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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정확한 사랑의 전달

최종 수정일: 2022년 3월 12일



신화와 서사 수업 시간이었다. '우주에요.' 우주라니. 내가 매일 보아온 '하늘'은 우주였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충격에 무릎 뒤가 저릿해온다. '하늘'로 상상해왔던 감각이 확장되던 그 순간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단어는 우리를 의미 안에 그리고 제한적 공간 안에 가두어 둔다. 우리가 하나의 단어를 두고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양한 상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듣고 각자가 떠올리는 사랑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단어를 듣고 발화하면서 서로를 오해하고 스스로 오해 속에 갇힌다.


"나 지금 너와 영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스무 살의 어느 날 도착한 문자는 나의 이성을 중지시켰다. 왜 '사랑한다'라는 명확한 표현으로 사랑을 '정확하게' 언표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 사랑을 '노력'한다니. 사랑은 철저한 감정의 영역이 아니었던가? 당시 나는 '사랑해'를 조금 특별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담긴 고백이라 생각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는 바디우의 관점에서 충실한 사랑을 행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사랑을 정확하게 언표한다 해도 전달 받은 사랑은 전달하고자 했던 사랑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일곱 살 난 조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조카의 장난에 짜증이 난 친구는 얼굴을 찌푸리며 "나한테 왜 그래?"라 묻는다. "좋아서 그래." 조카의 답을 들은 친구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온다. '그럼 계속해도 된다'는. 조카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는 '장난하는 것'이 좋다였지만, '네'가 좋다로 전달 받은 친구의 마음은 두드림 없이 열려버렸다. 이것은 의미 전달의 실패가 인도한 결과로, 내가 목격한 수많은 오해의 역사 중 한 장면이다. 어떤 말이나 행동은 의미와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을 전달한다. 어떤 의미는 각종 수사(修辭)로 무장한 구체적인 말이나 행

동을 경유해도 전달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수신의 영역에서든 발신의 영역에서든, '정확한' 전달에 성공했는가를 살피는 것은 무용해진다.

우리가 전달하고 전달받는 것들은 발신과 수신 이전에 너와 나에 의해 이미 오염되어 있다. 두 사람 혹은 다수의 사람이 있다. 이들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그것이 연인 관계든 친구 관계든 관계 맺기는 합의된 무대에 서로를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 각자가 다르게 상상하는 무대에 서로가 원하는 역할로 상대를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을 이해하려는 그리고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과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간다.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서로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면, 정확하고 순수한 상태로 전달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상대에게 충실히 오염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실패할 것이 확실한 시도를 계속할 때, 내가 만들어온 오해의 역사는 중지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글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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