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없] 독립성과 집적성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 3일 전
- 4분 분량

"쾌적한 개인 연구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심층적 연구 수행에 적합한 물리적 조건을 충족하였고, 연구실 집적 배치로 연구진 간의 일상적 교류와 소통을 용이하게 하였습니다."
연구공간에 관련한 탁상공론을 읽으면서 자꾸 이 문장이 떠올랐다. 지난 1월, 우리 연구소가 사업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에 작성한 글이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고 객관적 근거가 있었기에, 너무 부끄러운 마음 없이 그렇게 보고할 수 있었다. 지금 일하는 곳에서 나는 다행이 혼자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또 다른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학교 근처 카페에서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다. 메신저로 잠깐 대화 가능하냐고 물어보고, 몇십 걸음 옮겨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된다. 쾌적한 공간에, 나름 잘 세팅된 연구 환경을 갖는 게 참 힘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누려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독립성 (하드웨어)
돌아보면 일종의 최소지향을 갖고 살아왔다. 노트북 한 대 들고 다니며, 어디서던 펼쳐 놓으면 일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잘 안 될 때면 그저 충분히 성실하지 못한 나를 탓했다. 커피가 다 식고 민망한 느낌이 들어 다음 카페로, 참고해야 할 책이 있는 곳으로, 아니면 여기서 잘 안 되는 일을 잘 되게 만들어줄 어딘가로 계속해서 나의 몸을 옮기며 노트북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돌아보면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뭐든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했다. 노트북은 중고나 저렴이로만 샀고, 다양한 ‘연구템’은 커녕 마우스조차 없이 터치패드로 살았다. 사실상 매일 같은 신문연 자리를 쓰면서도, 그 자리를 개인좌석화 하지 않는 것을 추구미로 갖고 있기도 했다.
세 명이서 같은 공간을 쓰다가, 독립된 방 하나를 혼자 쓰게 된 동료 선생님의 연구실에 갔을 때도 굳이 혼자 있는 것의 단점에 관해 생각했고, 가끔 SNS에서 보는 교수님들의 책상과 작업 공간 사진 같은 걸 볼 때면 그걸 갖추는 데만 공력이 들고 실제 작업의 능률에는 별 차이 없지 않을까 의심을 가졌다. 이런 나의 솔직한 얘기를 LLM한테 보여주니 “어쩌면 그것은 조건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태도였고, 동시에 그 결핍을 문제 삼지 않기 위한 일종의 자기합리화이기도” 하다고 진단해 주었다.
독립된 연구실 자리는 생각보다 감사한 일이었다. 혼자 있는 집에서 늘 딴짓만 할뿐 아무 생산성도 발휘하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리던 나는 이제 없다. 누군가가 눈으로 감시하거나 내가 논다고 생각할까봐 신경 쓰이지 않는데도 이 자리에 앉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할 일을 시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온라인 회의를 할 때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거나 아니면 조용한 장소를 찾아 헤매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책들과 장비와 파일들이 대부분 여기 있으니, 근태 점검과 관계 없이 내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 또, 데스크톱은 짐만 된다고 생각하던 나는 이제 없다. 듀얼 모니터 이후 Alt+Tab하는 데 쓰는 시간이 확실히 줄어들었고, 급기야 괜찮은 사양의 컴퓨터를 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제는 노트북도, 집에서 쓰는 데스크톱도 ‘투자’라고 생각하며 할부해 버렸다.
사실 내게 독립된 공간이 주어진 것은 내가 소속된 기관에 유휴 공간이 너무 많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임을 안다. 만약 공간 자체가 부족한 대학이나 기관에서라면, 누군가가 1인실을 쓴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들이 더 좁은 공간을 함께 써야 하거나, 아예 박탈당할 수 있음을 뜻한다. 다만 나는 이제 공간과 관련해서 어쩔 수 없으니까 나눠 쓰자는 이야기보다는 불가능한 이상을 말하며 요구하는 편에 서고 싶어졌다. 대학원생 연구자에게 개인석을 주세요. 책과 개인 물품을 수납할 수 있는 충분한 책장과 수납공간을 주세요. 대학원생이 대학원 건물 내에서 빨리 집에 가야 할 것 같은 느낌 대신 내 집인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세요. 개인석 꾸미기에도 자유를 주세요. 완벽한 파티션은 아니더라도 옆 자리 사람으로부터 시야가 분리되게 만들어 주세요. 학술 장의 인재 양성을 위한 기초 조건입니다.

집적성 (사회자본)
사람이 많아도 꿰어야, 그러니까 모여야 보배라는 사실은 옛적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아도, 만나지 않으면, 또 어떤 식으로든 친해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독립언론 활동을 하던 20대 시절, 약간은 무리해서 보증금도 없이 들어갈 수 있었던 사글세 사무실을 명동이나 합정 같은 꽤 교통이 괜찮은 동네에 두었던 적이 있다. 편하게 아무 때나 들르고, 모여서 이야기 나누고 치킨도 먹고 크리스마스에는 장식도 하며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그 당시를 우리 팀의 헤이데이로 기억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카카오톡 메신저도 있고 네이버 카페도 있었지만,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던 그 작은 공간만큼 큰 동력이 되어 준 인프라는 없었다.
박사수료생이 되기 전까지는 대학원 내에 소중한 내 자리 한 좌석이 있었다. 그때 내가 1주일이 7일이면 7일 학교에 가고 싶어졌던 가장 큰 이유는, 언제든 나가면 누군가 동료가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고 실제로 늘 그렇게 같이 밥 먹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밥 먹으러 근처 푸드코트를 오가는 동안 나누던 대화, 누군가에게 요청받아서 또 요청해서 하곤 했던 상담은 그때 당시에는 가끔은 시간낭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사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학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성장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집적성이라는 말에는 사실 ‘접근성’ 조건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집적성이 실제 효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결국 그 집적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집에서 너무 먼 곳에 몰아 넣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자주 모이지 않아서 집적의 장점이 실현되지 않는다. 신문연으로 치자면 우리가 비싼 월세에도 불구하고 신촌 거점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산에 나와 많은 동료들이 살던 당시 늘 고양시 어드메 동 평수 상가 건물 월세를 보며 다른 생각을 품어보기도 했지만, 모두가 그나마 골고루 찾아오기 쉽고, 또 우연한 만남을 더 기대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기능하려면 이 곳을 떠나기 힘들 것 같다. (사실 곧 임대 계약 갱신이 다가온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에서도 정문 가까운 위치에 좋은 기회로, 작은 공간을 함께 만들어가 볼 생각이다.
사실 차도 있고 택시 탈 돈도 충분한 연구자들이야 조금 거리가 서로 멀어도 오가며 네트워크를 상대적으로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인문사회 대학원생이라면, 뚜벅이이고 학회일지라도 다른 도시를 가는 건 늘 부담될 것이고, 또 요즘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학교 내 같은 전공 안에는 그냥 숫자적으로 동료가 없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대학 차원에서는 같은 대학 내에서라도 여러 전공 학생들의 마주침이 생길 수 있는 열린 커뮤니티 공간을 고민해볼 법하다. 그리고 우리야 계속 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이런 공간들이 더 여러 지역에 군데 군데 생길 필요가 있다. 우린 정부의 큰 도움 없이 했지만, 그런 정책 없이는 아마 하나 둘 더 만들어지기도 어려울 것이다.

글. 김선기
편집. 김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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