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기] 아는 사람 섭외하기

최종 수정일: 5월 24일



최근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연구자들 간에 약간의 논쟁을 오가게 한 기사가 있다. <교수신문>에서 창간 30주년 기념으로 준비한 ‘30대 전후 신진연구자’ 좌담(1편, 2편)이었다. 좌담의 내용을 보면 나 또한 ‘국내박사’가 되기 위해 학계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1인으로서 공감할 만한 내용이 많았다. 특히 대학원 교육의 문제와 학문후속세대에게 자원을 분배하지 않음으로써 학계 전반의 재생산 문제가 방기되는 현상에 관해 재차 고민해보게 되었다. 사실 별다른 꺼림칙함 없이 기사를 공유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이 기사에 관한 불편함을 드러냈다. 핵심 이유 중의 하나는 좌담에 섭외된 ‘30대 전후 신진연구자’의 구성에 있었다. 현재 소속을 기준으로 서울대가 4명, 카이스트가 2명, 고려대, 성균관대가 각각 1명으로, 구성원들이 대부분 소위 ‘명문대’ 재학 중이거나 출신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참여자들의 소속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들을 통해 재현되고 있는 ‘30대 전후 신진연구자’들의 생각과 현실까지 명문대 기준으로 편향되어 있음을 느낀다고들 말했다. 타임라인의 여러 필자는 지방대 소속 연구자는 물론, 서울 내의 비-스카이 대학을 배경으로 연구하고 있는 연구자로서 느껴지는 이물감을 표현했다. (사실 나 역시 ‘연세대’ 배경의 연구자였고,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별도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 점이 나에게 이후의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이 좌담을 기획한 기획위원 이우창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 게시글을 통해 해당 논쟁에 관한 약간의 첨언을 남겼다. 1) 가급적 대학원을 둘러싼 거버넌스와 제도를 이해하는 감각과 경험이 있는 연구자, 2) 가능하면 다양한 지적 배경을 가진 연구자 라는 두 가지 조건을 좌담 참여자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제한된 시간 동안 인간관계 안팎에서 추천을 받아” 좌담 참여진을 꾸리게 되었다는 정보도 알 수 있었다. ‘인간관계 안팎에서’라는 여덟 글자는 나에게 두 가지 감상을 동시에 남겼다. 한 가지는, 기획위원 선생님이 정말로 ‘그나마 30대’라는 이유로 이 기획을 맡게 되셔서 고생 많이 하셨겠다는 이해의 감상. 다른 한 가지도 이해의 감상이다. 아는 사람, 혹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섭외하기가 결국 그 편향의 이유였음을 알게 되었다. 서울대 소속의 연구자가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했으니 서울대가 많을 수밖에 없었겠다는.


이같이 자신의 주변에서 사람을 찾는 일은 호모필리(homophily), 즉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이는 경향을 거쳐서 이를테면 불평등한 분배나 사회 양극화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좌담의 참여자를 섭외하는 일이 (이를테면 대통령이 장관, 비서관 등에 누구를 선임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와 같이) 아주 중요한 물질 재화나 상징 재화를 분배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30대 전후 신진연구자’에 대한 대표성을 ‘30대 전후의 명문대 배경의 신진연구자’가 갖게 될 때 매우 미묘하거나 미세하지만, 관련된 담론 전반에서 ‘명문대 배경’이 논의의 초점이 됨으로써 형성되는 상징폭력이 존재할 수 있다.


정확하게 대응하는 사례라고는 할 수 없으나, 좀 더 흔하고 쉽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청년세대 좌담회’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좀 더 아찔(!)하다. 명문대를 졸업한 사회초년생 기자는 조직 내에서 그 자신이 청년이라는 이유로 청년세대와 관련한 기획 기사 작성을 지시받는다. 자신의 인적 연결망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쉬우면서도 실패하지 않을 방법이므로 ‘아는 사람 섭외하기’를 진행한다. 그런데 그 아는 사람이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은 보통 계층 등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동질한 집단이다. 명문대를 졸업했거나, 명문대에 재학하고 있거나, 명문대를 자퇴한 사람들이 모여 ‘청년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을 기준으로 나눈다. 기사를 주로 소비하면서 말을 얹는 사람은 명문대를 졸업한 기성세대고, 가끔은 이러한 기사가 ‘서울-중산층-명문대생-남성’ 위주의 목소리만을 담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조차도 명문대 출신이다. 이는 국내 대학의 서열 체계, 그리고 위계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특권이 생각보다 견고하고, 또 내부자들이 스스로 이를 마주하기는 꽤 어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아는 사람 섭외하기’를 하는 사람이 기자나 좌담 기획위원만 있는 건 아니다. 이는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위해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대학원생들이 학위논문 작성 과정에서 동료 대학원생을 인터뷰하는 일, 교수나 강사가 연구참여자로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부생들을 표집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양적 연구라고 꼭 다르지는 않다. 현실적으로 무선 표집(random sampling)의 기준을 실제로 만족시키는 표집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리서치 회사의 패널을 활용할 수 있는 경우도 매우 제한적이다. 결국 자료수집을 직접 해야 하는 꽤 많은 연구에서는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뿌리는’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기에서 지식 생산자들이 생각보다 지식의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탈피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아는 사람 섭외하기’가 지식 생산 과정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수신문>의 기획 좌담으로 글을 시작하고 꽤 많은 분량을 할애했지만, 그 좌담의 내용은 매우 생산적인 부분이 있으며 그것 자체의 가치가 패널 섭외의 일정한 편향성 때문에 완전히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는 특히 논문 형식의 글쓰기와 관련해서, 이를테면 연구자 자신을 연구대상으로도 삼는 자기민속지학(autoethnography)이나, 소수의 인원을 표집한 질적 연구가 일반화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과학적 연구에 부적합하다고 여기는 것에 완전히 반대한다. 그것이 자기 표집을 통해 이루어졌든, ‘아는 사람 섭외하기’를 통한 것이든, 아니면 완전한 무선 표집을 통한 것이든, 그 표집 절차와 표집의 논리, 표집 결과에 대한 과학적 성찰성을 발휘함으로써 우리가 좀 더 맥락화된, 좀 더 나은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표집에 대한 ‘솔직한’ 성찰이 우리 세계에서 매우 귀한, 즉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라는 점이다. 청년세대 좌담회 기사와 관련하여 눈에 불을 켜고 참여자 각각의 학력 등의 배경을 알아보지 않는 한, 그들의 계급/학력 동질성은 숨겨진다. (<교수신문> 좌담회의 경우 반대로 학교 배경이 너무 전면에 드러나 있어서, 그것이 손쉽게 비판받을 수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질적 연구자들은 아는 사람들 위주로 연구를 진행한 이후에도 논리를 그럴듯하게 세우면서 목적적 표집이나 이론적 표집이라는 정당화로 자신의 논문을 스스로 감싼다. 몇몇 양적 연구자들은 통계학 이론을 빌린 자료분석 방법론으로 표집이나 자료수집에서 발생하는 일부의 엉성함 혹은 편향을 무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도 하다.


그저 아는 사람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여러 요직에 넣어두고 그것을 ‘능력주의’에 따른 ‘공정’한 인사라고 포장하는 그런 관행 내지는 뻔뻔함과 우리의 지식 생산이 다르다는 것을 매순간 증명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는 사람 섭외하기’에 대해서 좀 더 성찰하고, 그 성찰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보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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