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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먹] 국어교육 전공하던 퀴어가 교육대학원 자퇴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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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나의 오랜 꿈이었다.


2019년 여름, 서울시 성평등 교육 강사 자격을 취득했다. 학부 졸업 전이었다. 이후 종종 초등학교에 출강하여 성평등 강의를 진행했다. 늘 (어떤 분야든)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학부 재학 중에는 때1)를 놓쳐서 교직이수 병행 과정을 신청하지 못했었다. 때문에 세 달에 한 번 정도 있었던 출강은 나에게 무척 소중한 시간이었다.


문학과 언론학 배경지식을 조합하여 진행한 페미니즘 페다고지(Pedagogy, 어린이 교육)는 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도덕적 당위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 위에 놓인 인권 의제를 발견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방식의 강의를 설계했다. 시간이 남는 학급에서는 동시대 여성·퀴어 의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것이 문제였는지 어느 날 “그 강의는 사탄의 무리가 아이들을 꾀어내려는 술수이니 당장 중지하라”는 민원이 들어왔다. 주기적으로 강의 요청이 들어왔던 그 초등학교에선 이후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강사로서 속해있던 기관은 오세훈의 예산 삭감으로 인해 사라졌고, 강의처를 찾기 더욱 어려워진 나는 강사 일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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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등으로 인해 아주 늦게 학부 졸업을 하고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학부 때의 페미니즘 비평이나 인권 활동은 ‘포트폴리오에 넣으면 안 되는 것’이 되었다. 취업에서의 잦은 고배로 자존감은 한껏 낮아졌다. 그렇게 1년 넘게 진로를 고민하던 중, 교육대학원2)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하면 교원자격증이 발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고등학교의 정식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었다. 정교사가 된다면 쫓겨날 걱정도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한 번 접은 꿈에 다시 도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기쁨이 컸다.


학부 전공에 따라 동대학교의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으로 입학했다. 입학 면접에서는 “국어교육 내부에 존재하는 널-커리큘럼(null-curriculum), 즉 의도적으로 배제된 지식들에 관한 교육 연구를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런 말하기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교육학계 교수들이 결코 반기지 않는 내용 중 하나라는 사실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어쨌거나 합격했고, 남들보다 몇 년 늦은 나이에 교원자격을 위한 걸음을 내딛었다.


학부를 졸업할 즈음엔 우울로 인해 매일의 기억이 휘발되거나 아주 짧은 글조차 읽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졸업 후 쉬는 동안 많이 회복되어 겨우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된 곳이 교육대학원이었으나, 이곳의 분위기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개개인을 욕할 마음은 없다. 허나 교육학을 배우며, 교육학 자체가 사람을 자원으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했음을 깨달았다. 학생 개인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사회에 도움이 되게끔 해야 한다는 전제가 교수와 대학원생들의 관념 깊은 곳에 깔려 있었다.


교육학 강의 중의 농담에서 ‘아이들’은 자주 미숙하고 멍청한 존재였다.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교육학 자체에 대한 성찰도 포함되었지만 가벼운 잡담과 농담의 방향은 멍청한 아이들을 이른 시기에 계몽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문학 작품을 비평할 땐 동료 교사로부터 “건강하지 못한 자아를 가진 비도덕적 인물이 주인공이기에 이 작품은 나쁜 작품”이라는 평이 나왔다. 수업3)에서 『위대한 개츠비』4)를 읽을 때였다.


같은 수업에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5)발제를 맡아 진행한 일이 있었다. 나는 학부 때 했던 것과 비슷하게 발제를 준비해갔다. 수업 직후 삼삼오오 모여 강의실을 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휴 나는 동성애 찬성 못 하겠어, 너는 어때, 그런 걸 어떻게 찬성해, 그래 맞아, 우리가 그런 걸 옳다고 얘기해선 절대 안 되지, 당연하지. 수업 중 퀴어 이야기와 비거니즘 이야기에 대해 사람들은 완전히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원생 개개인의 연구나 발표를 들었을 땐 마이너리티 교육에 관한 것이 다소 있었으나, 집단의 분위기는 그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용했다. 퀴어니스 교육은 섣부른 이야기라거나 어떤 정치적 견해도 교실에 존재하면 안 된다는 믿음은 아주 의심 없이 교사 집단 내에서 정전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퀴어니스 자체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 교수는 본인의 진보성을 곧잘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는데, 발표 때 나의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유사 커밍아웃 이후, ‘소수자라는 건 정말 대단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며 나의 존재와 의견을 표본 삼아서 질답을 진행했다. 내가 어떤 의견을 말하든 집중과 박수를 받았다. 그 분위기는 특히 끔찍했다.


우리 교육대학원이 유별난 것인가 하면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트위터의 교사 계정들은 학생 뒷담화를 하는 일이 잦았다. 그 뒷담화 속 주인공이 된 학생들은 아주 무식하 고 못된, 혹은 너무 아름답고 귀여운 존재들이었으며 교사 개인 계정의 이야깃거리로 손쉽게 소비되었다. 페미니스트 교사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이들도 학생에게 존대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현장에선 어쩔 수 없나 싶다가도, 그것을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되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 모든 교사들은 어쨌든 ‘좋은 사람’ 내지는 ‘멋진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집단을 꽤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집단에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교육대학원의 분위기도 그러했다. 군대에 있을 때의 생각이 나기도 했다. 군인들은 정치적 의견을 가져선 안 된다거나, 성소수자의 존재가 배척되는 것은 똑같음에도, 최소한 ‘군대는 나쁜 곳’이라는 사실은 당연하게 이야기되었다. 그곳에선 개개인의 악함이 진보성이나 선함으로 포장되지는 않았다. 그저 악하고 허술하게 존재할 뿐이었다.


교육대학원과 군대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내가 특별히 느꼈던 어려움은, 교육대학원의 그 견고한 선함 때문이었다. 성소수자, 비건, 성노동자, 빈곤층을 내치고 완전히 입을 다물어버리며 게으른 이들을 멸시하는 분위기 말이다. 모든 대학원이 어느 정도는 이런 분위기인 것일까 했다. 자신의 학문 필드에서 배제되는 존재들에 대해 사유를 중단함으로써 자신의 필드를 유지하려는 교육자 혹은 연구자의 속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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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왜 해야 하는가. 교육대학원 교수들과 트위터 교사들로부터, 사회 인적 자원 육성, 사회 발전, 바람직한 인간 교육, 바람직한 시민 양성, 건강한 자아 확립 등의 이유는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런 끔찍한 발언들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종종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하여, 일찍 세뇌시켜야 한다, 인간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남성 청소년들을 교화시켜야 한다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얼마나 많은가. 허나 그런 것들은 결코 농담 삼아도 되는 것들이 아니다. 어떤 인간을 ‘사회에 바람직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교육’해야 한다는 발상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이다. 교육은 세뇌가 아니며 사회에 바람직한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이뤄져야 하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왜 필요한가. 교육은 온전히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 아주 간단한 사실을 많은 이들이 잊은 듯하다. 교육권, 즉 교육받을 권리에 대 한 것 말이다. 모든 교육이 실제로 그렇게 행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무척 슬프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교육은 사회에 새로이 진입하는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행해지는 일이다.


예컨대 페미니즘 교육은 왜 필요한가. 페미니즘을 알 권리가 개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성소수자 청소년이라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 그리고 사회에서 퀴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관한 정보를 알 권리가 있다.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에게, 특히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며, 심지어 남성에게도 페미니즘이 필요하고, 그들에게 페미니즘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페미니즘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회를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한 원대한 대의 때문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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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것들 중 하나로 적성검사가 있었는데, 검사 문항 중에는 ‘교사는 그 어떤 직업보다 가치 있는 직업이다’라는 문항이 존재했다. 이 문제의 정답(통과하기 위한 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에 체크를 했다. 허나 앞뒤 문항(가르치는 일은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다, 교직에 종사하는 것은 내게 뜻 깊은 일이다)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해당 문항의 정답은 ‘매우 그렇다’였을 것이다.


여기서 모든 비극이 출발하는 듯하다.


교수를 포함하여 교육대학원에서 만난 많은 이들은 ‘교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것이 교사를 얼마나 고귀하게 만들어주는지’ 종종 이야기했다. 하지만 자아가 비대해진 교사란 얼마나 추한 존재인가. 모든 청소년은 그것을 알고 있다. 나의 학창 시절에, 학생보다 똑똑한 교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학생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교사도, 해결할 능력이 있는 교사도 없었다.


이 문제의 근본은,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답으로 ‘건강한 사회인을 육성하기 위해’라고 답하는 교사들에게 있다. 교육이 학생에게 필요해서가 아닌, 사회에 필요하기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학생 사회의 문제를 알 필요도 해결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리하여 집단 따돌림과 학생 내부의 계급적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리고 그 공허함을 ‘교사는 고귀하다’는 인식으로 포장하여 무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학생 당사자를 쏙 빼놓고서, 사회와 교사는 결탁하게 된다.


교육학 수업에서 타 전공 학생들의 개인 연구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 음악교육전공 동료 교사들의 발표6)가 무척 좋아서 기억에 남았다. 현재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는 AI 활용 작곡이 있는데, AI는 기본적으로 서양 음계를 사용하여 학습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AI를 써서 작곡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무의식중 “비서구 음악의 가치와 표현양식이 소외”된다는 문제제기를 들었다. 또한 모든 창작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작곡은 기존의 음악사를 공부해야만 예술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데, AI는 음악사에 대한 이해 없이 작곡을 진행하므로 학생들이 그로부터 음악의 가치를 배우기는 어렵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사회적으로 도움 되는 인간을 육성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고안된 이야기가 아니다. 학생 개인이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교육이 그것을 보장하거나 도울 수 있는지를 고만하다가 나온 연구 내용이다. 교사가 학생의 권리 보장을 위해 교육을 고민할 때에 교육학은 발전하며, 고귀함과 직업적 우월 의식이라는 포장지 없이도 교사의 예리함은 빛나게 된다.


음악교육전공 동료 교사들은 꽤나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기에 그들의 발표를 들었던 것이 내겐 무척이나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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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학원이 이상적이기란 무척 어려운 듯하다. 임용고시가 어려운 탓도 있을 터이고 대학원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을 터이다.


나는 교육을 하고 싶었다. 시간은 비선형적이며, 나는 현재의 내가 언제나 과거의 나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시간을 공간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성찰과 애도 그리고 재해석을 통해 우리는 언제나 과거의 우리를 보살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내가 들었으면 좋았을 법한 수업을 해보고 싶었다. 수업안을 설계하고 그것을 교육 현장에서 진행해보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이 공간과 공동체는 나를 아프게 만들어서 나는 대학원에 더 다니기 어렵게 되었고, 결국 이번 첫 학기를 끝으로 자퇴를 결정했다.


교사가 된다는 상상은 내게 원동력이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결코 부담이 아닌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게 큰 힘이다. 하지만 이 힘으로도 건강 악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최근 몇 주 동안, 하루에 잠을 전혀 자지 못하거나 혹은 열여덟 시간을 내리 자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신체적으로 특별히 피로한 일이 없었음에도 정신적인 문제가 심했다. 잠이 오는 날에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했고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머리가 아파 세 시간에 한 번씩 타이레놀을 먹어야만 했다.


한국의 국어교육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꾸준히 발전하고는 있지만, 교육계의 보수성을 보았을 때 아마 앞으로 한참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길 위에 있을 모든 학생들과 교사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만두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내게 없는 그 힘이 누군가에게 존재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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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주

1) 전공 과정 중 4학기 수료 전까지.

2) 일반대학원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특수대학원. 국어교육, 영어교육, 사회교육 등의 세부 전공이 있다. 교원자격증을 신규 취득하려는 사람이나, 전공 전문성을 더 높이려는 사범대 출신의 현직 교사들이 입학한다.

3) 조강석, 문학이론,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 2025.

4)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1925.

5)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07.

6) 김채현·이시준·이신지, 〈음악 수업에서의 AI 활용의 문제점〉학생 발표 및 질의응답,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전공〈교육학개론〉강의 중,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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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요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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