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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준형] 유튜브 비평 10: 종일 침착맨만 쳐다보는 나. 오히려 좋을지도?



아홉 개의 유튜브 비평을 쓰면서, 어떤 유튜버의 팬임을 밝힌 적은 없다. 조심스레 밝혀본다. 나는 한국인이다(침착맨 좋아한다는 뜻). ‘나만의 작은 침착맨’이 구독자 50만이 되기 이전부터 즐겨봤는데, 지금은 180만 가까운 구독자를 거느린 ‘대형 (상업) 유튜버’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인디씬의 가수가 갑자기 주류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되면 느낀다는 일명 ‘홍대’식 정서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정도로 침착맨을 좋아한다.


침착맨이 운영하는 <침투부> 채널에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있다. 그와 좋은 호흡을 자랑하는 주호민 작가와 만든 ‘침펄토론’, 여러 주제를 놓고 토너먼트식으로 선호/비선호를 꼽는 ‘월드컵 시리즈’, 맛 없게 먹고 요리 못해서 ‘킹’ 받는 ‘먹방’과 ‘쿡방’, 그리고 침착맨의 목소리로 듣는 ‘삼국지 이야기’까지. 이 외에도 너무 많은 콘텐츠들이 있다(침착맨 라디오를 표방하는 ‘왕십리로 날아온 편지’도 클래식이다). 이 콘텐츠들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정말 쓸 데 없는 주제를 놓고 침착맨과 출연자들이 ‘뇌절’하는 꼴을 보고 혼자서 킥킥대는 거다.*


침착맨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친구’다. 침착맨에게 이른바 ‘개청자’라 불리는 시청자들은 유튜버를 역으로 ‘개방장’이라 부르며 동등한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양자 모두 방송 콘텐츠 제공자와 구매자 혹은 시청자의 관계라기 보다는 서로를 놀리고 조롱하면서 우정을 확인하는 ‘친구’로서의 의미화를 선호하는 모양새다. 이는 특히 침착맨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는 시청자들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민수’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초빙한 전문가들이 긴 강의를 이어갈 때면 부쩍 체력이 달려하는 침착맨을 시청자들은 놓치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광고 방송에서마저 광고 수용자 혹은 소비자가 아니라 ‘광고 방송이 하기 싫어 영혼 없이 멘트하는 병건이’를 놀리는 친구의 위치에 자리매김한다. 이런 시청자들을 상대로 침착맨은 시청자 ‘기강’을 잡는다며 되려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침착맨은 미디어 속 친구다.


개인적으로는 <침투부>를 볼 때, <무한도전>을 보던 때의 느낌을 받는다. 수 없이 반복해서 보고 들은 콘텐츠들은, 때로는 생각없이 누군가 내 옆에서 떠들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 자연스레 다시 재생된다. 이미 아는 이야기이고 큭큭대며 웃었던 장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반쯤 집중력을 흐린 채로 켜놓는 ‘친숙한 노이즈’가 되어버린 셈이다. 침착맨은 분명히 어떤 친구 못지 않게 내 일상의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미디어 친구’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미디어 속 친구를 찾는다는 것은 현실에서 친구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냐고. 사회적 유대 관계의 해체가 당신을 <침투부> 보게 만드는 것은 아니냐고.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은 2000년에 발표한 저서 <나홀로 볼링(Bowling Alone)>(2000/2016)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1960년대 이후로 사람들이 이웃들과 볼링을 치는 대신 혼자 볼링을 치는 단절된 개인이 되어가고 있으며, 이를 지역사회의 유대관계를 포함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소실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회적 자본이란 가족, 지역 커뮤니티, 시민단체 등에 속하는 개인들 사이의 연결과 이를 바탕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혹은 신뢰 관계를 의미한다. 퍼트넘은 한 사회가 사회적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록 시민 참여가 증대되고, 결국 성숙한 민주주의가 달성된다고 본다. 그의 분석에는 나홀로 볼링을 치는 사회가 민주주의 체제의 쇠퇴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는 해결 방안으로 사회적 연대와 지역 커뮤니티를 활성화할 것을 제시한다. 이때 ‘사람들을 홀로 볼링치게 만든’ 원흉으로 지목되는 것들 중 하나가 텔레비전 등 매스미디어다. 그는 미국에서 홀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현상 또한 사회적 결속에 해가 되는 변인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그의 신작 <업스윙(Upswing)>(2020/2022) 출간 즈음에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유발 레빈(Yuval Levin)의 비판처럼, 퍼트남의 논의는 사회적 결속이 강했던 시기를 창출해낸 ‘조건’(이를테면 세계 대전과 대공황)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었다. 결속력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성취된 것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의 부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결속력의 상실 또한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의 부산물일 테다. 그렇다면 결속력은 회복되거나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속력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개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고 실행할 정치가 필요하다.


미디어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미디어가 너무 재밌고 좋아서 텔레비전만 보고 있느라 사회적 네트워크가 상실된 것이 아니라, 이제 사람들은 볼링을 칠 수도 있지만,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를 볼 수도 있는, 여가의 선택지를 가진 개인들이 된 것이다. 이처럼 미디어를 새로운 조건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사회적 개인이 점차 그에 신문을 더한, 텔레비전을 더한, 그리고 게임과 유튜브를 더한 사회적 개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이용이 늘어난다고 오프라인에서의 교류나 사회적 참여가 줄어든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미디어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보그’와도 같은 오늘날의 미디어화된 개인들은, 그들이 어떤 경제·사회·문화적 맥락과 조건에 접합되느냐에 따라 다른 선택과 결과들을 창출하게 된다. 유튜브를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가로세로연구소>과 같은 음모론, 혐오와 적대를 양산하는 포퓰리스트 미디어에 몰두하느냐, (아쉽게도 이제는 문을 닫은) <닷페이스>와 같은 매체를 통해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식견을 넓히느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유튜브 창을 닫고 사람들을 만나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유튜브를 좋아하게 만들 것인가가 더 고민해볼만한 질문이 아닐까? 사람들이 어떤 유튜브 친구를 사귀게 만들 것인가? 침착맨이냐 주호민이냐라면 침펄토론으로 충분하겠지만, 우리에겐 더 심각한 문화-정치가 필요하다.




* 만화책이자 애니메이션인 <나루토>의 캐릭터 카카시의 기술 이름. 어느 스트리머가 ‘너무 나간 드립’에 제동을 거는 의미로 ‘1절만 하지, 2절, 3절, 큰절에 ‘뇌절’까지 하느냐’고 했던 표현이 유행이 되어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 침투부에 경제 및 금융 전문가 박민수씨가 출연하여 긴 강의를 이어가자 힘든 태가 역력한 침착맨을 보고 시청자들이 만들어낸 유행어가 ‘민수’이다. 그 이후로 박민수씨 이외에도 출연하는 전문가들의 긴 강의가 이어지면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에게 ‘궤도민수’, ‘애굽민수’ 등의 별명을 붙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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