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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 인종차별의 이름은 FOB

최종 수정일: 2022년 3월 8일


은희경의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서 수진은 뉴욕의 어학원에서 마마두를 만난다. 오해가 가득한 이 짧은 시절에 이름을 붙이자면 ‘장미의 이름은 장미’일 것이다. 장미가 어떤 이름이든 장미에서는 향기가 난다.

FOB FOB FOB.

국제법 교양 수업 시간에 FOB이라는 단어를 보고 온몸이 반사적으로 모욕이라도 당한 듯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11살에 미국에서 처음 들은 FOB. 그게 이런 뜻이었을까? 강산이 바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제서야 단어의 의미를 찾는 내가 낯설었다. 국제법 수업 시간에 배운 FOB(Free on board)이란 본선인도가격으로 무역거래조건의 한 종류였다. 반면 미국의 FOB은 fresh off the boat를 의미했다.

‘배에서 내리다.’ 열한 살의 나는 분명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에 내렸는데 다들 날 FOB이라 불렀다. 특히 한국인 2세가 나서서 갓 유학 온 한국인들을 싸잡아 놀렸다. 이 인종차별 단어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나 움츠러들기엔 충분했다. 나는 FOB이야. 짝꿍인 백인 제니퍼는 ‘미국에 배를 타고 온 거야?’ 물었다. 분명 비행기였는데 여전히 FOB이라 부르는 걸 보니 문제는 대상이었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미국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은 FOB으로 부르자. 11살의 어린아이들은 귀신같이 농담의 대상을 찾아냈다. 그렇게 마마두(Mamadou)는 문법 시간에 mama does가 되었고(81), 김준원은 영어로 발음하기 어려운 자신의 이름 대신 성姓으로 불러 달라고 부탁(82)했다.

농담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유색인종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피부색을 바꿀 수 없으니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 일단 이름을 바꿨다. 브라이언, 레이첼, 종수, 마이클, 티모시. 출석부가 이런 식이면 누가 봐도 종수는 미국에 어울리지 않았다. 종수는 ㅈ으로 시작하니 대충 저스틴, 조슈아, 제임스 중에서 고르고 되도록 기독교식 이름을 골라 미국 사회에 친화적인 각오를 보여주자. 그다음은 외모다. 남성은 미국에서 앞머리 내리기를 최대한 지양한다. 동양인 남성은 안 그래도 연약함의 상징이니 (미국식) 남자다움인 깐 머리를 지향하자. 물론 깐 머리를 했어도 무시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힘이 센 백인 제프는 반 아이들 모두와 팔씨름을 했지만 내 앞은 지나쳤다. 이유는 복잡할 터이니 묻지는 않았다.

언어와 문화는 아무리 노력해도 단기간에 좁혀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연예인의 유행어를 따라했지만 나는 농담을 알아듣지 못했다(83). 도시락으로 김밥을 준비했지만 김이 눅눅해져 정체불명의 해조류 음식처럼 보였다. 김은 검은색이고 미국에서 자주 먹는 음식이 아니기에, “이유(Eww), 디스거스팅”을 피해 후다닥 식사를 해치웠다. 작은 반발심이 생기긴 했다. 마늘볶음밥이나 청국장도 아닌데 이유를 들을 줄은 몰랐다. 이국의 음식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인종차별을 겪은 어린 나이에도 백인이 되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장 부러운 건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였다. 그들은 FOB도 아니며, 서류에 영어 이름을 썼고, 샌드위치만 먹으며, 영어로 농담도 할 줄 알았다. 특히 한국인 2세 앤드류가 가장 부러웠다. 키도 크고 농구도 잘하고 친구도 많았다. 백인 친구들조차 앤드류를 졸졸 따라다니자 괜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멋진 앤드류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좌절을 겪었다. 당시 내가 다닌 미국의 초등학교는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멋쟁이 3종 커플을 선정했다. Calle’s Best, Most School Spirit, Most Unique. 앤드류는 모든 곳에서 탈락했다. 앤드류는 사진사가 다른 멋쟁이 학생을 모델로 찍을 때 지켜보았다. 학교 잡지에 멋쟁이 앤드류는 없었다.

평소에 한국인 유학생을 자주 놀리는 앤드류가 쌤통이기도 했다. 인과응보와 개과천선을 한국말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멋쟁이 3종 세트의 남녀 6명이 모두 백인이란 걸 깨달았을 때 앤드류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앤드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왠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차별에는 이유가 없어.

학년이 올라가고 별 이유 없이 앤드류와 어울렸다.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갈 때도 유일하게 편지를 써준 친구였다. 물론 완전히 재수 없는 걸 다 고치지는 못했지만, FOB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쓰지 않았다. 구걸하는 홈리스에게조차 인종차별 당하는 수진처럼,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마마두가 원망스럽지만(124), 그 시절은 단순히 인종차별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FOB은 나의 미국 생활을 괴롭힌 하나의 상징이었지만, 그 단어와 싸우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차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단어였으며, 아무런 이유 없이도 쉽게 누군가를 무시할 수 있는 부조리함에 대한 폭로였다.

장미를 무슨 이름으로 부르던 장미에서는 향기가 난다. 그래서 장미의 이름은 장미다. FOB을 무슨 말로 달리 부른다 해도 그 시절은 그 시절의 향기를 담고 있다. 그 향기는 낙담과 낙관이 혼재한다. 긴 터널을 다 지나쳐 왔기에 장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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