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이불밖] 교생실습 후기: 학급 정치에 관한 몇 가지 생각

  • 4시간 전
  • 10분 분량

나는 서울의 모 교육대학원에서 교원양성과정을 밟고 있는 교사 지망생이다. 지난 5월 대학원 근처의 한 공립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교생실습을 마쳤으며, 그 과정에서 고민거리가 조금 생겼기에 이곳에 나눠보고자 한다. 이 고민이 부분적으로는 내 성격적인 특징에서 비롯되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분석적, 실천적 쟁점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최대한 정리하여 제시해 보겠다. 그러나 일단은 내 학창 시절 이야기부터 잠깐 풀어볼까 한다.



1) “...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약 11년 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2학기 부회장으로 뽑힌 내 친구가 말한 당선 소감이다. 우리 반은 후보로 지원하지 않은 학생에게도 투표할 수 있었는데, 상냥하고 모범적인 인상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던 내 친구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부회장직에 당선되자,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뜻밖의 말을 내뱉은 것이다. 화가 난 담임 선생은 직권(?)으로 부회장 당선을 취소하고, 그다음으로 많이 득표한 다른 학생을 부회장직에 ‘임명’하여 상황을 마무리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담임과 학생들 간, 잠재적으로는 학생들 간의 관계마저 악화일로로 치닫던 당시 우리 반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공부 안 하는’ 일반고 문과 남자 반이었던 우리 반은 3~5명 정도를 뺀 대부분의 학생이 수업 중 잠을 자거나 딴짓을 하는, ‘고3’에 관한 상식과는 딴판인 학급이었다. 한마디로 규율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는데, 문제는 담임 선생 역시 어떻게든 학생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교육가’적 열정과 독기가 투철한 불도저 같은 교사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말 그대로 매일매일 종례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독설과 폭언에 가까운 훈계를 이어갔으나, 더 큰 문제는 이제 학생들도 머리가 굳어서 말로 혼내고 위협한다고 그 말을 듣는 게 아니고, 반발심만 쌓여갈 뿐이었다는 것이다. 갈수록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시간과 감정이 소모되고, 자습 시간마다 어수선하게 떠드는 소리가 그나마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자 학생들 사이에서도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렇듯 서로 평행선을 그리며 적의와 경멸만 팽배해지던 상황이니, 부회장이랍시고 그 사이에 끼어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학급 임원과는 다른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부회장에 당선된 그 친구는 (나와 더불어) 입시경쟁의 압력, 학교의 비민주적 규율과 통제, 청소년 인권 등에 관한 운동권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우리조차 ‘부모님의 헌신을 무시하며 인생을 무책임하게 산다’거나, ‘멀쩡한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준다’는 교사들의 의미 규정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시선으로, 그래서 늘 어느 정도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그러한 상징폭력을 재생산하며 학생들을 통제하고 비난할 수는 없었기에, 그 친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었을 뿐인 것이다. 또한 그 저어함에 포함된 최소한의 저항 의식을 감지했기에 담임 선생은 화를 내며 부회장을 교체했던 것이다.


2) 교생실습에서의 경험


11년 전에 있었던 일을 느닷없이 언급하는 이유는, 얼마 전 교생실습을 하며 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음”의 감각을 다시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습한 학교가 그때만큼 파행적인 국면인 건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수업 참여율도 높고 학생과 교사 간, 학생 간 관계도 완만한, 보기 드물게 평화로운 학교였다. 나 역시 한 달 남짓의 기간 동안, 흔히 ‘돈 없는 연예인’이라 불릴 만큼 학생들에게 인기를 누린다는 교생 선생님의 역할을 하며 이런 고민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학급 경영 실습을 하며 뜻밖에 규율과 통제, 통치의 문제에 직면하여 골치가 조금 아팠고, 여러 제약과 원칙이 충돌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무능과 무지를 절감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지각에 대해 벌칙을 매기는 방식을 무언가 바꾸자고 주장하다 공개적으로 박살이 난 경험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지각에 대한 벌칙이란 똑같은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에는 규율을 받는 입장이 아닌 하는 입장에서 이런저런 마찰에 연루되었다. 매일 아침 8시를 기준으로 지각한 학생을 확인하여 종례 후 교실 청소를 돕도록 지도하는 게 담임 선생님 대신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어쩌면 나도 입장이 달라지며 무감각해져서 그런 것이겠지만, 청소라야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빗자루로 눈에 보이는 큼지막한 쓰레기만 대충 쓸어 담으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이게 쟁점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종례 시간에 지각한 (것으로 기록해 놓은) 학생 두 명을 지목하여 청소하도록 공지했더니, ‘아침에 종이 칠 때 교실에 들어왔으니 무효’라고 항변을 하는 것이다.


그 항변이 꽤 거셌기 때문에,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싶어서 약간 당황한 마음으로 조례 때의 기억을 되짚으며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으로도 확실하지 않았으므로, 항변을 수용할 수도, 서로에 대한 불쾌감까지 무릅쓰며 학생들과 진실 게임을 할 수도 없었다. 항변자들은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자 상황을 마무리 지을 권한이 있는, 마침 교실에 들어온 담임 선생님에게 입장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결국 누구 말이 맞는지는 다소 애매하게 남겨놓은 채 일단 청소를 면제받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여기서 애초에 내가 이전부터 종이 칠 때나 그 직후에 교실에 들어오는 정도의 지각은 대충 눈감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자. 그러나 문제는, 나중에 문득, 그날 아침 내가 항변 학생들의 이름을 두 번씩 부르며 확인한 이후에야 지각 체크를 한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쩌면 이것이 나도, 학생도 동시에 억울한 어떤 애매한 상황에서 비롯된 오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억울해 보이던 학생들에게는 미안하게도, 임시 감독자의 미숙함과 우유부단함을 이용해 벌칙을 우회한 시스템 해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실 항변 학생 중 한 명은 며칠 전 똑같이 지각으로 인한 청소 벌칙을 부과받았으나, 청소를 거의 하지 않고 다른 학생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적당히 뻐기는 것으로 벌칙을 회피한 전력이 있었다. 문제는 내가 다른 학생이 이를 지적하는 걸 보면서도 사실상 “청소합시다” 지시하는 말을 하는 게 어색하고 무서워서 그 상황에 개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식의 지체와 머뭇거림을 통해 규율이 느슨해지는 미묘한 지점들이 몇 번 노출된 것만으로도 곧바로 더욱 대범한 위반 실험이 가해진 게 아닐까 싶은데, 여기서 조차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시 정당성과 권위에 대한 공개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더욱 잦은 이탈을 가능하게 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다음 날인가, 8시 종이 친 직후에 교실에 들어온, 말하자면 10초 남짓 지각한 다른 학생을 평소처럼 모른 척하려 했더니, 문제의 항변 학생 중 한 명이 이번에는 종례 때 콕 집어서 “쟤 지각했어요~”, 하고 그 학생을 공개 고발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논리에 의해 본인의 원래 항변이야말로 무효가 되는 것 아닌가!) 단지 친한 친구를 장난삼아 골탕 먹여 보려는 의도였겠으나, 한번 언급이 된 이상 규칙의 형평성이 공개적인 시험대에 오르게 되므로 모른 척을 감행할 수 없게 되며, 이는 그 자체로 규칙의 적용을 상시적인 쟁의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담임 선생님이 그 학생을 따로 불러 “교생 쌤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라며 부족한 권위를 보충하여 묵살해 주신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하루인가, 이틀 뒤에는 마찬가지로 지각을 한 다른 학생이 점심시간에 따로 청소를 하였으므로 바로 집에 가도 되겠냐 물었는데, 진위를 따지기도 애매해서 그냥 그러시라고 하였으나, 사실 그건 순 거짓말이라는 또 다른 학생의 뒤늦은 제보를 들어야 했다. 이쯤 되면 제보를 한 학생을 믿어야 할지, 혹은 그것마저 장난이나 오해인지 모르겠지만, 앞선 일들이 ‘이 선생님은 편의에 따라 이런저런 방식으로 규칙의 적용을 조작해 볼 수 사람’이라는 인식을 자아냈다는 점만큼은 명확해 보였다.


3) 학급 통치의 문제


물론 여기서 단지 학생들이 나를 기만해서 좀 괘씸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어난 일만 놓고 보면 –특히 고등학교 3학년 때와 비교하면 사소하기 짝이 없는-실랑이를 조금 겪으며 묘한 분위기를 몇 번 겪었을 뿐, 이것이 교생과 학생들 사이의 의례적인 우호 관계를 해칠 만큼 무슨 공개적인 분쟁으로 비화한 것도 아니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이렇듯 약간의 기회마저 기민하게 활용하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공개 논쟁을 촉발하는 학생들의 능동성과 역량이야말로 학급 민주주의의 잠재성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중요한 것은, 학급에서의 규율과 질서는 이토록 미묘한 것일지언정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교란, 위반, 이탈, 전용의 조짐을 보이도록 구조화되어 있으므로, 자발적 협력을 통해서만은 그 이행을 바라기가 어렵다는 일차적인 사실 자체이다. 이로 인해 교사의 업무 수행이 본의 아니게 권력과 권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통치의 문제에 말려드는 과정을, 통치에 대한 무능과 단순한 주저함이 불러올 수 있는 혼란을 통해 실감하게 된 것이다.


이 학급 통치라는 과제가 교사-학생의 관계를 틀 짓는 방식들을 조금 더 논의해 보자. 이상의 경험을 통해, 교사는 기본적으로 규칙이나 그 집행에 대한 정당성을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학생들의 신뢰를 얻는 동시에, 적절한 수준과 방식에서 이의 제기를 관리하며 실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큼 학생들보다 우위에 있도록 요구된다는 점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주변의 다른 교생 선생님들 역시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는 일단 우위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우위의 확보란 무엇보다 서열에 대한 상호인정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규율의 준수 여부부터 학생들의 미세한 몸짓과 표정에 이르는 단서들을 통해 주기적으로 확인되거나, 적어도 그런 것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의 의도적인 저항이 일어나는 것도 많은 경우 바로 이런 차원에서이고, 그렇기에 상황이나 교사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정도로 ‘얘가 지금 나한테 반항하나’라는 편집증적 의심증이 유발되기도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급이 최악으로 치달은 것도 부분적으로는 –사실은 그저 관심이 없었을 뿐인-학생들의 일탈과 위반을 반항의 일종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던 담임 선생이 학생들을 일일이 찍어 누르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 역시 위에 언급한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사안에 대해서도 학생들이 다 같이 나를 속이려 든다는 기분이 든 적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언제나 서열을 전면에 내세워 고압적인 명령과 처벌을 통해 이탈과 위반을 관리하는 방식은 적어도 내가 실습한 학교에서는 더는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었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미 11년 전의 고등학교 3학년 학급 역시 좀 특이할 정도로 경직된 성격이었던 담임 선생이 먹힐 수 없는 전술을 고집하며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일 뿐, 그런 식의 통치가 관철되는 상태가 아니었다. 앞서 내가 실습한 학교는 보기 드물게 평화로운 편이었다고 말한 바 있고, 실제로 비교적 수업 참여율이 높고 학생들이 대개 유순했던 것도 맞지만, 정확히는 교사와 학생 모두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느슨하게 조율되어 있어, 무리하게 그 선을 뭉개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인정이 이뤄진 것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이를테면 기본적으로 수업 중 자는 학생을 묵인하는 모호하고 옅은 관례가 자리 잡은 가운데, 조심성 없이 자는 학생을 깨우는 행동은 종종 권리를 침해당하기라도 한 듯한 반발을 낳기도 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비단 수업 중 자는 문제가 아니라도, 다소 의외일 만큼 유순한 학생들의 태도는 한결 느슨해진 복장·두발 규제 정책, 상담 위주 생활 지도 등 학교 전반의 규율이 관용적이고 부드러워졌다는 사실과 어떤 식으로든 맞물려 있는 듯했다.


이렇듯 학생들의 대체적인 협조를 얻으면서도 그 자율적인 권역을 인정하며 분쟁의 결이 보다 미묘해진 환경이었으므로, 친밀하고 –다소 껄렁껄렁하면서도-다정한 태도를 통한 부드러운 훈육이야말로 조금이라도 확장성 있는 규율과 교육의 장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작동이 잘 되는 통치의 양식으로 보였다. 당연히 이것이 의도된 전술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학생과의 친밀성에는 주어진 환경에서 학생들에게 접속하여 어느 정도의 내적 규제력을 발휘하려는 요구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통제를 위해 친밀성이 요구되는 것만큼이나 그 반대 방향으로도, 즉 학생과의 친밀성을 위해서도 완만한 서열 관계의 각본과 의례가 편리한 경로와 자원으로 기능하는 면이 있었다. 예컨대 유독 나만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며 가급적 정중한 태도를 유지한 것이 학생들과 어딘가 서먹한 관계로 교생실습을 마무리해야 했던 이유 중 하나인 듯한데, 여기서 알 수 있듯 형, 누나 같은 친근한 상하관계야말로 교사와 학생 모두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관계 맺도록 구조화된 양식인 것이다.



4) 실천적 쟁점


이상으로 수업, 질서 유지, 학급 운영 등 교사의 ‘기본적인 업무 수행’을 매개로 통치의 문제가 개입되고, 이것이 교사-학생 간 관계를 강하게 틀 짓고 유도하는 몇몇 방식을 짚어 볼 수 있었다. 통치에 수반되는 시선과 정념을 얼마나 내재화하는지와 별개로, 웬만하면 그러한 객관적인 위치 안에서 학생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어떠한 조건이 있다고 느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안에서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게임을 할 것인지가 관건일 것이다. 내가 항변 국면을 겪으며 머리가 좀 아팠던 이유는 앞서 말한 조건과 더불어 여러 현실적, 윤리적 제약이 동시에 모순된 요구를 하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통치’와 통제라는 기본 조건 자체를 벗어나서 학급과 학교생활을 최대한 민주화하는 데 주력하는 게 윤리적으로든, 교육적으로든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비록 어느 정도 문제적이라고 여기면서도 실제로 문제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따지고 보면 ‘지각한 사람이 벌로 청소를 한다’는 문제의 규칙은 학생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적용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지각을 했다고 굳이 ‘벌’을 준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성인들의 학습 공동체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인간관계의 자율성을 불필요하게 침해하는 발상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공적인 정당화 과정을 거쳐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이러한 근본적인 부조리함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일상화된 비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승인, 자연화, 재생산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생각을 했으면서도 일개 실습생 신분에서 행여나 뒷말이 나오고 일이 커질까봐 실제로 규칙 자체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의 일차적인 목적은 어쨌거나 무난히 교생실습 과정을 통과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좀 후회되는 대목이고, 내가 필요 이상으로 군기가 바짝 들어 겁을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실습 기간이 더 길었으면 담임 선생님 몰래 규칙 자체에 대한 은근한 의문 제기를 시도해 봤을 법 하지만, 여기서는 교생이 담임 선생님의 학급 운영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제약을 감안하자. 사실 실제 담임 선생님 직책이라면 이 정도의 학급 민주주의를 실현할 재량권은 있었겠지만, 여러 차례 강조했듯 수업, 규율·질서 유지, 여타 행정적 관리 등의 업무가 있는 이상 그 재량권이란 것도 청소 당번 규칙을 공론을 통해 정하는 수준 이상으로 확장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즉 교생이든 교사든 어느 정도는 ‘통치’라는 기본적인 조건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고, 모든 종류의 ‘근본적인 부조리함’을 당장에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아무튼 다른 한편으로, 학교생활의 규칙이 결정되는 방식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어쨌든 집단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학생 개개인의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분간 한 공간 안에서 다 같이 생활하는 이상 모든 학생은 공간 관리를 비롯한 집단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협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 ‘학교라는 서비스 기관의 고객인 학생이 왜 학교를 청소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곤 하지만, 집단생활에 필요한 모든 활동을 별도의 용역 업체에 맡길 수는 없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이것이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앞서 논했듯 학생이 관리, 통제되는 방식에 문제가 있고, 심지어 의무 교육 제도 자체의 강제성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교생의 소심함이나 혹은 그 너머의 압력으로 인해 ‘지각-청소 규칙’이라는 상황적인 제약을 일단 받아들인다면, 특정 학생만 청소 벌칙에서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다른 학생과의 형평성을 지켜야 할뿐더러, 그 학생이 청소를 안 하는 그만큼 다른 학생들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결론이 뒷받침된다.


그러므로 원점으로 돌아와 어떻게 청소하도록 ‘지도’할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한번 환기하자면, 5분짜리 청소가 뭐 대수냐, 관리가 좀 어설퍼도 ‘자발적 협력’을 통해 알아서 대충 이행되겠지, 라는 애초의 막연한 짐작은 순진하고 편의적인, 무엇보다 내 과거조차 망각한 생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경우 사람들의 상식적인 대응은 통치의 논리에 따라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여 규칙을 집행하는 동시에 반복적인 위반과 불이행을 처벌하고, 위반자를 훈육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교실의 질서와 위생뿐만 아니라, 위반자 본인의 인성을 교정하기 위해서도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보조적인 논거가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방금 언급한 ‘친밀한 상하관계’의 외 양을 취할뿐더러, 어쨌든 정당화 논변(“너 아까 지각한 거 봤거든?” 등)을 제시해야 하므로 학생들조차 대체로 이것을 억압으로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결정의 최종 심급으로 성인, 교사로서의 권위를 동원한다는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대응 방식은 성인-미성년, 교사-학생 간의 인격적 권력관계에 기대어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재생산한다. 그런 점에서 두 집단 간의 올바른 관계에 관한 윤리적 쟁점을 제기한다.


이 지점에서 처음의 나는 그래도 가급적 권위의 확립을 통한 명령과 통제는 피하고자 한 것인데, 물론 정확히 그런 태도로 인해 위반과 이탈이 확대되며 ‘통치의 위기’에 봉착했다.


아마도 지각한 학생에게 명시적인 확인을 받는 등 규칙의 투명성과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보조적인 절차를 도입하는 게 논란의 껀덕지를 없애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의미를 좀 부여하자면 통치의 실행 방식을 인격적 명령에서 기계적 절차에 기반한 것으로 한 걸음 옮겨놓음으로써 규칙의 자의적인 집행을 막고 통치의 안정화를 가져오는 효과도 있을 듯하다. 비슷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면 이 정책을 도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이것으로 만족할 경우 우리가 애초에 제약으로 받아들였던 규칙 자체의 ‘근본적 부조리함’은 의식하지 못하게 되며, 통치만 더욱 매끄러워진다는 정치적 효과가 발생한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원칙과 제약에 관한 이상의 논의가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엄청나게 복잡하고 장황하게 느껴지겠지만, 놀랍게도 이것이 내가 항변 국면을 겪는 며칠 동안 실제로 고민한 내용이다. 이런 여러 제약과 원칙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통치의 위기가 실시간으로 확산되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상황을 겪으며, 11년 전의 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음”의 감정이 살짝 연상된 것이다. 어쨌든 나는 실제로 내일 당장 교실에서 작동할 수 있는 판단과 실천의 모델이 필요했는데, 고육지책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고안해 냈다. 물론 이것은 ‘지각-청소’ 규칙에 국한되지 않고, 학급 운영 전반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학생의 자율성과 인격을 최대한 존중한다. 권위로 학생의 의견을 제압하지 않도록 하며, 설득과 공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학생의 의사 표시의 자유를 존중한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규칙은 지켜져야 하며, 이를 위한 자잘한 타협과 실랑이가 불가피하다. 따라서 겉보기에는 ‘부드러운 통치’, 혹은 연성 권위주의와 구별되지 않는 태도로 학생들을 대해야 할 수 있다.

정세와 여건이 허락하는 최대한, 학급과 학교가 운영되는 방식 전반을 틀 짓는 비민주적 의사결정 구조 및 학생/미성년-교사/성인 간 권력관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민주적으로 재구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암시와 모순 노출, 새로운 제안을 통해 기존 규칙을 상대화하는 등 완곡한 언어 전술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학교와 학급의 여러 쟁점에 관한 실제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는 지나치게 원론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11년 전에 나와 내 친구는 면밀한 분석과 판단에 기반한 믿을 만한 원칙이 없어 ‘운동권 내각’을 이룰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스스로 붕괴하였는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게 교육실습 후기의 결론이다.



글. 아메리카노

편집. 김지수



댓글


사단법인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2019 by 김선기.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