러 가는 길이었으며, 가장 나이가 어린 엄마는 운전을 전담하며 언니들을 보살피고 모시느라 노곤했을 것이다. 대가족에서는 엄마 역할을 언니가 대신하여 돌보다가, 후에는 언니를 동생이 엄마처럼 보살피게 된다는 것을 나는 엄마와 이모들을 통해 보았다. 그녀의 짧은 여행에 관해 들으며 나는, 어릴 적에는 동생 걱정은 언니 몫이었지만, 이제 언니 걱정이 동생 몫이 되었구나, 엄마는 언니들의 엄마가 되는 중이구나 생각했다.
엄마의 여행이 있던 그 주의 주말 내내 공교롭게도 나는 에리봉의 책을 읽었다. 식탁 맞은편에는 천진한 얼굴로 먹먹한 이야기를 잇는, 늙어가면서도 누군가를 책임지는 여성이 있었다. 돌봄이 필요한 또는 곧 더욱 절실히 돌봄을 요하게 될 여성이,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를 돌보는 중인 노년 여성이 있었다. 에리봉의 책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충동이 결국 ‘할 수 있다’로 넘어가게 된 것은 우리 대화에 앞선 전조들 덕분이었다. 충동을 참지 못한, 사회성이 박살 난 대학원생은 결국 프랑스의 노동계급 출신이자 게이 지식인인 사회학자인 에리봉의 책을 대화 주제로 올렸다.
장광설을 마치고, 침묵이 이어졌다. 여느 노동계급이 그렇듯, 엄마는 글과 문자의 세계를 선망했지만 동시에 글과 문자의 세계에서 배제되어 그들의 상징폭력을 감내해 온 이들에게 발견되는 원한과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에리봉은 '게이'이고 '좌파'이니, 내 좁은 세계에선 어느 쪽으로 보나 한국의 노년 여성과의 대화에서 거론키 어려운 주제였다. 그럼에도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엄마는 조용히 듣고, 작가인 에리봉이 많이 힘들었겠다고 답했다. 그렇게만 말했다. 그녀의 반응을 아래와 같이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것은 회피일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대화 주제를 피하고 싶었다. ‘아니, 갑자기 웬 불란서 모자의 이야기를 꺼내나? 일단, 공감을 전하자.’ 아니면, 그녀는 나의 무안함을 염려하여 최선의 말을 건넨 것일지 모른다. ‘아이고, 얘 어디 가서 친구라도 사귀겄나. 일단, 공감을 전하자.’ 그렇게, 어중이떠중이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니, 에리봉은 그녀에게 더 가깝고, 내게 더 멀었다. 그녀의 형제들 중 가장 언니들은 이제 그들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거동이 불편해 방 안에 갇혀 지내야만 하는 형제도 생겼다. 방 안에 갇힌 형제는 이모들이 찾는 날이면 분노의 말을 쏟아내다가 아이처럼 천진해지길 반복했다. 의리의 이모들은 돌아가며 거의 매주 반찬을 나르고, 청소를 도우며, 형제의 남은 자식을 걱정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갇힌 형제의 악에 받친 목소리는 방 문턱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에리봉의 어머니의 외침처럼 “공론장에 다다르지 못한 채 사적 영역에 한정되는 정치적 언명”이 될 것이다. 제도나 사회에 대한 비난으로 복원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에리봉과 달리 이 모든 것을 숙명주의적인 태도로 받아들였고,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엄마의 형제가 위로는 많고, 아래로는 없다는 게, 이럴 때는 또 속이 상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녀는 몇 번을 미리 겪고, 자기 순번을 마주해야 할까.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는 에리봉에게 공감을 표한 것일까.

부르디외의 자기분석은 글을 쓰는 이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재현할 수 있는 성찰적 계기를 제공한다. 에리봉의 사회적 전기는 작가 그 자신보다는 독자에 관심이 있다. 전기적 글쓰기에 있어서 부르디외는 나-작가에 보다 집중한다면, 에리봉은 타인을 통해 나로 향하고, 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익숙한 종류의 서사적 각본들, 테마들을 빌려온다. 가족, 엄마, 아버지, 친구. 휴머니즘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인 그녀가 죽고 못사는 이야기들이다. 그 와중에 사회과학적 설명은 (프랑스인 치고는) 담백하게 얹혀 있다.
그러니 에리봉이 봉합을 모색하는 것은 구체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괴리, 행위와 구조 사이의 대립뿐이 아니다. 한쪽 발은 객관화에, 다른 쪽 발은 미학화에 발을 걸친 에리봉의 글쓰기 방법은 그들의 독자를 웰메이드 드라마의 시청자로 만든다. 세계에 관한 지배적인 시각을 상대화하고, 쓱 하고 눈물을 닦다가도 웃으며 살아갈 힘을 준다. ‘많이 힘들었겠네’에는 이 책이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감응이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계급이니, 자본주의니 하는 말을 굳이 통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에리봉처럼 하지만 에리봉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만의 진실을 찾고 지난 시간들을 해원하며, 또 남은 시간들을 행복으로 채워갈 수 있길 나는 기도한다. 그녀 삶에서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것,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 간주했던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길 바란다. 썩을 놈은 썩을 놈이라 소리도 지르고, 삿대질도 막 하면서, 원하는 대로 살길 나는 바란다.
한때는 그녀에게 에리봉의 책을 권하고 싶던 적도 있었다. 내가 읽던 무심히 책을 건네는 그 순간을 상상하며, 책을 읽으며 밑줄 긋기를 자제하던 순간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 사회적 전기에는 드라마가 있으니까. 우리를 흥분하게 했던 드라마에 관해 함께 재잘대던 시간들을, 그 책에서도 찾고 싶었다. 지금은 아니다. 이 책이 무어라고. 에리봉에 더 가까운 것은 그녀다. 언젠가 그녀가 먼저 청하는 날이 온다면, 흔쾌히 빌려줄 게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아도 좋다.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은 앎에 관한 책이자, 삶에 관한 책이다. 어느 서민 여성을 주변부로 밀어내는 다종의 사회적 힘이 섬세히 논해짐과 동시에, 그리움, 후회, 분노의 정서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한다. 이 책은, 그렇기 때문에 잘 아는 것과 잘 사는 것 사이의 균형잡기 기록으로도 읽힌다. 나는 책을 읽으며 이 문장을 머리 속에 줄곧 떠올렸다. ‘불효자는 웁니다~’
책에 대한 응답 또한 앎에 국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뭘 어째야 하지? 젊은 놈은 인생 유한한지를 모른다. 심지어 이제 나는 별로 젊지도 않다. 인텔리 불효자들에게 이 책을 강권한다. 엉엉 엄마ㅠ 일단 집에 가서 그녀의 행복을 위해 엉덩이춤이라도 추고 뽀뽀를 갈겨야겠다. 아무래도 나는 이 책을 잘못 읽었다.

글. 구구
편집.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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