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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 다시태어나도 '우리'

최종 수정일: 2023년 1월 15일



문창용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인도에서 살고있는 아홉살의 어린 린포체 ‘앙뚜’와 그를 돌보는 노승 ‘릭젠’의 이야기다. 린포체는 살아있는 부처이자 전생에서 다하지 못한 업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수도승을 가리키는 티벳 불교의 말이다. 어린 부처가 현생을 보내온 마을은 그의 환생을 인정하지 않고,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전생을 보낸 티벳으로 긴 여정을 시작한다. 티벳 인근의 한 사원에서 앙뚜에게 비로소 린포체 교육을 허락하자, 노승은 어린 ‘앙뚜’를 두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 라다캄으로 돌아간다. 스승의 뒷모습 위로 어린 부처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15년 후에는 제가 공부를 다 마쳤겠죠. 스승님은 제가 모실겁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해지네요.”


삶이 죽음으로, 죽음은 다시 삶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제자가 미래의 스승이 되어 받은 돌봄을 되돌려 주는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서사는 불교적이지만, 영화를 종교적 진리에 관한 헌사로만 보긴 어렵다. 늙은 스승은 어린 제자를 가르치지만 ‘살아있는 부처’인 아홉살의 제자를 동시에 받든다. 영화 속 두 사람은 서로를 스승과 린포체로 부르지만, 관객들은 스크린 위의 두 여린 몸의 일상을 보며 다양한 관계의 이름들을 기워넣는다. 릭젠은 아홉살의 어린 제자를 부모처럼 다독이고, 스승처럼 혼을 내며, 하인처럼 모신다. 아홉 살의 어린 부처는 잠이 든 스승의 가냘픈 몸 앞에서 따듯한 물을 준비하고, 스승의 마음씀을 염려해 자신의 실망을 숨기며, 언젠가 당신을 위한 버팀목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지식을 전수하거나 받는 관계, 양육과 돌봄의 관계, 득도한 자와 구도자의 관계, 셋 모두이자 셋 모두를 빗겨간 서로를 극진하게 여긴 두 사람은 결국 ‘우리’라는 이름에 당도한다.


내게도 그런 우리가 있다. 삼년 전의 일 월 젊은 문화연구자들의 모임이자 ‘대안적’ 학술공동체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은 당산동에서 무박이일 워크숍을 마쳤고, 그날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학문후속세대 동료’라는 건조한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지난한 마음씀-염려, 서운함, 기대, 실망 그리고 사랑-을 공유하며 한 해를 버텨”왔다고. 문장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요즘엔 공부를 사랑하는 것인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 자주 헷갈린다. 그때마다 내가 상대에게, 상대가 나에게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좋은 동료가 되고싶다.” 그 시절의 나는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친구들과의 한 해를 돌아보며, 지난시절의 우리가 동료인지, 친구인지, 연인이었는지 헷갈렸다. 아니, 진리에 관한 앎의 절차란 ‘사랑’을 닮았다(바디우)는 경구에 이끌렸던 나는 우리를 ‘동료 혹은 연인’이라 생각했다. 돌아보니 우리가 도착한 건 ‘우리’였다.


나는 기억한다. 서로의 졸업과 입학을 자신의 일 처럼 기뻐해줬던 이들은 학술장의 젊은 신참자로서 그저 경쟁자가 아니었다. 눈물 흘리는 동료를 마주하고 등을 돌려 못 본 채 해야하는지 아니면 다가가 손을 건네야 할지 흔들리던 순간들은 더 좋은 ‘곁’을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갑작스레 교외로 나가서 공부를 하자고 말하거나, 주중 외출 빈도를 묻는 오지랖, 조금 뜬금없는 너스레에 담긴 따듯함을 나는 안다. 단체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 사무 보다는 기획을 맡아야 한다는 동료의 말은, 우리가 그저 일을 함께하는 사람을 너머 서로 염려하는 사람임을 다시 상기시켰다. 동료들은 공히 서로를 보살폈고, 가르치거나 배우며 함께 했다. 그렇게 다섯 해의 신문연을 통과하니, 우리는 ‘우리’였다.


서로를 살뜰히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넓히기 위해 활동했다. 문화와 관련한 비판학문의 젊은 연구자들이 학술장에서 겪는 공통의 문제에 개입했다. 각자도생이 정언명령인 시절에 함께 공부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젊은 연구자들의 ‘기댈 곳’이란 무얼지도 고민했다. 한 해 두번의 각각 여덟 개의 반이 열리는 세미나를 운영했고, 청년이나 세대라는 개념과 관련한 개론서 작업, 그리고 젊은 문화연구자들이 모이는 학술대회와 네트워킹 행사를 운영했다. 다수의 행사들을 ‘함께 공부하는 일’로 표현했는데, 그건 돌아보니 ‘우리’와 같은 말이었다.


올해 신년회의에서 나는 그만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해야하는 일에 비해 일 할 사람은 부족한 비영리단체에서 누군가 갑작스레 활동을 중지했을 때의 기분을 나는 아주 조금 어림짐작 할 뿐이다. 갑작스런 통보에 실망감, 서운함, 섭섭함도 —그리고 시원함도— 있었을 터인데, 동료들은 유쾌하게 받아들였으니 나의 미안함과 부끄러움 만이 더하다. 활동종료의 적당한 이유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지만, 이해되지 않는 활동종료 사유를 되묻지 않아준 것은 동료들의 또 다른 배려일 게다. 동료들과의 마음 씀은 내가 늘 지는 판이다.


연인 혹은 동료,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사랑하는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임기가 마무리되는 올해 총회가 지나면 내 일부도 함께 죽을 것이지만, ‘다시 태어나도 우리’이고 바깥에서 여전히,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좋은 동료이자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이 내 염치없는 욕심이다. 그리고 참조하실 내용이 있다. 올해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은 어마어마한 활동들을 기획중이다. 거짓이 아니니 모두 기대하시라. 내게 남은 것은 멋진 학술 단체 신문연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활동종료가 아쉬워 눈물 흘리는 일 뿐이다. 온 마음과 사랑을 담아 응원하고 또 ‘우리’가 손을 필요로 할 때 힘이 될 수 있도록 내 일상과 삶을 열심히 보살피는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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