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 가르치는 법은 어떻게 배우죠?


이 글은 3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초보강사 이강사의 강단 표류기’에 대한 일종의 부록으로 읽어도 좋다. 아직 강의를 맡아 본 적은 없지만 강의를 한다는 것이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닌 박사수료생의 신분으로서, 동료들이 공유해주는 첫 강의 경험은 듣기만 해도 진땀 나면서도 설레는 일이다. 초보강사 이강사가 겪은 실수와 실패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곧 마주할 일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 근데 진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잘 가르치는 법은 경험을 통해서만 터득 가능한 것일까?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교육자로 영글어갈 때까지 나의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은 나의 설익음을 감내해야만 하나?


이런 의문들은 특히 지난 여름 내내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을 들으면서 떠올랐다.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을 들은 계기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로부터 깨달은 것은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칼럼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이에게 한국어를 교육하는 방법을 훈련하는 것을 주요한 내용으로 한다. 제법 고된 과정을 통해 한국어도 많이 배웠지만(한국어가 내 모국어라니 너무나 다행이다!) 교육론을 더 많이 배웠다. 교육론의 기본적인 전제는 ‘한국어를 잘하는 것’과 ‘한국어를 잘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교수법과 교수요목 및 교재의 설계 같은 굵직한 흐름부터 실제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갈등 상황과 그에 대응하는 섬세한 커뮤니케이션 전략까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의 문제는 한국어교사에게 한국어 지식 및 능력보다 더 중요한 문제로 여겨진다. 한국어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수만 가지 중 특별히 인상적인 딱 한 가지만 들어보겠다.


한국어 수업에서 중요한 요소로 강조되는 것으로 ‘교사말(teacher talk)’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교사가 수업 중 발화하는 언어를 의미하는데, 교사말이 얼마나 통제적으로 잘 이루어졌느냐는 수업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예를 들어, 초급 단계의 학생에게 ‘~하다가’라는 문형을 가르쳐야 한다고 해보자. 이 학생에게 사전적 의미 그대로 ‘어떤 동작이 진행되는 중에 중단되고 다른 동작이 나타남을 나타내는 연결어미’라고 설명했다가는 그야말로 수업이 중단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 문형에 대한 설명은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밥을 먹는 남자의 모습과 그 밥상을 그대로 둔 채 전화 통화를 하는 남자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며, “남자가 밥을 먹어요. 밥을 다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밥을 먹다가 전화를 해요.” 이처럼 학습자가 이미 학습한 어휘만 이용해서 새로운 표현을 소개하고, 공감 가능하고 흥미로운 사례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해에 도달시켜주어야 한다.


쉬울 것 같지만 전혀 쉽지 않다. 한국어가 모국어인데다가 한국어에 대한 언어 지식까지 공부한 교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쉽게 설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까딱하면 동어반복적인 설명이 되거나, 문법 개념을 동원한 추상적 설명이 되어서 학습하기로 한 표현보다 그 표현을 설명하는 말이 더 어려워지는,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무심코 뱉은 말이 수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교과서를 넘기며 “어디 보자..”라고 중얼거린 말이 학생에게는 “어디”+“보자”로 받아들여져 혼란을 낳는 식이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한국인에게는 자연스럽게 들릴 말이 외국인 학습자에게는 혼란(에 그치면 다행이고) 또는 불쾌감을 유발할 위험도 있다. 또한 교사의 설명이 너무 길거나 짧아서 수업 시간이 길어지거나 짧아져서도 문제다(내가 참관한 수업은 거의 1분의 오차도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어교사들은 실제로 거의 대본에 가까운 형태의 지도안을 작성하며, 이것은 한국어교사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의 주관식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어교육에서 교사말의 통제가 강조되는 건 기본적으로 ‘말’을 교육하는 현장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교사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가 특정 지식을 학습자가 효율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교사 말은 모든 교육의 기본 원리가 아닌가 싶다. 대학교 1학년 학부생과 교수의 전공 지식 격차가 한국어 초급 학생과 한국어 교사의 언어 지식 격차보다 결코 작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석사 1학기에 들었던 수업의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수업을 녹음하곤 하셨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설ㅍ명하길래 애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가’를 알아보셔야겠다면서. 훌륭한 원로 연구자이셨던 그분에게도 가르치는 일이란 은퇴에 가까워질 때까지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 원인은 궁극적으로 교사말의 실패에 기인한 셈이다. 아무리 고급지식과 그를 꿰뚫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 내용을 정해진 시간만큼의 분량으로, 학습자의 수준에 걸맞게, 흥미와 집중도를 유지시키면서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면 그 지식은 자신에게나 유용한 것일 뿐이다.


진짜 ‘말’ 자체가 문제일 때도 있다. 학부 시절 집중과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수업은 녹음을 해서 모조리 받아쓰기를 하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면 교수가 주술일치를 거의 시키지 못하는 형태로 강의를 하고 있거나, 만연체로 말하거나, 지나치게 많이 이론적인 언어, 한자어, 외국어에 의존하는 경우였다. 이런 경우는 학생 입장에서 타자 연습이라도 되고 교수 발화의 의도를 추측하며 문장을 교정하는 능력이라도 길러진다. 더 문제가 되는 말은 교수가 무심코 뱉는 혐오발언들이다. 바로 며칠 전에도 “여자는 시집가는 게 취직하는 것”이라고 발언한 교수가 해임되는 사건이 있었다. 자기 친구들과 술자리에서나 농담식으로 이런 말을 할 때는 여성혐오적이기만 한 것이지만(이미 그것도 문제다) 그것이 교사말로서 사용될 때는 여성혐오적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무능하기까지 한 것이다.


교사말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육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충분히 자신의 언어로 바꿔낼 능력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교육하는 맥락에 대한 분석도 해야 하고, 학습자의 요구에 대한 파악도 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의 목표는 무엇인지 구체화할 줄 알아야 하고, 매 차시마다 진행해야 할 내용은 무엇이며,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고도 윤리적인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고, 또 여튼 이래저래 많이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중 첫 번째, 기껏해야 두 번째 정도까지만 터득한 채로 첫 강단에 서는 이들이 태반이지 않으려나.


그러니 나는 의문이 든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의 모든 교육자는 교수학습법에 대한 훈련을 받고 자격을 취득하는데, 왜 대학의 교육자는 그로부터 자유로울까? 학습자가 성인이라서? 강사/교수의 직업활동에서 교육보다 연구가 우선되어서? 수업을 듣기 위해 학생이 지불하는 경제적 비용(등록금)과 기회비용(같은 시간대의 다른 강의들이나 활동들) 이상의 효용이 담긴 강의를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좋은 연구자면 좋은 교수이거나 좋은 교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걸까? 아는 게 많은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아니 대체 가르치는 법은 어디서 어떻게 배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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