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수]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는 2019년 강연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를 진행했다. ‘섹스’와 ‘청소년’이라는 단어가 나란히 배열된 것이 두려웠는지 이 강연은 보수 단체로부터 무분별한 공격을 받는다. 이에 위티는 해당 강연이 “‘음란’함을 조장하는 강연”이 아니라고 해명한다. 이 강연의 목적은 성을 음란하다고만 가르치는 그동안의 담론을 비판하는 동시에 삶과 연결된 올바른 성교육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는 말할 수 있는가? 게일 루빈은 그의 논문인 「성을 사유하기」에서 섹슈얼리티가 규범적인 위계질서에 따라 인위적으로 배열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섹슈얼리티가 되기 위해서는 “이성애”, “혼인 상태”, “비상업적인”, “일대일 관계”여야 한다. 이를 정리하자면, 혼인한 이성애자 부부가, 서로 간 금전적인 거래 없이, 일대일 성관계를 했을 때, 우리는 이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바라본다. 반면 “동성애”, “비혼인 상태”, “상업적인”, “일대일 관계가 아닌” 섹슈얼리티는 비정상으로 간주한다. 아울러 게일 루빈은 섹슈얼리티 위계질서 최하층에서 차별받는 이들로 “복장전환자”, “트랜스섹슈얼”, “사도마조히스트”, “성노동자”, “세대 간의 섹슈얼리티”를 언급한다.

이 중 “세대 간의 섹슈얼리티”를 언급함으로써, 게일 루빈은 오랫동안 끊임없이 “소아성애 옹호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다면 세대 간의 섹슈얼리티가 성 위계질서 최하층에 위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에 대한 게일 루빈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게일 루빈은 소아성애 범죄를 옹호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강연처럼, 게일 루빈이 주장한 세대 간의 섹슈얼리티는 그동안 금기시되어 외면받았던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끄집어내어 함께 논의해보자는 시도였다. 청소년은 성에 대한 무지함을 강요받고, 보호의 울타리 안에서 주체성이 탈각된 채 존재한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는 어디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

청소년은 성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존재”로만 받아들여진다. 이들의 연애는 풋풋하고 설레지만 가벼운 터치와 수줍은 뽀뽀를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이들의 섹슈얼리티는 노출되지 않는다. 순수하다고 여긴 청소년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교복을 입은 채) 갑자기 파트너와 진하게 혀를 이용한 키스를 한다면? 그 이상의 행위를 한다면? 이들은 곧 풋풋한 영역에서 이탈한 부적절한 존재로 낙인찍힌다. 올바른 경로를 이탈한 청소년은 계도·처벌 또는 무관심의 대상이 된다. 보호주의적 태도와 무관심의 경계에서 청소년은 보호받지도 못하고 관심의 대상도 아니게 된다.

이들의 순수함은 미성숙함으로도 연결된다. 성인과 연애하는 청소년은 잘못된 결정을 내린 존재로만 취급한다. 청소년과 사귀는 음침한 성인의 계략은 차치하더라도 (이 부분도 논의의 필요성이 있지만) 청소년이 스스로 내린 선택은 언제나 쉽게 무시된다. 성인과 청소년이 연애를 시작하면, 연애 당사자인 ‘성인’과 이를 비판하는 ‘성인’만이 남을 뿐 성인과 연애를 시작한 ‘청소년의 선택’은 지워진다. 흥미로운 지점은 청소년끼리 연애를 하다가 한 명이 성인이 된 경우이다. 이때 이들의 연애는 대체로 허용된다, 이들이 함께 미성숙한 시기를 보냈기 때문일까? 서로 미성숙함을 공유하였기에 다른 커플보다는 안전하게 연애할 수 있는 것일까? 또는 같은 청소년이어도 신분이 다를 때 연애를 허용한다. 예를 들어, 18살이지만 검정고시로 대학을 일찍 들어갔다면? 심지어 빠른년생이어서 19살에 대학 3학년이라면? 이때 19살은 재수하고 휴학한 23살 2학년과 연애할 수 있는가? 반대로 대학 3학년인 19살은 고3인 19살과 연애했을 때 이를 청소년과 청소년의 연애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성인과 청소년의 연애로 바라볼 것인가? 앞서 청소년과 성인의 연애를 반대하는 사람도 대학 3학년인 19살과 성인의 연애는 인정한다. 결국 대학을 간 청소년의 연애를 허용하는 것은 이 문제의 본질이 미성숙함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연애하면 안 돼, 성적 욕망을 드러내면 안 돼, 왜냐하면 이들은 미성숙하니까, 라는 도식이 완성된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보호주의적 태도는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위험한 상황에 내쳐지게 하는 주범이다. 성적 욕망이 있는 청소년은 존재한다. 섹스하는 청소년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청소년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음흉하고 부적절하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숨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음지에서 불안한 성생활을 영위한다. 청소년에게 허용된 사적 공간이란 노래방, 공용화장실, 주차장 등 안전하지 않은 장소로 한정된다. 이들은 심지어 콘돔을 구입하기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의료기구인 콘돔은 법적으로 누구나 나이에 제한 없이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보호하고 싶은 “어른”들은 섹스는 성인이 되어서 하라며 콘돔 판매를 금지한다.

애초에 섹스하는 청소년이 잘못된 존재일까? 청소년은 성인이 되면 바로 성관계를 해도 되는가? 12월 31일 23시 59분에서 1분만 지나면 법적으로 술과 담배를 구매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시간부터는 성관계를 해도 되는가? 1분이 지난 후 숙박업소도 법적으로 허용이 되는데, 그럼 그때 바로 숙박업소로 가서 성관계를 하면 되는 것인가? 그 1분 차이가 섹슈얼리티의 허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청소년 시기까지 “무조건 안 돼!”가 중요했다면 성인부터는 “알아서 해!”가 된다는 것이다.

다 안 된다고 한다면 잠시 논의를 거쳐 어떤 세부사항이 가능한지 알아보자.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청소년은 섹스를 해도 되는가? 섹스가 불가능하다면 손을 이용한 애무나 구강성교는 괜찮은가? (‘구강성교’와 ‘청소년’이라는 단어가 나란히 배열된 것만으로 우리는 곧바로 불쾌함을 느낀다.) 이것도 안 된다면 키스는 괜찮은가? 이 모든 것이 안 된다면 자위는 할 수 있는가? 대체로 자위 말고는 아무것도 청소년에게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의 자위를 허락한다면, 부모와 사회는 자위에 대해 구체적인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청소년이 자위하는 것을 들키거나 자위에 대한 주제를 꺼냈을 때 성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른들’은 또다시 허둥지둥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금지 구역으로 밀어 넣는다. 성에 눈을 뜬 청소년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어른들은 그런 건 대학에 가고 나서 고민하라고 설명한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성인이 된다고 해서 “아빠 저 오늘 자위했어요.”라고 대화를 꺼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위조차도 대학 가서 하라는 어른들은 청소년이 어른으로 ‘승격’되는 순간 그들의 섹슈얼리티에 무관심하기에 더 이상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 바람직한 청소년이란 자위를 하되 몰래 하고, 자위하는 것을 들키거나 대화 소재로 꺼내면 안 되며, 학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성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몰래’하는 자위를 허락(?)받은 청소년은 파트너가 보는 앞에서 ‘어른’들 몰래 자위해도 되는가? 또는 핸드폰을 이용해서 자위하는 소리를 ‘어른들’ 몰래 파트너에게 들려줘도 되는가? 이는 애무도 아니고 섹스도 아니며, 금전적인 거래도 없고 합의된 일대일 관계에서 진행되는 행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허용할 수 있는가? 이렇듯 섹슈얼리티의 갈래는 무궁무진하지만 청소년은 이 모든 것은 논의되지 않은 채 차단된다. 이를 요약하자면, “무조건” “아무것도” 하지 마, 너는 “무지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청소년이니까. 이것이 청소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의 태도이다.

여기서 잠시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도발적으로 드러낸 은하선의 『이기적 섹스』를 소개한다. 게일 루빈의 논문에서부터 시작한 섹슈얼리티 이야기가 어째서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의 이야기로 이어지는지 의문일 것이다. 나에게 게일 루빈이 이론이라면 은하선은 사례연구다. 『이기적 섹스』에서 은하선은 중학교 시절부터 섹스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열다섯 살 때부터 ‘대학생 오빠’와 섹스하고, 이후 ‘30대 중반 아저씨’를 만나 섹스하고, 그다음은 ‘이혼남’과 섹스를 했다. 그러나 은하선은 당시 “어리다는 이유로 섹스하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고, 섹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고, 누군가와 섹스를 하며 원하지 않는 폭력적인 상황이 닥쳐도 내가 알아서 해결” (57) 했다고 말한다. 청소년은 책임감이 없어서 섹스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를 반대로 적용하면 성인이 되는 순간 저절로 책임감이 만들어지는 것이냐고 은하선은 반문한다. (60) 책임감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체 없는 책임감”이라는 단어로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외면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고 바람직한 성생활을 위한 성교육이 재고되어야 한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들을 섹스하는 주체로 바라볼 수 있다. 청소년의 섹스에 동의한다면, 이제 그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주체적으로 섹스하는 청소년은 청소년끼리만 섹스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청소년은 성인과 섹스할 수 있는가? 청소년과 성인의 (상호 동의하에) 섹스가 가능하다면 이는 서로를 욕망하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성인은 청소년을 욕망해도 되는가? 청소년이 성인을 ‘먼저’ 욕망할 때에만 성인의 욕망이 허락받는 성질의 것이 된다면 이는 또다시 청소년을 미성숙하고 보호해야 할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성인이 청소년을 성적으로 욕망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게 옳다. 그렇다면 성인이 청소년을 성적으로 욕망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어떤 문제가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논의하여야 하는가? 무책임하게 청소년과 성인의 섹슈얼리티를 곧바로 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대 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사유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게일 루빈이 문제 제기한 세대 간 섹슈얼리티가 아닐까 한다. 그동안 금기시되어 온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수면 위로 올려서 더 나은 방안을 찾아보자는 도발적인 질문인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논하는 것이 아동성범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논하는 순간 모두가 청소년 대상 성범죄를 동의하냐고 묻는다) 현재 한국 사회는 여전히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아동(청소년)성범죄가 만연하다. 설사 공론화되었다고 해도 기소까지 가는 과정은 너무나 고단하며, 기소된 이후에는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이 문제시된다. 이 상황에서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그들의 섹스를 입에 담는 것이 자칫 성범죄자의 합리화를 위한 무기가 될까 두려운 심정이다. 그러나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논하는 것은 그동안 음란하게만 바라본 성을 올바르게 사유하는 방법이며, 성을 사유하지 않아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청소년을 돕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가 은폐되면서 도리어 성범죄의 표적이 되었을 때, 이들이 도움을 요청할 곳은 어디에도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논하는 것은 성을 사유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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